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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19화)
8. 주노 자작과의 영지전(2)


주노 자작의 영지전 신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제라린은 재빨리 영지전 준비를 시작했다.
글랜이 맡은 아카데미 학생들의 수준이 크게 향상된 것을 확인했다.
역시나 각 기사를 따라다니면서 잡다한 시중을 들다가 이렇게 모여서 무술만을 익히니 효율성이 좋았고 서로 간에 경쟁이 되어서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려서 근력이 딸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전장에 투입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켄스가 담당한 기병대는 이 개월 전보다 더욱더 발전하였고, 그중에서 기사 시험을 볼 연령대인 제프를 비롯한 몇 명은 기사들의 수준으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그리고 기병대의 교육에는 자신이 맡은 업무를 끝낸 기사들도 참여하여서 각자의 실력을 좀 더 갈고 닦아서 기사들의 실력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활쏘기는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제라린이 원하는 수준은 안 되었다.
그래서 제라린은 남은 일주일간 활쏘기 연습을 중지시키고 말 위에서 랜스와 검을 다루는 법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도록 지시를 했다.
그리고 제라린은 앨버트가 훈련을 시키고 있는 상비군 훈련장으로 이동을 했다.
슈미트 영감에게 명한 종합 대장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세 영지의 대장간을 총 동원하여 총 400명 중에서 제1열과 제2열에 대한 글라디우스는 보급을 완료하였다.
하지만 제3열과 제4열은 여전히 기존의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역시나 활쏘기는 당장 실전에 적용하기에 미흡한 상태였다.
그래서 제라린은 제1열과 2열은 글라디우스와 방패 사용법, 제3열과 4열은 활쏘기와 창술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도록 지시를 했다.

영지전 시작 삼 일 전 제라린은 모은 병사를 거느리고 주노 자작과 접하고 있는 율리우스 영지의 남쪽 경계로 향했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기사 9명, 기병대 40명, 상비군 400명, 징집병 만오천 명이었다.
클래치스 남작의 기사였다가 포로가 되어서 제라린의 기사가 된 홉과 제킨스도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었기에 이번 출전에는 포함을 시켰다.
그리고 징집병은 전력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나 이들이 없을 경우 적의 병력에게 단숨에 포위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징집을 했다.
제라린이 실제로 기다리는 것은 며칠 전에 안토니를 통해서 응원군을 보내겠다는 케릭 자작의 기사들과 상비군들이었다.
그들과 합류하면 영지 경계에서 맞서 싸우기에 문제가 없다는 생각에 모두들 야전에 찬성을 했다.
추수를 끝낸 겨울이었지만 따뜻한 남쪽 지방이어서 행군을 하기에 문제는 없었다.

글라토스 영주성을 떠난 지 하루가 지난 뒤 해질 무렵 제라린군은 여전히 율리우스 영지의 남쪽 경계로 행군을 했다.
그런 행렬 뒤에서 어떤 사람이 말을 달려서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다.
상비군과 징집병들은 그대로 행군을 시키고 제라린은 기사들과 기병들을 거느리고 그를 기다렸다.
그를 마중 나갔던 앨버트 주니어가 아무 이상이 없는지 그를 데리고 제라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남자는 리넨으로 만들어진 셔츠와 겉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가오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외쳤다.
“영주님, 저는 클래치스 영주성에서 잡곡상을 하는 톰입니다.”
제라린이 보니까 확실히 휴렌 집사가 그에게 소개를 시켜 줬던 상인이었다. 특히 클래치스 영지의 동쪽에 접한 케릭 자작의 영지와 상거래가 많다고 소개받은 상인이었다.
“무슨 일인가?”
그가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휴렌 집사님의 명을 받고 이번 상거래 때 케릭 자작의 영지를 염탐했습니다. 그런데 그저께까지 병사들을 모으고 출전을 준비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기색이 안 보여서 영주님께 급히 알려드리기 위해서 저 혼자 말을 타고 이렇게 빠져나왔습니다.”
약 이삼 일가량 계속 말을 몰았는지 그는 온몸이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상체는 온통 땀범벅이었다.
제라린은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음… 영지전 때 응원을 오기로 했던 약속을 이렇게 쉽게 파기해도 되는가? 이쪽 세계의 귀족 사회는 원래 이런가?’
그렇게 귀족들의 신의에 대해서 혐오하는 제라린의 주위에서 기사들이 분기탱천을 하면서 케릭 자작에 대해서 욕을 했다.
제라린은 일단 그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안토니. 기병 서넛을 데리고 동쪽으로 정찰을 가 보도록 하시오. 정말 케릭 자작의 응원군이 오지 않는지만 파악하고, 내일 저녁까지는 율리우스 영지의 남쪽 경계로 합류하도록 하시오.”
“옛! 영주님.”
기병 세기를 이끌고 급히 말을 달리는 안토니의 뒷모습을 보던 제라린이 재차 명령을 내렸다.
“이제 곧 해가 진다. 모두 여기에 숙영지를 건설한다.”

숙영지의 제일 중앙에 위치한 제라린의 장막.
다른 기사들의 장막보다 몇 배는 크고 넓었다.
그 안에는 제라린의 좌우로 8명의 기사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금 케릭 자작의 응원군 문제로 모두들 격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클래치스 남작의 기사였던 레이날이 제일 먼저 일어서서 후퇴를 주장했다.
“빨리 후퇴를 해야 합니다. 주노 자작의 병력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징집병은 우리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잡병일 뿐입니다. 주노 자작의 기사와 상비군이 훨씬 많으므로 그를 농성전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제라린의 천막에 좌우로 앉아 있던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글랜이 일어나서 결전을 주장했다.
“모레면 영지전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후퇴를 하면 주노 자작군이 뒤를 바짝 추적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 병력을 많이 잃거나, 글라토스 영주성까지 무사히 후퇴한다고 하더라도 아군의 사기는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노 자작이 율리우스 영지와 클래치스 영지를 폐허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 남쪽으로 나아가서 결전을 벌여야 합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기사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제라린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확실히 우리의 전력은 적보다 적다. 이대로 영주성으로 물러나서 농성전을 치르면 일주일 동안 버티기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주노 자작이 전 영지에 약탈을 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막 추수가 끝났는데 수확물을 죄다 빼앗기면 앞으로의 1년 영지 경영이 무척 어려워지겠지. 기사들과 기병들 그리고 상비군의 기량이 많이 좋아졌는데… 이대로 벌판에서 승부를 벌여 봐?’
말없이 눈을 감고 있던 제라린이 이윽고 눈을 뜨자 웅성거리던 기사들이 입을 다물고 그의 입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결전을 벌인다. 이제까지 우리가 싸운 적들의 기사와 상비군은 항상 우리보다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까지 패한 적이 없었다. 주노 자작도 우리의 전투력으로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열심히 훈련받은 기사들, 기병들 그리고 상비군들을 믿는다.”
제라린의 말이 떨어지자 좌우에 앉아 있던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오른팔을 직각으로 굽힌 채 앞으로 내밀면서 외쳤다.
“옛! 영주님.”

이틀 뒤 아침. 율리우스 영지의 남쪽에 정렬하는 제라린군.
제라린은 어제 저녁 안토니로부터의 보고를 듣고 케릭 자작의 응원군에 대한 미약한 희망마저 완전히 버렸다.
‘이놈, 케릭 자작. 이번 영지전이 끝나면 내가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그렇게 속으로 케릭 자작에게 욕을 퍼붓던 제라린이 자신의 앞에 정렬한 자신의 군대를 봤다.
율리우스, 클래치스, 글라토스 세 영지의 정예 중에 정예만 뽑은 기동군 400명이었다.
예비대로 빠진 50명이 뒤쪽에 정렬해 있고 350명이 ‘ㅡ’ 모양의 4열 횡대로 진형을 짰다.
그들의 뒤에서 백인대장들인 쿤타, 지미, 제록스, 짐바스가 글라디우스를 휘두르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자신을… 그리고 옆의 동료를 믿어라. 우리는 강하다.”
상비군을 훈련시킬 때 제라린이 늘 했던 말을 이제는 이들 백인대장들이 따라서 말하고 있었다.
이들 백인대장들은 상비군 중에서 제라린이 무술 실력, 통솔력, 인품 등을 보고 뽑았는데 이렇게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게 처음이어서 그런지 모두들 약간씩 흥분을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기사들이 지휘를 했었고, 상비군들은 그냥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지만 제라린이 상비군을 정예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백인대장, 십인장과 같은 중간 간부진들을 적극 육성한 것이다.

제라린의 군대 약 300미터 앞에 도열한 주노 자작의 군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주노 자작이 자신의 앞에 대열을 펼친 제라린의 군대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크게 웃었다.
그의 군대에도 그만이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고 다른 기사들은 전부 체인 메일을 입고 있었다.
“크하하하.”
옆에 있던 기사가 재빨리 물었다.
“아니, 영주님. 갑자기 무슨 일로……?”
크게 웃던 주노 자작이 제라린의 군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하하, 저 애송이의 군대를 보라고… 여기서 보니 3∼4열 횡대로 길게 세웠구나. 병력이 적어서 제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저렇게 길게 도열을 시킨 모양인데 저렇게 얇게 배치를 하면 우리의 두터운 상비병들에게 바로 뚫려 버리지 않겠느냐? 하하하.”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웃기 시작하는 주노 자작. 그의 옆에 있던 기사들도 그를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주노 자작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다시 말했다.
“또 저기 말을 탄 기사들을 보아라. 저번에 글라토스 자작와 싸울 때 종기사들을 동원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거 같구나. 체인 메일을 입은 기사들은 기껏해야 1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전부 종자들을 데리고 나온 모양이야. 쯧쯧, 글라토스 자작. 그 친구도 좀 한심하군. 저런 무늬만 기사인 것들에게 당하다니… 쯧쯧쯧.”
옆에 있던 기사가 주노 자작에게 맞장구를 쳤다.
“예, 맞습니다. 영주님. 5년 전 제논 왕국과의 결전에서 제일 앞장서서 돌격한 영주님의 용맹을 저놈들은 결코 못 막을 것입니다.”
자신이 남부 제일의 용장이라는 명성을 얻게 한 드라고쉬 평원에서의 전투가 다시 언급되자 주노 자작은 기분이 더 좋아졌다.
“하하하, 맞다. 저들은 결코 우리의 돌격을 버티지 못할 것이야. 게다가 방어자의 권리라는 기사대전도 감히 신청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의 말에 주노 자작의 기사단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연습했던 랜스를 빨리 써 보고 싶어서 랜스를 들고 앞으로 나가는 제라린을 앨버트가 말고삐를 잡으면서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었다.
“영주님, 절대 안 됩니다. 상대는 남부 제일이라는 주노 자작입니다. 여기서 기사대전을 신청하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나가겠습니다.”
앨버트에게 제지당한 제라린은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이 영감이 왜 이래? 자신이 주노 자작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거야? 이건 충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우둔하다고 해야 할지…….’
“앨버트 경. 나는 글라토스 자작과의 기사대전에서 더글라스도 죽여 본 적이 있소. 그러니 주노 자작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구.”
앨버트가 고개를 흔들면서 완강하게 제라린의 말고삐를 잡고 안 놓아 주었다.
“아니, 그때도 제가 나갈려는 순간에 영주님이 갑자기 나가신게 아니십니까?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십니다. 영주님은 우리 영지의 주인이십니다.”
제라린이 앨버트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에 주노 자작이 상비군과 징집병들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900명의 상비군들은 아시렌 왕국의 전통적인 대열인 10열 횡대로 중심을 두껍게 한 진형이었고, 약 1만 명의 징집병들은 상비군의 좌우를 호위하듯이 배치되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군대를 보면서 주노 자작은 내심 흐뭇한 생각에 빠졌다.
‘나의 상비군이 두 배 이상 많으니까 이대로 저 애송이 놈의 상비군을 밀어 버릴 거야. 그러면 저놈은 기사들을 이끌고 나의 상비군들을 상대하려고 하겠지? 그렇게 접전이 벌어지면 말의 속도는 줄어들 테고… 그때 나와 내 기사들이 너의 기사들을 반 토막을 내어 주마. 그 이름만 기사들인 종자들도 같이… 크하하하.’
주노 자작은 자신의 상비군이 제라린의 상비군들을 밀어붙이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에 제라린이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서 자신의 상비군을 밀어붙이던지 아니면 전력의 열세를 감안하여 처음부터 제라린이 기사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서던지 상관하지 않았다.
제라린이 자신의 상비군을 언제 상대하든지 말의 속도가 줄어들 때 자신이 기사들을 이끌고 바로 돌격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 세계에서 무력의 중심을 기사들로 믿는 전형적인 지휘관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