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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21화)
8. 주노 자작과의 영지전(4)


제라린은 적의 기사단과 스쳐 지나가자마자 다시 고삐를 뒤로 댕기면서 발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달리던 방향으로 랜스를 집어던지고 말머리를 돌리면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반! 전! 반전하라.”
제라린이 자신의 대열을 돌아보니 체인 메일을 입은 기사들 중 두 셋과 기병대 예닐곱 명이 적에게 당했는지 쐐기꼴 대형의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남은 기사들과 기병들도 최대한 빨리 말머리를 돌리려고 고삐를 당기고 말의 배를 감싼 다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곳곳에서 말의 울음소리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히힝. 이히잉.

투핸드소드를 뽑으면서 다시 달렸다.
조금 전에 지나쳐 왔던 중앙에는 십여 명이 떨어져 있었다.
두세 명 정도가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댈 뿐 나머지는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제라린은 그대로 달리면서 외쳤다.
“돌! 격! 돌격하라!”
롱소드를 꺼내든 기사들과 기병들이 뒤를 따라 달렸다.
이제 방향을 바꾸고 전투대형을 갖추는 주노의 기사들. 급격하게 속도를 올리면서 맞부딪혀 오지만 이쪽은 이미 최고 속도였다.
제라린은 적의 제일 후미에 위치했던 기사에게 투핸드소드를 휘둘러서 떨어뜨리면서 앞으로 달려 나오는 주노 자작에게 그대로 달려갔다.
“쳐라.”

제라린이 달리던 그대로 이름 모를 기사에게 투핸드소드를 휘둘렀고 상대는 롱소드로 자신의 앞을 막았으나 제라린이 옆으로 휘두르는 강력한 투핸드소드에 칼이 두 조각나면서 그대로 자신의 몸에도 칼이 박혔다.
“크억.”
말에서 떨어지는 그를 놔두고 제라린은 그대로 달려오는 주노 자작에게 달려갔다.
바로 앞에서 자신의 기사가 치명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주노 자작의 눈에서는 불똥이 나올 듯했다.
“네 이놈!”
한 기사를 상대한다고 속도가 죽은 제라린에게 그가 롱소드를 휘둘렀다.
제라린은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잡고 그의 칼을 막고 바로 날카롭게 찔렀다.
주노 자작도 한 손으로 잡은 롱소드로 제라린의 칼을 비스듬히 비켜 치면서 옆으로 흘렸다.
제라린이 힘과 스피드를 이용해서 그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주노 자작도 만만치가 않았다.
‘음… 역시 남부 제일의 용장인가? 일반 기사들보다 훨씬 강력하군. 빠른 시간 내에 쓰러뜨리지는 못하겠어.’
그렇게 칼질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 제라린이 주위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우선 기사와 기병들을 합친 숫자가 제라린 쪽이 많았고 빠른 반전 이후에 최고 속도로 주노 자작의 기사단을 덮쳤기에 그의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노 자작의 기사들도 그들의 영주의 명성에 걸맞은 실력을 가졌는지 설혹 두 명씩 상대하더라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잘 싸우고 있었다.
‘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피해가 커지는데…….’
그렇게 제라린이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함성이 울렸다.
“공! 격! 공격하라.”
제라린이 옆으로 빼둔 예비대 50명을 선두로 주노 자작의 상비군을 거의 처리한 제라린의 상비군들이 기사들이 싸우는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너머로는 주노 자작의 상비군들이 창과 방패를 버리고 도망가고 있었다.
제라린의 상비군들은 대열마저도 갖추지 않고 기사들이 싸우는 곳으로 전력을 다해서 뛰어오고 있었고 백인대장들인 쿤타, 지미, 제록스, 짐바스 등이 앞장서서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돌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장에 도착한 상비군들 중 제3열과 4열의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긴 창으로 말 위에서 싸우는 주노 자작의 가사들을 찌르기 시작했다.
수적인 열세에도 잘 싸우던 주노의 기사들도 평소에는 눈에 차지도 않던 상비군들이 제라린의 기사들과 합세하여 자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하나둘씩 말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라린과 맞서 잘 싸우던 주노 자작도 금세 전황을 파악하고는 제라린에게 강하게 롱소드를 휘둘러서 그를 떨어뜨리고는 말머리를 돌려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를 놓치면 앞으로의 전투가 힘들어질 것 같기에 제라린은 급히 주위에 있던 기병들을 모아서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제프, 레오 나를 따르라!”
제라린이 소리치고 말을 달리자 주위에 있던 기병 서넛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주노 자작의 대부분의 기사들은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앨버트와 글랜 등도 제라린의 뒤를 따라서 말을 달렸지만 말의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기에 제라린 등과 벌어진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무거운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주노 자작을 태운 그의 말이 명마인지 체인 메일을 입은 제라린의 말은 그와 점점 더 거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래더아머만을 입어서 가벼운 제프와 레오 등의 기병들은 점점 주노 자작의 말과 거리를 좁혀서 그의 뒤를 바짝 쫓을 수가 있었다.
제프가 롱소드를 휘두르자 주노 자작은 몸을 낮추어서 그의 칼을 피했다.
주노 자작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기병을 한칼에 죽이고 싶었으나 바로 뒤에 제라린이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상대하지 않고 도망을 갈려고 했다.
하지만 기병들이 좌우에서 달리면서 칼을 계속 휘두르자 주노 자작도 어쩔 수가 없이 칼을 휘둘러서 그들을 상대했고, 잠시 지체하는 그를 제라린이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주노 자작이 막 칼을 휘둘러서 기병 하나를 치려고 하자 제라린이 투핸드소드로 그의 몸을 찌르면서 말했다.
“이봐, 늙은이. 나랑 상대해야지. 왜 연약한 기병들한테 그래?”
어쩔 수 없이 기병을 향해 휘두르는 칼로 찌르는 제라린의 칼을 막으면서 주노 자작이 신음성을 뱉었다.
“으…음… 네 이놈… 귀족으로서 예의가 없구나.”
주노 자작을 향해서 칼을 마주 휘두르면서 제라린이 말했다.
“이봐 늙은이, 영지전 때문에 싸우고 있는데 예의는 무슨 예의. 그리고 이 영지전도 늙은이가 먼저 걸었다구. 왜 조용히 살려는 나를 건드려?”
제라린과 칼을 맞대는 주노 자작은 자신을 포위한 제라린의 기병들, 그리고 이제야 도착한 앨버트, 글랜 등의 제라린의 기사들을 보면서 손아귀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여기서 제라린을 잡으면 한 가지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조금 전에 기사단의 격돌에서도 제라린은 결코 만만찮은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영지전을 벌이기 전에 제라린의 무력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면서 칼을 휘두르던 주노 자작의 칼이 어느덧 제라린의 칼에 맞아서 멀리 날아갔고, 주노 자작의 한스러운 말소리가 나왔다.
“크흑… 졌다.”

제라린군은 주노 자작군과 전투를 벌였던 바로 그곳에 숙영지를 건설하고 전장 정리를 하고, 앨버트가 제라린에게 피해 보고를 하고 있었다.
“영주님. 기사들 중에 켄스와 토마스 그리고 제킨스가 전사했고 기병들도 열 명 정도가 전사했습니다. 나머지 기사들의 부상은 가벼운 편이지만 부상을 입은 기병들 중 4명 정도는 다시는 말을 타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 외에 상비군은 전사 5명에 부상 20명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제라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음… 안 그래도 기사단의 전력이 낮은데… 처음부터 영지의 기사였던 켄스와 토마스가 전사하다니… 특히 켄스는 기병대의 교육을 맡은 무척 중요한 기사였는데… 그리고 토마스도 한 명의 기사로서 제 역할을 다해 주었는데… 그리고 클래치스 남작의 기사였다가 전향한 제킨스도 전사했고 기병들도 십여 명을 이번 전투에서 잃었어. 아니, 주노 자작의 기사단과의 격돌에서 그 정도만 피해를 입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대부분 첫 번째 격돌에서 전사했을 테지…….’
제라린이 첫 번째 격돌했던 장소로 가서 전사한 자들을 살펴보았다.
막 병사들이 시신을 수습하려던 순간이었다.
켄스와 토마스 등 체인 메일을 입었던 기사들의 앞가슴이나 목에 작은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아무리 체인 메일을 입고 있었지만, 말을 타고 돌격하던 주노의 기사들의 돌파력에 랜스를 가슴이나 목에 맞고 그대로 꿰뚫렸던 것이다.
방어력이 약한 래더아머를 입고 돌격전에 참가했던 기병들은 상태가 더 참혹했다.
앞가슴뿐만 아니라 등에도 그대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어떤 기병은 꼬치구이처럼 랜스가 그대로 관통된 채로 죽어 있었다.
그 외에도 두 번째 격돌 때문에 말발굽에 짓밟혀서 넝마조각처럼 변한 시신도 여럿 있었다.
제라린은 눈을 부릅뜨고 죽은 켄스에게 손바닥으로 그의 두 눈을 감기면서 그에게 맹세했다.
‘켄스. 부디 고이 잠들어라. 너의 가족들은 내가 책임지마.’
켄스의 시신 앞에 앉아서 안색이 어두운 제라린을 보면서 앨버트가 일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반면에 주노 자작의 기사단은 23명 중에서 열 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전원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상비군들도 대략 이백여 명을 죽이거나 붙잡았습니다. 영주님. 대승입니다.”
옆에서 글랜도 앨버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영주님. 이 정도면 남부 최강이라는 주노 자작을 맞아서 잘 싸운 것입니다.”
레이날도 벌써 축하 인사를 했다.
“영주님,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주위의 말을 들으면서 제라린은 애써 안색을 밝게 변화시켰다.
‘음… 주노 자작의 기사들은 두 번째 격돌에서 대부분 전사했을 것이다. 두 달 정도 집중적인 훈련을 했어도 여전히 기사들과 기병들의 수준이 낮구나. 앞으로 좀 더 훈련을 시키고 기사단끼리 격돌하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겠다. 고구려의 기병들은 이런 돌격전을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좀 더 지능적이었다. 이런 방식은 너무 소모적인 전투 방식이야. 그리고 그전까지는 체인 메일보다 방어력이 더 높은 플레이트 메일을 지급해야겠어.’

제라린이 막사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고 전후처리를 위해서 주노 자작과 살아남은 그의 기사들 십여 명이 불려왔다.
양팔을 뒤로 돌린 상태에서 전원 밧줄로 묶인 기사들과 귀족의 명예 때문에 혼자 묶이지 않은 주노 자작이 막사의 중앙에 앉은 제라린을 보고 있었다.
제라린이 먼저 부드럽게 물었다.
“주노 자작, 이번에 그대가 이유 없이 영지전을 신청했고 주신 메젠스께서는 본관의 무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본관에게 승리를 허락하였소. 이에 대해서 이의가 있으시오?”
주노 자작이 침통하게 말했다.
“크흑… 졌소. 패장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그러면 관례대로 그대의 영지는 내가 접수하겠소.”
주노 자작의 영지에 대한 합병을 선언하는 제라린의 말에 주노 자작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힘겹게 겨우 말을 꺼냈다.
“휴…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한순간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조상 대대로 이어온 영지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이어서 그런지 말을 마친 주노 자작이 고개를 바로 밑으로 떨구었다.
내심 바라는 게 따로 있었기에 제라린은 묶여 있는 주노 자작의 기사들을 잠깐 바라보다가 좌우로 호통을 쳤다.
“누가 감히 명예롭게 싸운 주노 자작의 기사들을 저렇게 묶었느냐? 바로 풀지 못할까?”
제라린의 좌우에 있던 여섯 명의 기사들이 한동안 당황하였고, 그중에서 눈치가 빠른 레이날이 단검을 꺼내어서 앞으로 나서서 주노의 기사들을 묶은 밧줄을 끊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씩 나서서 주노의 기사들을 묶은 밧줄을 풀었고 그들은 삽시간에 양팔이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제라린은 조금 전 주노 자작에게 묻던 때보다 더욱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주노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명예롭게 싸운 기사들이오. 이렇게 그대들의 명예를 떨어뜨린 자를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겠소.”
주노 자작은 조금 전 전투에서 자기를 ‘늙은이’라고 부르면서 모욕을 주던 제라린이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고 그의 기사들마저 더욱더 부드럽게 대하면서 사과까지 하자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시간 묶여서 팔에 마비가 오는지 양팔을 주무르던 주노의 기사들은 제라린의 진정 어린 사과에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의 분위기를 살피던 제라린은 이윽고 자신이 원하던 말을 꺼냈다.
“주노 자작은 훌륭한 영주였소. 하지만 잘못된 영지전을 벌였고 주신께서는 본관에게 정의가 있음을 알렸소. 그러니 이제는 그대들이 본관의 주변에서 본관을 도와주었으면 하오.”
제라린이 계속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대우하자 주노의 기사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보고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짓던 제라린에게 주노 자작의 옆에 있던 반백의 기사가 나서서 말을 했다.
“율리우스 자작님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제 영지를 잃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주노 자작님의 곁에는 제가 꼭 있어야 합니다. 주노 자작님이 앞으로 다시 영지를 세우시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일을 하시더라도 제가 옆에서 도움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그의 말을 듣던 주노 자작이 고마운 눈빛으로 방금 말한 기사을 쳐다봤다.
그가 하는 말에 술렁거리던 주노의 기사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몇 명이서 연달아서 나서서 말했다.
“율리우스 자작님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방금 라노젠 기사대장님의 말씀대로 저희는 주노 자작님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주군에 대한 기사의 충성을 다하고 싶습니다.”
몇 번의 영지전 끝에 갈수록 기사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을 좋은 방법들을 개발하던 제라린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겨우 참았다.
‘음… 역시나 평생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한 영주를 바꾸는 게 쉽지가 않겠지. 역시나 이 방법도 미약해. 좀 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제길, 그때 주노 자작을 그냥 죽였어야 했나? 그랬으면 주군을 잃은 기사들을 좀 더 쉽게 회유할 수가 있었을지도…….’
제라린은 겨우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영주를 따라가는 것을 허락했다.
‘휴, 참자 참아. 여기서 화를 내면 아무것도 안 된다. 오히려 평판만 나빠지지. 떠날 사람들은 그대로 보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