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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1화)
4. 일상(2)
“야구 해 봤냐?”
“처음인데.”
원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반의 남학생은 총 17명이기에 자신이 빠지면 8:8로 경기를 진행하면 되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열외자를 만들기가 곤란해 차분한 목소리로 정현에게 기본적인 룰을 설명해 주었다.
“끙! 이게 야구 방망이고 저건 베이스라고 하는데, 투수가 공을 던지면 그것을 방망이로 쳐 내고 정해진 라인을 따라서 베이스를 돌면…….”
“야, 빨리 시작하자고. 우리가 무슨 너처럼 체육 특기생인 줄 아냐?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하면서 배우는 거지.”
동급생들의 불만 섞인 소리에 원태는 정현에게 가르치는 걸 포기하고는 보호구를 착용하며 심판의 자리에 섰다.
특기생인 그가 한쪽 편에 선다면 승부가 재미없어질 염려가 있기에 처음부터 정해진 역할이었다.
“자, 경기 시작이다!”
“빵이랑 우유가 걸렸다! 안타 하나도 못 치는 무능력자는 이따가 각오하라고!”
“어이, 철호야! 공짜로 잘 얻어먹을게.”
먹을 것 내기가 걸렸기에 시합은 처음부터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고, 오후에는 열심히 땀을 흘리며 야구부에서 연습을 할 예정이었으니.
까앙!
만약 귓가에 뚜렷하게 울릴 정도로 맑은 타격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정말 그러했을 것이다.
“어? 어어?”
컸다.
정말로 큰 타구였다.
명성고등학교는 규모가 커서 제1운동장, 제2운동장으로 나눠서 구분될 정도였다.
현재 그들이 경기를 하고 있는 장소는 제1운동장으로,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자그마치 150m는 되었다.
그런데 평범한 고등학생이 때려 낸 타구가 끝도 없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원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거리를 계산했다.
‘100? 아니, 잘하면 120m는 될지도…….’
시각에만 의지한 계산이라서 정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야구를 배운 것도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이 날린 홈런의 비거리라고는 믿기 힘든 일이었다.
“우왓! 대단해!”
“컥! 내, 내 야구 인생을 건 마구가…….”
야구에 대해서 그냥 즐기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다른 동급생들은 박수를 쳐 주며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 정도였지만, 원태는 천천히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돌아오는 정현을 보며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하하, 하하…….”
그때부터 원태는 심판 역할에는 관심을 끊고 정현의 플레이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확실히 처음 야구를 하는 사람답게 제대로 규칙을 몰라서 실수가 잦았지만, 프로 선수도 곧잘 놓치는 불규칙한 원바운드 타구를 캐치하거나 전 타석에서 안타와 홈런을 때려 내는 것을 보고는 전율했다.
‘처, 천재다! 하늘이 내린 천재야!’
상대 투수가 아리랑 볼이나 던지는 어설픈 수준이라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했다.
대놓고 타격하라 던져 줘도 홈런이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야구의 문외한이 만들어 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비거리는 어떠한가.
‘이 녀석과 함께라면 대회 입상도 꿈은 아니야!’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원태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때부터 정현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야구부에 들어오라는 것을.
진찬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야구와 다르게 농구는 운동량이 많고 체력 소모가 큰 스포츠였다.
그렇기에 남학생 대부분이 그다지 하려 들지 않았고, 농구를 좋아하는 인원 2∼3명과 멀뚱하게 서 있는 정현을 데리고 4반과 경기를 했다.
“처음 해 본다고? 그러면 공을 받아 주고 이어서 바로 마크가 비어 있는 사람에게 패스를 해 줘. 그거면 충분해.”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승부는 4반의 농구부 특기생과 자신의 1:1 대결이라고 생각했다.
“헉, 허억…….”
진찬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결과가 좋지 못했다.
4반의 멤버는 특기생을 제외하더라도 제법 하는 인원이 둘이나 더 있었다.
여기저기 생기는 구멍마다 혼자서 커버를 하려고 하니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게다가 3반의 득점원은 자신밖에 없기에 집중 마크를 당했고, 몇 번이나 공격에 실패하여 전반이 끝나자 벌써 점수는 13점이나 차이가 났다.
“하하하, 뭐야? 1학년 에이스라는 이름을 반납해야겠는데? 이렇게 쉽게 이길 줄은 몰랐어.”
“큭!”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 각자 진영으로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평소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상대 특기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죽거림이 진찬의 자존심에 불을 질렀다.
“흐으, 죽겠다. 4반 놈들 왜 이렇게 죽자고 하는 거야? 자존심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아 보려 했는데, 잘하긴 잘하더라.”
“자자, 내 말을 들어 봐. 아까 저쪽 키 큰 녀석이 하던 플레이 기억하지? 그럴 때는 이런 식으로 오른쪽에 붙어서…….”
승부욕이 발동한 진찬은 어떻게든 역전을 해 보려고 별별 작전을 짜 봤지만, 이미 기진맥진한 반의 친구들은 헉헉대기 바빴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려던 진찬은 이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정현을 바라보았다.
안정적인 호흡이나 편안한 얼굴색은 결코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계속 한자리에서 패스만 해서 그런가? 아니, 그건 아니지.’
진찬은 좀 전까지 펼쳐진 경기 도중 정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초심자라고 했지. 그런데 한 번도 패스 실수를 하지 않았어. 게다가 마크를 하고 있던 상대팀 녀석의 득점도 없었고.’
워낙 숨 가쁘던 경기라서 미처 체크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약간의 의구심이 생긴 진찬은 입을 열어 물었다.
“정현아, 너 농구 처음 한다고 하지 않았어?”
“처음이야.”
“그, 그래?”
조금의 여지도 없는 확고한 대답에 진찬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헉헉거리는 반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정현에게 몇 가지 작전을 설명해 주었다.
이대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자, 시작!”
텅!
상대팀의 볼로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휴식을 취해서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3반의 인원들은 필사적으로 달라붙어서 공격권을 뺏어 왔다.
텅, 텅!
가볍게 공을 튕기며 흐름을 살피던 진찬은 빠른 드리블로 골밑을 노리는 척하다가 옆으로 공을 돌렸다.
“엇!”
공을 받은 것은 바로 정현이었다.
마크를 하고 있던 인원은 깜짝 놀라서 손을 뻗었다.
전반 내내 워낙 존재감이 없던 정현인데다 3반의 공격은 진찬이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공을 돌릴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휘익!
“……!”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슛을 할 것 같은 포즈를 취하다가 살짝 옆으로 빠진 정현으로 인해서 마크를 하던 인원은 회심의 블로킹을 헛손질로 장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현의 3점슛.
출렁!
“……!”
“우왓!”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깨끗한 클린 슛이었다.
혹시나 기대를 하면서도 누구보다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진찬이었고, 정현과 아이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다시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마, 막아!”
“키 큰 녀석을 막으라고!”
그 뒤로는 완전히 3반의 흐름이었다.
진찬이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팀의 시선을 잡아끌고 패스를 넘기면 정현이 득점을 했다.
대인 마크를 하고 있던 상대팀의 인원이 울상을 지을 정도로 정현의 득점은 확실하고 집요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었고, 처음에는 우연이겠지 하던 4반의 특기생도 나중에는 크게 놀라서 두 명의 인원을 정현의 마크로 배정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경기를 뒤집기에는 무리였다.
“우, 우리 같이 농구하자!”
경기가 끝난 뒤, 흥분으로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 정현의 손을 잡고 소리친 진찬의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는지, 농구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인원들의 입소문을 타고 ‘농구 코트의 프로포즈’ 사건이 유명해졌다는 후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