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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5화)
6. 군제 개혁(2)
다음날 제라린이 영주성 밖에서 상비군들이 훈련을 하는 벌판으로 향했다.
기사대장인 앨버트가 약 400명가량의 상비군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원래 세 영지의 상비군들을 다 합치면 약 천오백 명가량이었지만, 몇 번의 전투로 약 900명 정도로 줄었었다.
제라린은 정예병을 원했기에 그중에서 다시 고르고 골라서 약 400명을 뽑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원래의 지역으로 돌려보내서 방위군의 주축으로 삼았다.
제라린은 기존의 상비군 체계를 완전히 바꾸어서, 기동군과 방위군으로 나누었다. 기동군은 중장보병과 기병대 위주의 정예병으로 구성되었고 방위군은 일반 상비군과 영지민들로 구성된 체제였다. 영지민들은 십 일에 하루씩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고, 방위군과 같이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 중장보병이 될 병사들이 이제 막 구보를 끝냈는지 숨을 헐떡거리면서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체력이 제일 우선이라고 생각한 제라린이 기병뿐만 아니라 보병들의 기본 훈련 일정에 매일 5km씩의 구보를 추가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쁜 숨을 내쉬는 모두의 얼굴은 상당히 밝았다. 군제 개편을 하면서 제라린이 기존의 1실버 30쿠퍼에서 2실버 30쿠퍼로 봉급을 인상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길이 60cm가량의 목검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대열의 앞에는 가로 50cm 세로 90cm가량의 직사각형 형태의 나무 방패가 약 이십여 개가 있었다.
제라린이 생각한 중장보병의 기본 무기들이었다.
대부분 목검은 잘 마련했지만 방패는 아직까지 마련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병들이 대열을 갖추는 동안, 앨버트가 제라린의 근처로 와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소영주님, 그런데 이들의 무기가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이제까지 긴 창을 쓰다가 갑자기 이렇게 짧은 검을 쥐면 상당히 불리할 텐데요.”
앨버트도 기존의 일반적인 상식 ‘싸울 때 길면 길수록 유리하다’라는 일반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오. 집단전에서는 상황이 틀리오. 그리고 장창을 가진 병사들도 있지 않소?”
“예? 그건 그렇죠. 하지만 너무 복잡하게 편제를 짜신 게 아니신지… 병사들도 좀 혼란스러워 합니다.”
기존에 상비군들은 단순히 창을 가지거나 칼과 방패만으로 무장했었지만, 제라린은 좀 더 복합적인 전술을 구상했기에 그들에게 요구하는 게 많았고, 그런 점을 앨버트가 우려하는 것이었다.
“아니. 집단전에서는 저 정도 길이의 검이 오히려 유리하오. 내가 알려 준 대로만 훈련시키시오. 그러면 이들은 강병이 될 것이오.”
기존에 경험과 전투력에 따라 3열 횡대로 전투대형을 취하던 로마의 중장보병 모델에서 제라린은 변화를 주었다.
우선 기본 대형을 4열 횡대로 잡았고 앞의 1열과 2열의 기본 전투 장비는 길이 약 60cm의 찌르기와 베기 공격이 가능한 글라디우스와 가로 50센티미터, 세로 90센티미터의 사각 방패로 지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 열인 3열과 4열은 궁병이었다. 각각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고 두 명이 긴 장창 한 자루를 공통으로 가질 계획이었다. 이 장창은 기존의 상비군들이 가지던 창대가 나무로 된 것이 아닌 모두가 강철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약 보름에 걸쳐서 수도인 아시렌 시티로 올라가 기사 안토니. 제라린의 명령대로 영지 승계와 영지전에 대한 보고를 왕성과 귀족원에 올렸고 지금 아시렌 시티는 그로 인해서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귀족원 대회의실.
벽에는 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고 창마다 아름답게 수놓인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넓은 회의실의 중앙에 커다란 원탁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주위에 고위 귀족들이 앉아 있다.
“아니, 영지전을 두 번이나 했다고? 그것도 상대 영주들을 잡아서 완전히 내쫓은 상태이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사람은 북부의 실력자 노스터 공작이었다.
그는 영지전의 결과로 영지가 합병되었다는 소식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영지전은 최근에도 간간히 일어나고 있지만, 영지가 완전히 합병된 것은 근 50년 내에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60대 초반인 노스터 공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홀을 울리자, 귀족들이 긴장을 했다.
그는 귀족들 중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성격이 무척 꼼꼼하여 무엇이든지 트집을 잡기 좋아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율리우스 남작과 자신의 가문과의 혈연 관계를 재빨리 머릿속에 계산한 사람도 있었다.
그때 역시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던 한 고위 귀족이 나섰다.
“아니, 노스터 공작님. 율리우스 영지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보니까 관례에 크게 어긋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영지야 율리우스 남작이 죽었으니 당연히 그의 아들이 승계하는 것이 맞고, 두 번의 영지전은 한 번은 클래치스 남작이 먼저 신청했고 지금 율리우스의 소영주는 글라토스 자작에게만 한 번 신청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는 중부의 실력자 센버튼 후작이었다. 대표적인 왕당파 고위 귀족으로 귀족파의 대표적인 수뇌인 노스터 공작이 나서자 괜히 훼방을 놓기 위해서 나선 것이었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단기간에 영지 두 개를 합병하던 일은 근래에 없었소. 그냥 영지전을 통해서 귀족의 명예만을 다투었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근래에야 귀족들 간의 다툼으로 영지가 합병되는 일이 잘 없었지만, 건국 초기에는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이 아니던가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지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영지가 다른 귀족에게 합병되는 일이 잘 없도록 한 것이 아니오?”
노스터 공작은 제라린이 영지를 합병해 버린 일이 계속 걸린다는 듯이 얘기하자 둘의 대화를 듣던 서부의 실력자 웨스전 공작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관례를 벗어나지 않은 일을 허락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그러시면 일단 영지 승계는 허락하고 영지전에 대해서는 따로 사람을 파견해서 조사를 하는 게 어떠신지요?”
그의 말에 대회의실을 가득 메운 약 30여 명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찬성의 뜻을 나타내었다. 노스터 공작도 대세에 따라서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를 하는 데에 찬성을 했다.
먼 남부 지방의 약소 귀족의 일이었기에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귀족들은 없었다.
글라토스 영주성의 영주관 제라린의 응접실.
비록 클래치스 영지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글라토스 영지가 다른 두 개의 영지보다 크고 아센 강과 가까웠기에 제라린은 글라토스 영주성을 그가 다스리는 영지의 영주성으로 선포하고 여기에 주로 거주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나마 자신이 믿을 수 있는 휴렌 집사와 에이런 시녀장 등을 비롯해서 모든 시종들과 시녀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그 응접실에서 제라린이 지금 한 노인과 마주앉아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슈미트. 원래 율리우스 영지의 대장장이였다.
그는 제라린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몰라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슈미트 영감. 영감이 율리우스, 클래치스, 글라토스 세 영지의 대장장이들을 통솔해야겠소. 그리고 아센 강 근처에 통합 대장간을 만드시오.”
그제야 자신을 이리 부른 제라린의 목적을 알게 된 슈미트 영감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예? 통합 대장간이요?”
“그렇소, 지금의 대장간은 너무 작소. 그리고 사람이 망치로 두들겨서 무기류 등을 생산하는데 그 생산량이 너무 적소.”
이 시대의 대장간에서는 작은 용광로에 철광석과 목탄을 한 층씩 번갈아 쌓은 뒤에 대략 1,000도 이하의 온도에서 산소를 제거하고 철을 얻는 방법을 썼다. 이렇게 얻은 철은 탄소 함유량이 0.2% 미만의 조직이 엉성한 연철이었다. 그런 후에 상당한 시간 동안의 단조 작업을 거쳐서 고급의 강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기류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고, 생산량은 극히 적었다.
그것을 제라린이 바꿀려는 것이었다.
슈미트 영감은 제라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소영주님. 사람이 망치로 두들겨서 무기류를 만들지 어떻게 만듭니까?”
“우선 아센 강 근처에 대장간을 대형으로 지으시오. 그래서 철과 목탄보다 화력이 더 좋은 숯을 대량으로 투입하시오. 그리고 풀무질은 기존에 사람이 하는 것 외에 아센 강의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용광로에 바람을 넣는 방식을 사용하시오. 그렇게 되면 용광로의 내부 온도가 훨씬 더 올라갈 것이오.”
어느새 제라린은 그림까지 그리면서 설명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슈미트 영감도 무척 당황하다가 어느새 제라린의 설명에 빠져들고 있었다.
제라린은 용광로의 대형화, 화력 높은 연료의 사용, 강한 바람을 동반한 풀무질을 통하여 용광로 내부의 화력을 높이고자 했다.
그는 대략 1,500 정도의 온도에서 만들 수 있는 단단하고 예리하면서 동시에 질긴 철을 얻기를 원했다. 강철이었다.
어느새 제라린의 앞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목수인 우드 영감이었다.
“그래, 재료는 좀 알아봤소?”
이 노인은 전에 제라린이 활의 개량을 위하여 먼저 만나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영지 근처에서 얻을 수 있는 개량 활을 위한 재료를 알아보았다.
“예, 영주님. 영지 내에서는 다양한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데, 그중에서 영주님께서 원하는 나무들은 이것들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드 영감이 조심스럽게 가지고 온 짐을 풀었다. 그 안에는 그가 준비해 온 여러 가지 나무들이 있었다.
제라린이 그것들을 하나씩 들어서 이리저리 만지자, 우드 영감이 옆에서 설명을 해 주었다.
“예, 영주님. 지금 만지신 것은 다이나무로 휨에 강하고 질깁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무레지레나무는 질기고 탄성이 강합죠. 또 지금 만지신 것은 케라이나무로 보시다시피 아주 단단한 나무입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제라린이 자신이 만지던 나무 중에서 네 개를 골라서 하나씩 겹치기 시작했다.
제일 밑에가 다이나무, 무레지레나무, 또다시 무레지레나무, 케라이나무 순이었다. 그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활을 만들 때 이렇게 서로 다른 나무를 엇갈려서 겹쳐서 만드시오. 중요한 것은 중간에 있는 무레지레나무의 탄성을 잘 파악해서 서로 성질이 다른 면끼리 엇갈리게 조합하여야 하오. 그래야지 장력이 고르게 분포될 테니까…….”
설명을 하는 제라린의 말에는 우드 영감이 간혹 모르는 단어도 나왔다. 하지만 거의 40년 동안이나 목수 생활을 한 우드 영감이었기에 제라린이 의도하는 것은 충분히 감으로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어느새 그의 눈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설명을 다 듣고 밖으로 나가는 우드 영감을 보면서 제라린이 의자 뒤로 몸을 기대었다.
‘휴… 다행히 복합궁에 만들 나무 재료가 영지 근처에 있었구나. 이런 식으로 만들면 바깥에 있는 다이나무가 휨으로 인한 하중을, 무레지레나무가 활의 전반적인 장력을 담당할 것이다. 그리고 케라이나무가 압축으로 인한 하중을 담당할 테지… 그런데 정말 인재가 필요하구나. 내가 이렇게 모든 일을 다할 수는 없는데…….’
제라린의 몸속에 있는 나노 컴퓨터에 저장된 얼마 안 되는 자료 중에 다행히 제철 기술과 활에 대한 기술의 자료가 있었기에 제라린은 두 명에게 정확한 설명과 지시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제라린은 피로를 더 크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