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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7화)
7. 학자들과의 만남(1)
전날 파렐 자작과 저녁 식사를 같이했던 제라린은 점심 식사를 안토니 경이 데리고 온 학자들과 같이 먹었다.
영지에 인재가 부족한 점을 아쉬워한 제라린이 안토니에게 특별히 명령하여 수도에 있는 동안 인재가 될 만한 학자들을 초빙했던 것이다.
각각 홉킨스, 파라무센, 디라일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그들은 60대의 학자들로 학자를 뜻하는 파란색 자수를 수놓은 회색 로브를 입고 연신 자신들의 긴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학문에 상당한 업적을 쌓은 학자들처럼 보였다.
다만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제라린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있었다.
‘뭐라고? 자신들이 아시렌 왕국의 학문의 체계를 다 세웠다고? 지금 있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자신들한테 배웠던 제자들이라고? 허풍을 떨어도 정도껏 떨어야지…….’
학자들 중에서 파라무센이라는 사람이 조금 전부터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하하, 영주님.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은 평평한 대지입니다. 끝도 없이 광활한 대지지요. 그리고 이 땅을 중심으로 저 위에 있는 태양과 달, 별들이 계속 도는 것입니다. 이는 여기 계신 홉킨스 대학사께서 천문을 직접 관찰하면서 얻은 결과입니다. 하하하.”
“맞습니다. 홉킨스 학자님이야말로 우리 아시렌 왕국 유사 이래로 최고의 현인이시죠. 이런 대단한 업적을 쌓은 걸 보면 대대로 그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하하하. 저의 이번 업적은 이 대륙에 있는 2개의 제국의 학자들도 무척 부러워한다는 얘기를 듣기는 들었는데… 좀 쑥스럽네요. 하하하.”
이들은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업적을 말하면 다른 두 명이 이를 추켜세우고 본인은 쑥스러운 척을 하면서 다시 은연중에 자랑을 하고 있었다.
제라린은 분노를 겨우 참으면서 질문을 했다.
“이 땅이 끝도 없이 광활한 대지이면 하늘을 돌던 태양과 달이 어떻게 다시 반대편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오?”
홉킨스가 더듬거리다가 겨우 대답을 했다.
“저… 그, 그게… 그렇죠. 그건 주신이신 메젠스께서 태양의 신인 솔라와 달의 신인 무나에게 명하셔서 사람들 몰래 반대쪽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천문을 보면서 직접 관찰한 것이죠. 하하하. 천문을 오래 보면 이런 것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던 제라린이 고민에 빠졌다.
‘음… 어떻게 할까? 여기 영지에 머물게 하면서 직접 태양과 달을 보게 하면서 한 번 족쳐 볼까? 아니다. 이 시대에는 지동설보다는 천동설이 더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들의 말을 그대로 믿을 것이다. 이들이 정말 필요한 학자인지도 모르니 한 가지 시험을 해 보자.’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제라린이 그들에게 물었다.
“본관이 다스리는 영지의 주력 소출은 대부분 농업이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농사의 소출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소?”
제라린은 이들에게 최소한 거름, 수로, 짐승의 이용, 아니면 농지 정리와 같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한 실질적인 대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역시나 더듬거리다가 대답한 홉킨스가 그의 기대를 산산이 부서뜨렸다.
“하하…그, 그러니까… 대지의 여신 그렇죠. 대지의 여신이신 다이지스께 기도를 올리면 농작물의 소출을 늘릴 수가 있죠. 이렇게 기도를 올릴 때 다이지스 여신의 총애를 받는 신관이 필요한데, 제가 학문을 오래 연구하다 보니까 그런 신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홉킨스도 제라린이 이런 질문을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가 임기응변식으로 대답을 하고는 자신의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좌우에 있던 파라무센과 디라일르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세 명의 학자, 이제는 사이비 무리라고 내심 단정한 제라린이 이들의 처분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음… 여기 와서 신성력이 인간들 사회에 직접 구현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어리게 보이더라도 나에게 이런 허황된 거짓말로 장난을 쳐? 이대로 끌어내서 두들겨 패 버려? 아니면 옥에 가둘까? 영주인 내 앞에서 그런 헛소리를 하다니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
내심 무척 화가 난 제라린이 이들을 처벌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이들을 처벌했다는 소문이 돌면 이런 변두리 영지에는 더 이상 학자들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인재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들을 처벌하기를 원하는 제라린이었지만 자신에 대해서 나쁜 소문이 도는 것을 걱정했다. 인재가 너무나도 부족한 그였기에 그런 소문이 돌면 치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음… 지구에 있을 때 뭐였지? 어떤 왕이 천리마를 얻기 위해서 돈을 줬다고 했던가? 아니… 죽은 천리마의 뼈를 샀다고 했던가? 그래서 결국은 살아 있는 천리마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어릴 적부터 전쟁터를 떠돌아다녔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못한 제라린이었기에 그런 고사들을 정확하게는 모르고 대략적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 저들을 처벌하면 한순간 시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재 영입은 영영 힘들어진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하루 뒤 글라토스 영지에 있는 아센 강의 나루터에서 떠나는 배 안에는 제라린의 배웅을 받은 파렐 자작이 타고 있었다.
이틀 동안 머물면서 영지전에 대해서 조사를 마친 그는 지금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음… 아무래도 이상한데… 첫날밤은 내가 오랜 여행으로 피곤해서 그냥 잠들었다고 해도 둘째 날까지 그냥 잠들어 버리다니… 젠장. 그 시녀가 참 삼삼해 보였는데…….’
다시 엘리자베스의 풋풋한 얼굴이 떠오르자 파렐 자작의 아쉬움은 더해 갔지만 이내 손으로 불룩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안에는 돈이 든 가죽 주머니가 있었다.
‘흐흐, 그래도 제라린 그 애송이가 섭섭하지는 않게 잘해 주네… 이 정도면 수도에서 한동안 재미있게 놀 수가 있겠어. 그렇지. 이런 시골 영지의 계집보다는 수도의 화려한 미녀들이 내 취향이지. 암 그렇고말고… 크하하하.’
그러다가 그의 주위에서 역시 희희낙락하고 있는 홉킨스, 파라무센, 디라일르 등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음… 저 떠버리 홉킨스 일행에게도 섭섭지 않게 집어 준 모양인데… 나도 좀 더 뜯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지. 그래도 저 떠버리 홉킨스 일행이 아직까지는 수도의 일부 귀족과 평민들 그리고 지방 영주들에게는 이름이 좋게 알려져 있지. 그 애송이 영주가 저들에게 잘해 준 것도 무리는 아니야. 흐흐흐. 그놈이 이렇게 멍청한 걸 알았으니 나는 내년 정도에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한 번 더 내려와야겠군. 그때도 그놈은 잘 집어 줄 거야. 크하하하.’
파렐 자작이 탄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야에서 사라지자 말을 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라린이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주위에는 기사들인 토마스와 앨버트 주니어가 기병들을 데리고 호위하고 있었다.
영주성으로 말을 내달리던 제라린이 곧 이름 모를 언덕에 올라서 아래의 평야를 바라봤다.
농사가 주력인 영지답게 발아래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들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 추수가 시작되었기에 일부 남자들은 들판에서 밀을 베고 있었고 여자들은 밀을 베어 낸 밭에서 밀알을 줍고 있었다.
‘음… 이곳은 유럽의 중세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가장 큰 특징이 다신교라는 점이지. 그래서 그런지 저들은 중세 유럽의 사람들처럼 종교적으로 억압된 생활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금이 많아서 역시나 먹을 게 별로 없고 자신의 권리는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영주의 명에 의해서 언제든지 침해당할 수가 있다. 어떻게 해야지 저들에게 자유, 평등, 평화가 깃든 세상을 줄 수가 있을까? 그냥 민주주의를 저들에게 던져 준다고 해도 저들은 그것을 지킬 수가 없을 것이다. 휴. 정말 어렵구나…….’
그렇게 머리가 복잡해진 제라린은 다시 말을 달려서 영주성으로 향했다.
잠시 뒤 제라린 일행들이 글라토스 영지의 마을 중의 하나인 글라진스에 도착했다. 글라진스는 약 300가구 정도가 사는 조그마한 마을로 주민의 대부분이 농사에 전념하고 있었다.
제라린이 마을로 다가가니 마을 입구에는 열 살 미만의 조그마한 아이들 예닐곱 명이 뛰어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들판으로 나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을 타고 가까이 온 제라린과 일행을 보고 아이들이 놀라서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마을 안쪽에서 노인 서너 명이 급하게 달려오더니 제라린을 보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면서 말했다.
“영, 영주님. 어, 어인 일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제라린은 말에 탄 채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아니… 영주성에 가다가 잠깐 들렀네. 모두들 일어서라.”
그의 말에 노인들이 황송해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직도 울고 있는 아이들을 조용히 달래기 시작했다.
“얘들아, 조용히 하렴. 영주님이시다. 너희들 이렇게 울면 안 된다.”
노인들은 제라린의 앞이었기에 차마 큰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갖은 애를 쓰면서 꼬마들을 달랬다. 혹시나 제라린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꼬마들도 노인들의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곧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에 한 명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노인들도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제라린의 눈치를 살폈다.
제라린이 그 아이를 살펴보니, 약 일곱 살 정도의 여자아이였다. 언니들이 입던 옷인지 바닥을 끌 정도의 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제대로 씻지 않았는지 얼굴에는 흘러내린 눈물과 콧물 그리고 땟자국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이는 말을 탄 제라린과 기사들을 오늘 처음 본 것인지 무척이나 무서워하면서 계속 울었다.
그런데 제라린이 갑자기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탈곡을 끝내고 한곳에 쌓아둔 짚더미에 다가갔다.
그가 뛰어내릴 때부터 놀랬던 노인들이 이내 무척 의아해하면서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빳빳한 짚더미를 꺼낸 제라린은 그것을 꺾어서 두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허리에 차고 있는 롱소드에 매달린 색깔 있는 수실들을 하나씩 끊어서 짚더미의 중간 중간에 묶기 시작했다.
어느새 짚더미는 머리와 양손, 양다리를 가진 허수아비 인형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허수아비 인형을 완성한 제라린이 그것을 울고 있는 꼬마 소녀에게 주자, 그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인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까르르∼”
어느새 아이는 웃음을 터트리며 인형을 만지고 있었고 제라린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제라린의 손길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허수아비 인형과 색깔 있는 수실들이 신기한 듯이 그것만 보면서 인형을 만지고 있었다.
노인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말을 타고 떠난 제라린.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기에 그의 안색은 밝아 보였다.
‘그래, 일단은 지키는 것이 먼저다. 발전 방향은 인재를 영입하면서 천천히 생각하자. 그리고 앞으로 내 영지민들은 그때 밟혀 죽은 그 아이처럼 허무하게 내 눈앞에서 잃지는 않을 것이다.’
영주성으로 돌아온 제라린이 깊은 밤까지 홀로 고민에 빠져 있다.
‘군사 제도는 이제 완비가 되었다. 부족한 것은 시간일 뿐… 그런데 정보부대를 따로 창설해야 할까? 이 시대는 1분 1초로 승패가 갈리는 21세기 지구와 같이 정보가 아주 중요하지는 않다. 후방에서 바로 미사일과 전투기로 타격이 가능한 현대전과 달리 병사들을 모으고 이동하는 동안 오고가는 상인들에 의해 다 파악이 된다. 또 적의 기밀이나 앞선 기술을 얻기 위한 첩보전의 중요성도 무척 낮다. 다만 칼과 창으로 전투를 벌이는 만큼 지휘관의 성향을 파악하는 게 무척 중요하고, 적의 내부 사정을 아는 것이 전략과 전술을 짜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 이런 자세한 정보 수집은 적의 근거지에 자주 방문할 수 있는 상인들이나 그곳에 사는 자들을 포섭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렇게 제라린은 이 시대에 필요한 정보부대의 성격과 역할을 설정하고 다음날 우선 휴렌 집사에게 이 일을 맡겼다. 영주관에 필요한 물품을 담당하는 그가 영지 내외의 상인들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