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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0화)
3. 천심법(天心法)(4)


“…….”
“…….”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하나의 탁자를 잡고 앉은 아름과 정현의 시선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머물렀다.
“할 말이 있다며? 말해 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자 바로 말을 놓는 아름이었다.
“…….”
“말해 보라니까. 왜 말을 안 해?”
아름의 목소리에서 기대감이 묻어 나왔다.
분명 자신이 원인 제공을 하였으나 과도했던 대응을 생각하며 정현이 사과를 해 온다거나, 아니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 올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한데 정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아름의 기대를 산산이 조각냈다.
“서로 되도록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빠직!
아름의 인내심에 금이 갔다.

***

정현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한집에서 언제까지나 아름을 피해 다니면서 살 수는 없었다.
사이를 개선시키고 싶었다.
그렇기에 아름이 덤벼들었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 저녁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솔직히 말해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난 불만이었고 반대를 했지. 얼굴도 본 적 없는 동갑내기 남자애와 한집에서 최소 3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었거든.”

“음…….”
정현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 그러한 일은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학교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가족도 아닌 남자애와 함께 산다는 소문이 돌아다니게 된다면 더욱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제압해서 입막음을 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설에 신빙성이 더해져 갔다.
그리하여 정현은 결심했다.
아름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어 관계를 개선하기로.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서 새롭게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 되었다.
필요한 서류나 수속은 영진이 이미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곧장 교무실로 찾아간 정현은 바로 담임선생님인 대연을 만나서 반으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1학년 3반…… 이곳인가?’
전학이라는 것은 정현에게도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다가 교탁을 기준으로 좌측 첫째 줄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아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는 척을 하면 곤란하겠지.’
안 그래도 반 전체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태였다.
정현은 나름 아름을 배려하고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대연이 지정해 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어디 살아?”
“정말 키가 크다. 몇이야?”
“야, 좀 비켜봐. 나도 말 좀 하자.”
부담스러웠다.
오늘 처음 본 여학생들이 자꾸 말을 걸어왔다.
정현은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몇 번 대화를 받아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서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차라리 빨리 해결을 보는 것이…….’
대인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정현이기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처음의 계획도 잊어버리고 아름에게 다가섰다.
약간 멍한 표정으로 있는 것이,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짐작되어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무슨 오해를 했는지 주위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수군수군.
“……?”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친 아름에게 정현은 재빨리 대화를 나누자는 용건을 밝혔다.
“그래요.”
‘휴우…….’
다행히 아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주위 학생들의 야유 소리를 뒤로하며 반을 나설 수 있었다.

“…….”
“…….”
아름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자 휴게실이라는 명판이 붙어 있는 장소가 나왔다.
하나의 탁자를 잡고 앉았는데, 정현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만약 아름이 원하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면 혹시나 좋지 못한 소리가 될까 봐 순간적으로 걱정이 된 것이다.
“할 말이 있다며? 말해 봐.”
움찔!
다시 반말로 돌아왔다.
동시에 교실에서 본, 부드럽고 조신해 보였던 몸가짐은 어디로 갔는지, 아름은 손등으로 턱을 괴고는 묘한 눈빛으로 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말해 보라니까 왜 말을 안 해?”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잠시 당황했던 정현은 마음을 다잡고는 처음 결심했던 대로 조심스레 준비한 말을 내뱉었다.
“서로 되도록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아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것을 느낀 정현은 ‘아차’하며 너무 앞뒤 잘라 먹고 본론만 내뱉었다는 생각에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동갑내기 남학생과 한집에 산다는 소문이 퍼진다거나 그렇다는 것은…… 음…….”
정현은 무척이나 좁은 대인 관계를 가지고 살아왔다.
덕분에 말재주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에 내뱉은 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횡설수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
“…….”
아름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져서 이제는 싸늘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둔감한 정현은 움찔했다.
“아.는. 척.하.지. 말.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발음에서는 오랜 수련을 통해 굳센 정신력을 지닌 정현마저도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알았어.”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맥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한 아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용건 끝났으면 먼저 일어날게.”
“…….”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다가 180도 변해서 무덤덤한 모습을 보이는 아름을 보며 정현은 혹시나 자신이 말하려던 바를 이해한 것은 아닌지 기대했다.
‘그랬으면 좋겠군. 이제 나도 첫 수업을 들어 볼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던가.
앞으로 다가올 불행을 예상하지 못하는 정현이었다.


4. 일상(1)


정현의 일상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우선 새벽 5시쯤 기상을 한다.
“후우, 하아…… 후우, 하아…….”
그러고는 열심히 달려서 산으로 올라간다.
바람의 단(團)을 이루었던 곳은 ‘아차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었다.
자연의 기운을 사용하지 않고 신체능력만으로 달리면 대략 20분쯤 걸렸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후읍!”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할,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장소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었다.
‘바람의 장에 적혀 있는 기술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면…….’
각 장에는 고유의 기운을 이용한 많은 기술들이 있었다.
정현은 현재 바람의 단만을 소유하고 있기에 바람의 장에 적혀 있는 기술들을 중점적으로 수련하고 있었다.
그렇게 20∼30분 정도 수련을 하다가 해가 뜰 시점이 다가오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심법의 진언을 외웠다.
자연의 기운이 가장 충만해지는 시점이기도 했으며, 다음 목표로 삼고 있는 화(火)의 기운을 모으기에는 태양을 마주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컸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바람의 단을 이룰 수 있던 것은 자그마치 12년을 수련한 내공을 모두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불의 단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다시 기운을 축적해야만 했다.
그래도 마냥 절망적이지는 않은 것은 처음부터 천심법을 이용하여 기운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불의 단을 이룰 때에는 고통스러운 동화의 과정이 필요 없다는 점이었다.
더불어서 바람의 단을 이용하여 불의 기운을 좀 더 빠르게 흡수하며 안정성적인 면에서도 훨씬 좋아졌기에 희망을 가지고 있는 정현이었다.

“…….”
“흥!”
반면, 집에서의 생활은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무엇인가 잘못했다고는 느끼지만, 정확한 원인을 파악할 정도로 주변머리가 좋지 못한 정현이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는 아름의 행동은 정현에게 난감, 그 자체였다.
“험험, 오늘은 고등어가 참 맛이 좋군.”
“국은 어떻고요. 너무 맛있어서 빨리 먹어야겠다.”
싸늘한 아름의 분위기에 괜히 불똥이 튈 것을 걱정한 영진과 재성은 매번 게 눈 감추듯 허겁지겁 식사를 끝냈다.
반면, 미숙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아름과 정현을 번갈아 훑어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아름과 정현이 다니는 명성고등학교와 재성이 다니는 명성중학교는 같은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였다.
그렇기에 커다란 부지 안에 각각의 학교가 존재했고, 아침의 등교는 셋이 함께하곤 했다.
“…….”
“……흥!”
전혀 대화가 없는 싸늘하고 재미없는 등굣길이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일상이었다.
웅성웅성.
함께 등교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름과 재성을 먼저 보내고 학교 근처에서 5분 정도 시간을 죽인 정현은 반으로 들어서자마자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느꼈다.
‘무슨 일이지?’
정현이 자리에 앉자 최근 들어서 조금씩 친해지고 있는 원태가 다가와서 말했다.
“왔네. 오늘은 빼지 말고 학교 끝나면 좀 놀자. 이 형이 이쪽 동네는 빠삭하게 잡고 있다는 거 아니냐.”
원태는 까무잡잡한 피부색에 170대 후반의 비교적 큰 신장을 가졌으며, 선이 굵은 남성적인 외모를 가진 녀석이었다.
겉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야구부에 소속된 체육 특기생이었는데, 처음 정현을 보자마자 큰 키와 당당한 체격에 호감을 느끼고는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허! 어딜 선수 치려고 하나? 정현이는 나랑 놀기로 했다고.”
그 순간, 160대 중반의 키를 가진 귀여운 인상의 동급생이 잽싸게 나서서 정현과 원태의 사이를 끼어들었다.
작은 키나 동글동글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농구부에 소속되어 있는 이진찬이라는 이름의 남학생이었다.
“나야.”
“나라고!”
“…….”
정현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첫 등교를 한 뒤로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두 번의 체육시간이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살짝 보여 준 정현의 남다른 신체 능력에 1학년 3반의 두 체육 특기생이 활활 불타오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체육 특기생은 학업 성적이 아닌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대학 입시를 노리는 존재들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규모 있는 대회에서의 입상이었다.
“정현아, 야구를 하자. 네 운동신경은 최고야. 그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이라면 수비에서는 외야수, 타자를 할 때는 리드오프 역할로 제격이야. 테이블 세터도 좋고.”
“무슨 소리! 당연히 농구를 해야지. 저번 체육 시간 때 4반을 상대로 정현이가 몇 골을 넣은 줄 알고나 하는 소리냐?”
명성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여타의 학교들과 비교될 만큼 커다란 규모와 좋은 시설로 이름이 높았다.
재정 상태가 풍족한 만큼 예체능 계열에 대한 지원도 좋아 현재 축구부와 야구부, 농구부가 존재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좋은 여건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노력을 쏟아내는 원태와 진찬에게 일주일 전에 전학 온 정현은 그야말로 주인 없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탐나는 인재야. 꼭 야구부로 끌어들이겠어.’
원태는 뜨거운 눈빛을 정현에게 보내며 지난주에 있던 야구 시합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