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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6화)
6. 군제 개혁(3)
영주관에서의 일을 처리한 제라린이 다시 기병들과 병사들의 훈련장을 가기 위하여 영주관을 나섰다.
마침 세금징수원인 한스가 무언가를 질질 끌고 왔다.
한스는 몇 있는 세금징수원 중에서 제일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자인데 제라린이 주위의 영지들을 합병하자 제일 좋아한 인물이었다. 그의 관할이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서 끌려오는 것은 피투성이의 남자였다. 한스 의 손에 끌려오는 남자에게서 나온 피가 바닥에 떨어졌고, 길에 핏자국을 남겼다.
그 주위에서는 영주성에 사는 사람들 혹은 밖에서 일 때문에 영주성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제라린을 보면서 한스가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손으로 끌고 온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영주님, 그렇지 않아도 영주님을 뵈려고 찾았습니다. 하하하!”
“쿨럭쿨럭…….”
피를 흘리면서 엉망이 된 남자는 바닥에 부딪히면서 잘못되었는지 기침을 해 댔다. 가슴 저 밑에서 폐가 끓는 기침 소리였다.
제라린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이자는 뭔가?”
“예, 영주님. 이자가 무엄하게도 영주님의 숲에 들어가서 사냥을 했습니다. 제가 이 무엄한 놈의 팔을 자를까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하는 한스가 어느새 단검을 꺼내서 준비를 했다. 대부분의 숲과 강은 영주의 재산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일반 영지민의 사냥과 낚시는 금지되어 있었다.
한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은근히 제라린에게서 칭찬과 상금을 바라고 있었다.
땅에 쓰러진 자가 다시 한 번 기침을 하면서 피를 뱉어 냈는데, 이번에는 깨진 이빨들이 같이 나왔다.
“쿨, 쿨럭… 영, 영주님. 집에서 어머니께서 아프셔서… 고기를… 고기를 좀 드리려고…….”
평민들은 고기를 구할 방법이 없었기에 이자는 아픈 어머니의 기력 회복을 위해서 숲에 몰래 들어가서 사냥을 하다가 한스에게 걸렸던 것이다.
제라린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음… 어쩌지? 당장 이자를 풀어 주고 싶으나, 그렇게 되면 여기의 관습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아직 통치 체계가 명확히 잡히지 않았는데 섣불리 그러면 안 된다. 음…….’
마침내 고민을 끝낸 제라린이 집사 휴렌을 불러서 명을 내렸다.
“휴렌, 이자를 데려가서 치료해 주도록… 이자가 완전히 낫거든 10일간의 중노동에 처한다.”
당장이라도 사내의 팔을 자를 듯이 단도를 준비하던 한스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제라린의 명령에 어리둥절해졌다.
“예? 영주님?”
한스를 지나가면서 제라린이 슬쩍 한마디 던졌다.
“이제 추수인데 안 그래도 노동력이 부족해. 자네가 저자 대신에 추수를 할 건가?”
하루 종일 벌판에서 낫을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했는지 한스가 찔끔하면서 단도를 재빨리 거두었다.
“아, 아뇨.”
“그러면 앞으로 저런 자를 잡으면 두들겨 패서 일을 못하게 만들어서 오지 말고 멀쩡한 상태로 데려오도록… 판결은 내가 한다.”
“예, 예. 영주님.”
걸어가는 제라린이 뒤에서 인사를 하는 집사 휴렌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저 사내의 어머니가 아프다니 고기와 약을 좀 가져다주도록…….”
허리를 굽힌 채로 인사를 하던 집사 휴렌이 더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옛! 영주님.”
안토니를 수도로 보낸 지 거의 한 달이 될 무렵. 제라린은 여전히 군사 훈련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무엘에게 추수 등의 문제를 완전히 맡기고 매일 기사, 기병대, 중장보병대 인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던 제라린은 드디어 기사 안토니가 복귀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응접실 정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제라린과 또 한 명의 귀족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앙에서 제라린의 영지전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내려온 내무성 소속의 파렐 자작이었다.
파렐 자작은 30대 후반이었지만 오래 지속된 중앙에서의 안정된 생활로 뚱뚱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중앙에서 어떤 조사를 위해서 지방으로 관료를 파견할 경우 보다 정확한 조사를 위해서 두 명 이상을 파견하는 것을 원칙이나 제라린의 경우 영지전 2건 및 영지 완전 복속이라는 사안에 비해서 남부 끝 쪽의 지방이고 겨우 자작 및 남작 등의 낮은 작위의 영주들 간의 일이었기에 파렐 자작 한 명만이 파견되었다.
또한 내무성 관료들 사이에서는 왕복, 약 한 달의 먼 거리를 갔다 오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분위기가 퍼졌지만 파렐 자작은 내심 생각하는 것이 있었기에 자청을 해서 제라린의 영지로 온 것이다.
그가 자신의 중앙 관료의 위엄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제라린 폰 율리우스 남작. 클래치스 남작의 경우는 잘 알겠소. 그가 먼저 영지전을 신청했고 경은 단지 상대만 한 것을… 하지만 글라토스 자작의 경우는 경이 먼저 영지전을 신청하지 않았소? 또한, 그는 경의 큰아버지이기도 하던 왜 갑자기 그에게 영지전을 신청한 것이오?”
제라린에 대한 영지 승계를 인정하는 왕명은 떨어졌기에 파렐 자작은 그를 남작으로 인정하고 영주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파견 목적인 영지전에 대해서 조사를 했다.
제라린이 그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사실 클래치스 남작이 신청한 영지전도 글라토스 자작과 연관이 있었던 사항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이 제가 그를 징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도 확보하고 있습니다.”
파렐 자작은 경위를 설명하는 제라린을 보고 있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테이블로 음식과 술을 나르면서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들을 힐끔거리면서 쳐다보기 바빴다.
“경의 시녀들은 참 이쁜 거 같소. 하하하. 참 조금 전에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하셨소?”
파렐 자작은 이런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을 굴리기에 바빴다.
‘음… 제라린이라는 애송이 남작. 이제 18살이 되었다지? 저런 애송이한테 영지를 빼앗긴 글라토스 자작과 클래치스 남작도 한심하군. 그러나저러나 저 애송이가 내가 원하는 걸 눈치챘을까? 좀 더 티를 내어야 할까? 보통 영주들은 이 정도만 해도 알아듣는데 저놈은 애송이라서 못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증거에 대해서 묻는 파렐 자작에게 제라린이 공손히 대답했다.
“예, 글라토스 자작의 권유로 영지전을 벌였다는 클래치스 남작의 자필 진술서와 그의 기사였던 레이날 경의 증언이 있습니다.”
율리우스 남작에 대한 독살은 이미 증거를 확보하기 불가능하였고 나중에 문제가 복잡해질 우려가 있었기에 제라린은 클래치스 남작이 글라토스 자작의 꼬임에 넘어가서 영지전을 신청한 거에 대한 증거만을 언급했다.
그리고 율리우스 남작의 독살 경위를 조사해 보았지만 하인과 하녀들에게서는 혐의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단지 그날 저녁 율리우스 남작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신 데이빗 이공자가 가장 크게 의심이 될 뿐이었다.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춘 제라린이 조금 전부터 파렐 자작이 곁눈질을 하던 시녀 엘리자베스를 잠깐 보고는 말을 이었다.
“파렐 자작님. 수도부터 먼 길을 오셨는데 오늘을 푹 쉬셔야지요? 잠자리는 적적하지 않도록 마련하겠습니다.”
그런 제라린의 대답에 파렐 자작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그렇소. 남작. 오늘 무척 피곤하군요. 오늘 푹 쉬어야지 내일 또 조사를 열심히 할 수 있지 않겠소? 크하하하.”
‘그래, 저놈이 애송이라도 귀족은 귀족이군. 하하하. 그런데 저 시녀 아이는 이런 시골 영지에서 태어나서 자라서 그런지 무척 풋풋하군. 수도의 미녀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군. 오늘 밤이 기다려지는데… 하하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파렐 자작은 다시 한 번 엘리자베스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서둘러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빨리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래야지 미인을 품을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파렐 자작이 일부러 이런 시골 영지까지 보내는 조사관에 자청한 것은 이런 재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라린이 나중에 잘 봐 달라는 뜻으로 쥐어줄 부수입도 기대하고 있었다.
‘수도에 있는 놈들은 이런 맛을 모른다니까… 이런 곳에 와야지 영주가 밤에 미녀들도 주고 잘 봐달라고 조금씩 찔러 주지. 게다가 이렇게 지방으로 조사를 와도 내 봉급은 그대로 나오지. 크하하하 이게 바로 일석삼조지… 일석삼조…….’
이런 생각으로 자신의 방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응접실 옆에 딸린 하녀들을 위한 대기실.
하녀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에이런 부인이 대기하고 있었고 막 응접실에서 제라린과 파렐 자작의 시중을 들던 엘리자베스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자마자 에이런 부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에이런 부인은 엘리자베스를 어렸을 때부터 키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그녀에게 어머니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염없이 우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고 에이런 부인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다그치다시피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 무슨 일이야? 혹시 실수라도 한 거니?”
엘리자베스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만 좌우로 도리도리 흔들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에이런 부인은 더 애가 탔다.
“무슨 일이야? 응? 말이라도 좀 해 봐. 너 혹시… 파렐 자작?”
역시나 연륜이 있는 에이런 부인답게 그녀는 잠시간의 생각만으로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서러운지 입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흑… 흑흑…….”
정말 자신의 딸 같은 엘리자베스였지만 에이런 부인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 불쌍한 우리 엘리자베스, 가여운 것.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단다. 우리 영주님을 위해서는 네가…네가… 잠자리 시중을…….”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에이런 부인이었지만 엘리자베스도 자신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응접실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딸랑 딸랑.
파렐 자작을 배웅한 제라린이 그를 접대하기 위해서 종을 울려서 에이런 부인과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그가 종을 울리자마자 대기실에서 에이런 부인과 고개를 숙인 엘리자베스가 들어왔다.
막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하려던 제라린이 고개를 숙인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라린은 조금 전까지 시중을 들던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울고 있자 의아해하는데 에이런 부인이 말을 꺼냈다.
“영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 아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어요. 오늘 밤에 그를 잘 모실 겁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을 하자 엘리자베스도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보던 에이런 부인이 그녀에게 나직이 화를 냈다.
“엘리자베스, 영주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눈물을 그치지 못하겠니?”
제라린이 앞에 있기 때문에 차마 큰 소리로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평소에 엄격한 그녀였기에 엘리자베스도 눈물을 멈추기 위해서 노력했고 서서히 흘러내리는 눈물이 줄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딸꾹, 딸꾹.”
억지로 울음을 참는 애처로운 엘리자베스를 보던 제라린이 그제야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마음 한곳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휴… 이것이 이들의 이제까지의 삶이었을 것이다. 영주의 명에 따라 자기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겠지. 하지만 나는 개인의 권리가 보호되고 자유 의지가 존중되던 시대에 살다가 왔다. 비록 전쟁으로 많이 황폐화가 되었지만 그래도 지구에서는 이곳처럼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지. 그런데 나는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였던 것일까? 지금까지 약 한 달 반 정도… 죽지 않기 위하여… 살기 위해서만 온갖 힘을 썼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거 같다.’
어느덧 제라린은 지구에서의 살았던 삶과 이곳의 생활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저 시녀를 밤에 파렐 자작에게 보내 주면 무척이나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비록 저 시녀의 의사에는 반하더라도… 그런데 그게 과연 최선일까? 나는 이곳의 영주인데 이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자신만의 고민에 빠진 제라린을 보면서 에이런 부인과 엘리자베스가 안절부절 못 했다. 혹시라도 제라린이 화라도 났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에이런 부인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저… 영주님.”
그녀의 말에 마침내 제라린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에이런 부인.”
그러고는 자신이 결정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부인, 오늘 밤에 파렐 자작에게 수면제를 먹이시오.”
그의 말에 에이런 부인이 깜짝 놀랐다.
“예? 수면제요?”
“그렇소. 지금 방에 가 있을 테니 와인에다가 수면제를 넣어서 먹이시오. 그리고 그는 모레 아침에 떠날 것이니 내일 저녁에도 부탁하오.”
제라린이 내린 명령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당황하는 에이런 부인의 대답 소리와 다시 활기차진 엘리자베스의 대답 소리가 들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영주님.”
“예! 영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