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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20화)
8. 주노 자작과의 영지전(3)


주노 자작의 군대가 다가오자 앨버트의 만류로 기사대전을 포기한 제라린이 다시 전장을 바라봤다.
300미터 전방에 배치되었던 주노 자작의 상비군과 징집병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상비군들은 창과 방패를, 징집병들은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 100미터 전방으로 다가오자 제라린이 나직히 뱉어내듯이 말했다.
“발사.”
그러자 제라린의 옆에 있던 기병중의 하나가 들고 있던 녹색 깃발을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렸다.
그와 동시에 백인대장들인 쿤타, 지미, 제록스, 짐바스 등이 힘차게 외쳤다.
“발사!”
활과 화살을 가지고 시위를 당기고 있던 제3열과 4열에서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약 이백 명이 동시에 쏜 화살은 허공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전진하던 주노 자작군 상비군들의 여기저기에 떨어졌다.
모두들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려서 방어를 하였기에 운이 나빴던 대여섯 명을 제외하고는 별다를 피해는 없었다.
다시 전진하는 그들을 보면서 제라린은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음… 역시 활 공격은 효과가 별로 없군. 빨리 복합궁을 만들어서 관통력을 높여야 하는데… 그리고 집중 공격도 연습을 시켜야 한다. 이렇게 사방으로 흩어지는 활 공격은 별 효과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 개월 만에 이렇게 활 공격을 하는 정도로 기량이 향상된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주노 자작의 상비군들이 이 시대에는 잘 없는 갑작스러운 대규모 활 공격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자신들에게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걸음이 조금씩 빨라져서 빨리 걷는 걸음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눈앞에 있는 제라린군의 상비군들만 상대하면 되었다. 그러다가 적의 기사들이 출동을 하면 바로 주노 자작의 기사들이 출동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아군 기사들과 같이 적 기사들을 상대하면 되었다.

제3열과 4열이 다시 시위를 먹이는 와중에 제라린은 여전히 말에 올라탄 채로 다가오는 적들을 응시했다.
어느새 적들은 약 30∼40미터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거의 뛰는 수준으로 빨라졌다. 다시 제라린이 외쳤다.
“발사.”
동시에 기병의 깃발이 내려가고 백인대장들의 명령에 제3열과 4열에서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조금 전처럼 45도로 하늘을 향해서 쏘는 것이 아니고 거의 직사로 제1열과 2열의 머리 위로 쏘았다.
그대로 전방으로 날아간 화살 무더기는 정지해서 웅크린 몸을 방패로 막는 주노 자작군의 전면을 강타했다.
화살을 쏘는 순간 잘 방어한 병사들은 방패에 화살이 꽂히는 정도로 끝났지만 전장의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달린 병사들은 화살에 그대로 꿰여서 쓰러졌다.
조금 전의 1차 공격보다는 더 큰 피해였지만 이제 적의 화살 공격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주노군이 안심하고 다시 대열을 이룬 채로 제라린군에게 돌격을 했다.
10열 횡대로 대열을 이룬 주노군 900명과 4열 횡대로 대열을 이룬 제라린군 400명은 좌우로 비슷한 길이를 가졌다.

마지막에는 거의 전력 질주를 하면서 제라린군에게 돌격한 주노군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적들은 커다란 방패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척 짧은 검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진 긴 창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제라린군의 앞에 멈추어 서서 긴 창을 가지고 찌르기 시작했다.
“우히히히.”
“이놈들아. 내 창 맛을 봐라.”
“거북이처럼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것이냐? 이 겁쟁이 놈들아.”
자신만만한 주노군이 마음대로 창을 찔렀다. 그들에게 이런 일방적인 전투는 처음이었다.
항상 상대도 자신만큼 긴 창을 가졌기에 상대의 창을 조심하면서 창을 사용해야 했지만 제라린군은 긴 창이 없어 자신들을 찌르지 못하고 단지 방패 뒤로 몸을 가리기만 했다.
하지만 주노군이 열심히 창을 찔렀지만 방패로 몸을 가린 제라린 병사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그때 제라린군의 대열의 뒤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 진!”

겨우 60cm의 짧은 글라디우스를 가진 제라린군이었기에 약간 떨어진 상태에서 창으로 찌르는 주노군의 공격에 방패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
적의 창이 자신의 왼팔에 매단 방패를 치는 만큼 그들이 글라디우스를 쥐고 있는 오른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때 백인대장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진! 전진한다. 왼발. 왼발.”
왼팔에 찬 방패를 세워서 몸을 잘 가리면서 제라린군들은 왼발을 앞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리고 몸의 중심을 잡고는 오른발로 당겨서 왼발 옆에 놓았다.
항상 훈련할 때 배운 전진 방법이었다.
그런 다음 백인대장들의 명령에 맞추어서 다시 왼발을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직까지 글라디우스를 휘둘러도 상대의 몸에는 맞지는 않지만 주노군이 당황하는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왼발!”

제라린군이 점점 다가오자 주노군 중 어떤 이는 긴 창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앞의 상황을 모르는 뒤쪽 병력에 막혀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못했다.
눈치 빠른 어떤 이는 창 자루를 짧게 잡아서 찌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커다란 방패로 몸과 다리를 가린 제라린군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한 발자국씩 전진하던 제라린군이 드디어 글라디우스를 휘두르거나 찌르기 시작했다.
10열 횡대이지만 창을 찌르기 위해서 약 1미터 간격으로 서 있던 주노군에 비해서 제라린군은 옆 병사와의 간격이 약 70센티미터로 많이 좁았다. 가로 50센티미터의 방패 사이사이에 빈틈은 겨우 20센티미터밖에 없었다.
제라린군이 그 사이로 글라디우스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꼭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적을 상대하지는 않았다. 앞의 병사가 찌르는 창을 방패로 막으면서 다른 아군 병사를 상대하던 대각선에 위치한 적을 찌르기도 했다.
간격이 조밀한 제라린군의 단위면적당 전력 우위가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왼발.”
제라린군이 일제히 글라디우스를 휘두르고 다시 한 걸음 더 전진했다. 뒤쪽 병력 때문에 후퇴하지 못하는 주노군은 제라린군의 칼에 맞아서 쓰러졌다.
“켁.”
“윽.”
제라린군의 제1열은 땅바닥에 쓰러진 그들을 그대로 건너뛰고 다시 전진했다. 역시 방패와 글라디우스를 가지고 있던 제2열이 동료들이 쓰러뜨린 적들에게 마지막 칼질을 했다.
“커헉.”
“큭.”
“안 돼. 제발 살려줘! 컥.”
그렇게 제라린군이 전진하는 만큼 피의 길이 생겼다. 앞으로 대륙 최고의 명성을 떨친 제라린의 중장보병대의 첫 전투 장면이었다.

뒤에서 전황을 살피던 주노 자작은 멀리서 봐도 뚜렷이 밀리는 자신의 상비군들을 보면서 당황했다.
그가 생각했던 전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상비군들이 전멸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주노 자작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기사단 출동한다. 나를 따르라.”
그렇게 주노 자작은 300미터 전방에서 싸우는 자신의 상비군 뒤쪽으로 말을 앞으로 천천히 몰면서 생각했다.
‘내 앞으로는 약 300미터정도의 빈 공간이 있다. 여기서 직진으로 달리는 척을 하면 제라린 저놈은 기사들을 이끌고 자기 바로 앞에서 싸우는 상비군들을 비집고 나오려고 할 것이다. 아직 전열이 혼란스러운 그곳을 나오려면 기사들의 대열이 엉키고 시간이 걸릴 터… 그 순간에 속도를 올려서 쳐야 한다.’
역시나 오랜 전투 경험을 가진 주노 자작답게 이 순간에도 기사들의 활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묘책을 생각했다.

착실하게 한 발자국씩 전진하면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자신의 상비군을 보면서 제라린은 생각에 잠겼다.
‘음… 그동안의 훈련한 성과가 나오는군. 역시나 로마의 중장보병단식의 전투 방법은 이 세계에서도 통해. 미비한 점 몇 가지만 더 고치면 되겠어.’
그때 옆에 있던 앨버트가 소리쳤다.
“영주님. 주노 자작이 움직입니다.”
제라린이 시선을 다시 멀리로 돌리니, 약 300미터 전방에 위치했던 주노 자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천천히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제라린은 다시 자신의 앞에서 싸우는 상비군들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원래 기병대는 좌우 날개에 위치해야 하나 아직까지 전체적인 편제가 미비한 관계로 이렇게 뒤에 배치를 했다. 이들 상비군을 뚫고 나가려면 전열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어떻게 한다?’
그렇게 고민하던 제라린이 상비군의 좌우 양쪽에서 서로 싸우는 징집병들을 봤다.
징집병들이 서로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거나 주먹싸움을 하고 있었다.
간혹 피를 많이 흘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죽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들은 없었다.
그들도 전장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라린이 기사들과 기병들을 이끌고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제라린 등을 보고 먼저 제라린의 징집병들이 깜짝 놀라면서 좌우로 흩어졌다.
그 다음에 그들과 싸우던 주노 자작의 징집병들도 바로 흩어졌다.
자신들은 상비군들의 상대도 안 되는데 막대기를 들고 감히 말을 탄 기사들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제라린의 앞에는 널직한 공터가 바로 생겼고 제라린 등은 랜스를 겨드랑이에 꼽고 말을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방향은 직선으로 달리고 있는 주노 기사단의 옆구리였다.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랜스를 겨드랑이에 차고 기사단의 제일 앞에서 달리고 있던 주노 자작은 제라린이 자신의 생각대로 서로 싸우는 상비군의 전열을 헤치고 나오지 않고 징집병들을 손쉽게 헤치고 자신의 옆구리 방향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쳇, 저 애송이 놈이 제법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기사단의 전력은 우리가 우위다. 아니 그전에 내가 네놈을 바로 떨어뜨려 주마. 내가 왜 남부 최고라고 불리는지 맛 좀 봐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주노 자작이 말머리를 왼쪽으로 틀어서 제라린 등이 달려오고 있는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십여 명의 그의 기사단도 그에 따라 방향을 틀면서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주노 자작이 제일 앞에 포진한 쐐기꼴 대형이었다.

제라린도 랜스를 겨드랑이에 고정시킨 채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제라린군도 쐐기꼴 대형을 이루고 말을 달리고 있는데, 제라린이 그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체인 메일을 입은 9명의 기사들이 쐐기꼴 대형의 바깥에 위치했고 래더아머를 입은 기병대들이 역시 랜스를 겨드랑이에 끼고 쐐기꼴 대형의 안쪽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제라린을 따르고 있었다.
제일 앞에서 달리던 제라린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쳇, 여기의 제일 앞에서 주노 자작과 붙는 거와 기사대전에서 그와 일대일로 붙는 거가 뭐가 다른 거야? 그냥 기사대전에서 붙어서 이기면 기사나 병사들의 손실이 없을 텐데… 앨버트 영감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아니지 이제 전투에 집중해야 한다. 집중.’

서서히 달리던 양쪽 대열이 서로 속도를 높이자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순간적으로 최고 속도로 높인 양쪽 대열이 서로에게 랜스를 겨냥한 채 그대로 맞부딪혔다.
꽝!

“이럇!”
제라린이 소리를 지르면서 양발의 박차로 말의 아랫배를 찼다.
말이 배의 아픔을 느끼자 콧김을 내뿜으면서 속도를 더 높였다.
제일 앞에서 돌격해 오는 주노 자작의 랜스 끝이 점점 가까워졌다.
제라린은 이제는 등자를 낀 발과 허벅지에 힘을 잔뜩 주어서 말의 허리를 꽉 죄면서 자신의 몸을 고정시켰다.
그와 동시에 랜스를 끼고 있는 오른팔에도 힘을 더 주었고 팔꿈치를 최대한 옆구리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그리고 랜스의 끝을 주노 자작이 입은 플레이트 메일의 가슴 부근을 겨냥했다.
서로 마주치는 순간, 제라린은 랜스로 상대 랜스의 끝을 쳤다.
그러자 주노 자작의 랜스의 겨냥이 흐트러지면서 랜스의 방향이 바뀌었다.
제라린은 자신의 랜스를 치던 기세 그대로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서 손잡이를 어깨 부근에 뺐다.
주노 자작의 랜스와 맞부딪힌 제라린의 랜스는 빠르게 90도 정도 돌았고 제라린은 랜스의 긴 손잡이로 주노 자작의 얼굴을 노렸다.
경황 중에도 경험 많은 주노 자작은 자신의 랜스를 완전히 버리고 상체를 비틀어서 제라린의 랜스 손잡이를 피했다.
제라린은 랜스를 다시 고정시킬 틈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적의 다른 기사의 몸뚱이를 랜스의 옆으로 쳐서 떨어뜨렸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악.”
“악.”
“크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