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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9화)
3. 천심법(天心法)(3)


‘동화!’
정현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진언을 외우면서도 막대한 고통을 이겨 냈고, 동시에 기존의 기운을 컨트롤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정신력이 모두 한곳에 집중되었다.
기존의 기운들이 조금씩 조여 들어가면서 바람의 기운을 압박했다.
그것을 느낀 것인지 잠잠해졌던 바람의 기운이 다시 난폭하게 날뛰었지만, 정현의 굳건한 정신력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멈춰! 움직이지 마!’
조금씩 압축된 정현의 기운은 최초의 형태를 벗어나서 동그랗게 변한 상태였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기존의 기운들은 바람의 기운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조금씩 안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휘이잉!
자연의 기운은 순수하다.
그만큼 성질과 특성이 뚜렷하고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기겁한 바람의 기운이 탈출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다.
우웅, 우웅!
그때, 기묘한 공명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람의 기운과 정현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인 것이다.
성질이 다른 두 가지 기운을 합치는 것!
이것은 일반적인 무공의 상식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괴한 일이었다.
하지만 천심법의 막강한 주술(呪術)적인 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주었다.
“…….”
휘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정현의 몸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바람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드디어…….”
가볍게 주먹을 뻗어 보았다.
촤악!
“……!”
3m 정도 떨어진 곳의 나뭇잎 두엇이 그대로 토막이 났다.
정현으로서도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의 무공이 이렇게 날카로운 절삭력을 갖추려면 상당한 양의 내공과 경지를 이루어야 한다.
이를테면 검기(劍氣)와 같은 높은 경지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정현은 그러한 일을 너무도 손쉽게 해냈다.
게다가 직접 행한 것이 아닌, 원거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날카로운 바람의 특성을 가진 기운을 그대로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심법(天心法)…….’
자연의 기운이 혼탁해진 현대의 시대에서 검기와 같은 경지는 무협소설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것이라 치부되고 있었다.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정현 스스로의 내공 수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여 거의 12년간 무공만 닦아 온 정현이었다.
그럼에도 내공의 기운은 고작 15년 정도였다.
제천문의 뛰어난 무공은 그 효율이 여타의 무공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못해도 두 배는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런 정현이 이러한데, 다른 무공은 어떠할까?
‘검기는 어림도 없겠어.’
정현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워 버리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바로 제천문의 문주라는 책임감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정현아, 행복해라.”
“이제 폭력과 야만의 시대는 갔다.”
“이제 대화와 평화의 시대다.”
“나라를 지키려고 일개 개인이 더 이상 고통받고 구속받는 운명은 없다.”
“네가 원하는 삶을 찾아라.”

그 말 그대로였다.
이렇게 자연의 기운이 혼탁해진 시대에서는 제천문이 제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것이 아니라도 극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은 더 이상 과거의 유산들이 설 자리를 없애 버렸다.
‘그렇게 대단했다면서, 그렇게 최고였다면서…… 후, 이제는 볼품없게 되어 버렸군. 그래, 이게 순리겠지.’
피의 저주를 통해서 묶여 있는 제천문을 증오하지만, 그러는 한편으로 자부심을 느꼈다.

―우리가 해냈다. 우리가 이 민족을 지켜 왔다.

조상들이 만들어 낸 삶의 증거였다.
그들의 발자취였다.
아버지를 포함한 모두의 업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때지. 물론 그전에도 역사에 기록된 적은 없었지만…….’
아무리 열심히 무공을 갈고닦고 주술을 익힌다 해도 한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내공과 주술을 사용하기 위한 주력(呪力)을 모으기에는 현 시대의 기운이 너무나 혼탁했다.
어쭙잖은 무공이나 주술로는 총 맞아 죽기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여기까지다.”
천심법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과연 800년 동안 연구되고 완성되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15년 수준의 내공을 바람의 단(團)으로 바꾸었을 뿐인데, 이런 대단한 위력이라니.
게다가 천심법에는 오행상생의 원리를 통해서 하나의 단을 만든 뒤부터는 좀 더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었다.
‘생각보다 강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더 이상 제천문이 설 자리 같은 건…….’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話頭)였다.
과거의 조상들은 선인이 걸어 놓은 ‘피의 저주’로 인해서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를 제외하고는 세속의 일에 나서질 못했다.
하지만 정현은 달랐다.
천심법을 익힘으로써 피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조금 이상한 것은 천심법을 익히기 전부터도 그런 제약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피를 약하게 물려받은 건가?’
종종 있던 사례였다.
가장 피를 강하게 물려받은 이가 문주가 되고 나머지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피를 약하게 물려받은 자는 피의 저주를 벗어난 경우가 여럿 있었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자. 침착하게…… 하나를 행동하더라도 여러 번 생각하고 움직이는 거다.”
정현은 아직 젊었다.
그것도 많이 젊었다.
감정의 변화가 심한 나이였고, 그로 인해서 괜한 공명심이나 영웅심리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일 수도 있는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이다.
‘천심법을 완성하자.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이름 모를 조그만 산의 중턱에서 정현의 결심이 세워지고 있었다.

***

웅성웅성.
명성고등학교 1학년 3반은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 첫날이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아쉬움으로 어젯밤을 뜬눈으로 보낸 몇몇 인원들은 벌써부터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어져서 곤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아름아, 아름아! 빅뉴스야, 빅뉴스.”
“……?”
아름은 평소보다 한층 더 시끌벅적한 하연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려다가 학교라는 것을 깨닫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응? 무슨 일이야?”
“……근데 너 정말 적응 안 된다. 벌써 2년은 된 것 같은데.”
“남이사.”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중얼거리는 아름의 모습에 하연은 피식 웃었다.
2년 전의 일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아름은 그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 가면…… 가면을 쓴 거지.’
아름은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다.
반에서 대장처럼 설치던 동급생을 손봐 준 일은 너무도 흔한 것이다.
불량배를 쫓아냈다거나 건방진 후배랍시고 단체로 달려든 일진 다수를 때려눕힌 일이라든가.
과거 이 근방에 사는 학생들은 한 번쯤 아름의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였으니, 그 유명세는 정말 대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은 전학을 갔다.
모든 것은 달라진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에서 아름은 2년의 학창 시절을 보냈고, 어느덧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하연과 재회를 했다.
‘반 배정 날 정말 놀랐지.’
아름과 하연은 어릴 적부터 알던 단짝이었다.
그렇기에 아름은 전학을 간 뒤에도 하연과 자주 어울렸고, 그때마다 변하지 않은 예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달랐다.
마치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청순하고 가련한 여학생을 연기한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아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고, 하연의 협조 아래서 아름은 1학기 동안 문제없이 얌전하고 원만한 성격을 소유한 여학생으로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 사건이 그렇게 충격이었을 줄은…….’
과거를 회상하며 고개를 흔들던 하연은 문뜩 아름의 시선이 뜨거운 것을 느끼고는 애교 섞인 웃음소리와 함께 화제를 돌렸다.
“오늘 전학생이 온대. 아까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 들렀을 때 들었어.”
“…….”
아름은 시큰둥했다.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연이 기대했던 반응은 의외로 주위에서 터져 나왔다.
“정말? 정말? 혹시 봤어?”
“꺅! 이번에야말로 나의 왕자님이…….”
“……놀고 있네.”
“응? 아름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워낙 가관이어서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화들짝 놀란 아름은 재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 음……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하는 반 친구의 모습을 뒤로한 채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름이었다.
드륵!
“시끄럽게 하지 말고 모두 자리에 앉아라.”
교실의 앞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와서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일순간 조용해지는 반의 분위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31살의 노총각 체육 선생님인 대연은 짝 소리가 나게 두 번 박수를 친 다음 입을 열었다.
“자,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모두들 따뜻하게 박수로 맞이하는 거다.”
“네!”
상당히 쿨한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학생들과의 사이도 좋았고, 그래서 호응도도 높았다.
반 아이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교실의 앞문이 열리면서 드디어 전학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푸읍!”
“……?”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그 순간, 아름은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괴상한 소음을 내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깜짝 놀라며 누구 본 사람은 없을까,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휴우…… 다행히 없네.’
이런 모양 빠지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기에는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쌓기 위해서 바친 노력이 아쉬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아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느새 교탁으로 올라선 전학생을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파주에서 온 최정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자기소개 한 번 짧구나. 그래, 그럼 앉을 자리는 어디가 좋을까…….”
놀랍게도 전학생이랍시고 교탁 앞에 서 있는 것은 정현이었다.
아름은 도장에서의 사건이 있은 뒤로 일주일 동안 첩보 작전을 능가하는 은폐, 엄폐 기술을 발휘한 정현을 노려보았다.
뭔가 따지거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어찌나 잘 빠져나가던지, 이후로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 보질 못했다.
‘아빠도 참. 이런 일이 있으면 좀 말해 주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아름이 피할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정현을 바라보았다.
“…….”
휙!
“……!”
한데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는 정현의 행동을 아름은 똑똑히 보았다.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은 학교였다.
지난 6개월 동안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이미지가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괴력녀라느니 깡패녀 하는 뒷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런 일을 다시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괜한 일들을 회상했던 아름은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어디 살아?”
“정말 키가 크다. 몇이야?”
“야, 좀 비켜 봐. 나도 말 좀 하자.”
그사이 담임선생님이 나갔는지, 평소 말 많은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정현이 앉아 있는 자리를 둘러쌌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훤칠한 키에 고등학생임에도 제법 남자다운 태가 나는 정현의 외모는 한창때 여고생들의 방심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흥!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남자는 외모보다 능력이지, 능력!’
입술을 삐쭉거리던 아름은 문뜩 가볍게 자신을 제압했던 정현의 실력을 떠올렸다.
그러자 괜스레 좀 전에 한 생각들이 머쓱해졌다.
수군수군.
“……?”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있던 아름은 문뜩 시끄럽게 변한 주위의 분위기를 느끼고는 눈을 떴다.
“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꺄악!”
“첫날부터 과감해!”
당사자도 아니면서 주변이 더 난리였다.
아름은 조금 황당한 표정이 되어 눈앞에서 말을 걸고 있는 정현을 응시했다.
‘뭐야? 이건 도대체…….’
정말 뜬금없는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쫓아다닐 때는 무작정 회피만 하더니, 이제 와서 먼저 대화를 청해 온다.
그런 생각에 살짝 기분이 상한 아름이었지만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말이 끝이었다.
정현은 안내하라는 듯 눈짓을 했고, 아름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앞장을 섰다.
“…….”
“…….”
전학생이 첫날부터 대시를 한다느니 하는 질 낮은 농담들을 뒤로한 채 아름은 정현을 2층의 휴게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