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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2화)
4. 일상(3)


‘어쩌다가 이렇게…….’
정현은 티격태격하고 있는 두 친구를 바라보며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누려 보지 못했던 평범한 학창 시절이 궁금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과도한 관심은 환영하고 싶지 않았다.
드르륵!
“자, 모두들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아라.”
앞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인 대연이 들어왔다.
한 주가 새롭게 시작하는 월요일부터 오돌토돌하게 자라 있는 턱수염을 보니, 과연 괜히 노총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흠흠, 모두 게시판에 붙여 놓은 내용은 잘 읽어 봤겠지?”
“네!”
“최근 인근 학교에 절도범이 든 사건이 있었지. 그러니 고가의 물품을 학교에 들고 오는 일은 없도록 하고 항상 청소를 마치면 문을 잘 닫아야 한다. 이상!”
대연의 아침 조회는 언제나 그랬듯 가볍게 끝났다.
‘그래서 소란스러웠던 건가?’
아침부터 시끌벅적한 반의 분위기를 대충이나마 이해하고는 정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로 앞에서 여전히 정현을 두고 티격태격하고 있는 원태와 진찬은 안중에도 없었다.
비록 평범한 삶을 희망하여 이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정현은 한시도 천심법에 대한 끈을 놓은 적이 없었다.
‘기운을 모으는 것은 무리더라도 심상 수련을 하면 되니까.’
심상이란 감각으로 획득한 경험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내는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굉장한 집중력이 없다면 시도조차도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후읍!”
어릴 때부터 수련이 곧 일상인 정현이었기에 가능했다.
소란스러운 주위가 지우개로 훑어 버린 도화지처럼 천천히 깨끗해져 갔다.
새하얀 무(無)의 세계가 펼쳐지며, 그 안에는 오직 정현만이 존재했다.
‘바람…….’
휘이잉!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공간.
정현의 중얼거림이 곧 실체가 되어서 나타났다.
우웅!
정현의 몸을 중심으로 바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심상 속의 정현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심법의 진언을 외웠다.
동시에 내부를 관조하며 정신없이 날뛰고 있는 기운을 통제했다.
‘그리고 불…….’
화르륵!
바람의 기운뿐만이 아니었다.
새롭게 수련하기 시작한 불의 기운이 몸살에 동반되는 미열(微熱)처럼 뜨끈하게 몸을 달구고 있었다.
‘앞으로의 수련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려 나간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심상 수련은 굉장한 집중력이 필요로 하지만, 그만큼 얻어지는 소득도 많았다.
실제로 행하지 않은 것들도 심상 수련을 통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경험을 얻을 수 있었고, 앞으로 천심법을 수련하는 데 있어서 이런 간접적인 경험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재산이었다.
화르륵!
불의 기운이 점점 커져 갔다.
5년, 10년, 15년…….
마침내 바람의 기운과 비슷할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큭!’
어마어마한 집중력은 곧 현실과 허상의 세계를 일원화시켰다.
정현은 뜨겁게 일어나는 불의 기운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과도한 일체화가 허상의 세계에서 입은 고통을 현실의 것처럼 여기게 만든 것이다.
‘난폭하다. 바람의 기운보다 더!’
바람의 기운이 난폭한 야생마였다면 불의 기운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포식자였다.
그래, 마치 호랑이를 연상하게 했다.
백수의 제왕처럼 무시무시한 위압감과 힘을 드러내다가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득달처럼 달려든다.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실려 있어 정현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바람의 기운을 이용해야 한다.’
천심법의 장점은 바로 놀라운 효율과 그것을 안전하게 제어하는 안전성이었다.
정현의 몸 내부에서 바람의 기운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와 불의 기운을 채찍처럼 후려치기 시작했다.
불의 기운이 동쪽으로 활활 타오르면 서쪽에서 불어와서 기세를 역으로 잠재우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머지않았다. 10년? 아니, 바람의 단이 있으니 7년 정도로 가능할지 모른다. 불의 기운이 충분히 모은다면 지금 심상 수련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올 것이다. 미리 준비하자.’
통제되지 않는 힘은 무엇보다도 위험하다.
게다가 천심법은 다른 무공과 다르게 기운이 가진 힘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자연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위험성은 몇 배나 되었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정현은 벌써부터 심상 수련을 통해 준비하려고 하는 것이다.
화르륵!
불의 기운이 더욱 성을 내었다.
흔히 성질이 급한 사람을 일컬어 불같다고 한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불의 기운은 바람의 기운과는 비교를 거부하겠다는 듯,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바람의 기운이 몸의 내부를 휘저으며 주위를 할퀴는 정도였다면, 불의 기운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폭발시키려는 무지막지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절대로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불의 힘은 얄팍한 꾀로 잠재울 수 없어.’
바람의 기운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승부를 보았다.
하지만 불의 기운은 아니었다.
내버려 두었다가는 몸 내부를 완전 불태워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집중한다.
깊고 깊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쉽사리 된 것 같지만, 바람의 단을 만들 때도 지금까지 모았던 모든 기운이 흩어질 위험을 감수하며 도전한 것이다.
불의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여파로 바람의 단마저 사라질 것이며, 신체는 폐인 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정현은 틈만 나면 심상 수련을 하며 불의 기운을 온전하게 사로잡을 방법을 고민했다.
―……아.
그렇게 정현이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공간을 때리는 묘한 파장이 있었다.
―……현아.
그런 간섭으로 인해서 정현이 슬슬 정신을 차려갈 무렵, 벼락이 내리치듯 머리를 때려대는 요란스런 소리가 울렸다.
“최정현!”
“……!”
화들짝 놀란 정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멍해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피자 혀를 차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름이 눈에 들어왔다.
“음?”
“이동 수업이야. 다들 과학실로 가고 너만 남았어.”
의아해하는 정현에게 아름은 1교시 수업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그제야 비어 있는 교실이 이해된 정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교과서와 노트를 챙겼다.
물끄러미 정현을 지켜보던 아름은 대충 준비가 된 듯하자 ‘흥!’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리더니 먼저 교실을 나섰다.
‘기다려 준 건가?’
심상 수련에 빠져 있던 자신을 깨운 것이 바로 아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나를 무척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아름과의 관계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얼굴만 마주쳐도 바로 휙 고개를 돌리는 아름의 행동은 그녀가 정현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여과 없이 보여 줘서 탈일 정도였다.
‘그때 했던 이야기가 잘못된 건가?’
정현은 조심스레 추측을 해 봤다.
첫날 주먹다짐까지 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으니, 서로 되도록 아는 척하지 말자는 말 이후로 이런 관계가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후, 잘 모르겠다.”
원만한 대인관계도 어려운 판에 복잡한 여심 같은 것은 정현에게 너무도 어려운 숙제였다.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과학 수업을 위해 교실을 나서는 정현이었다.

***

딩동댕동.
수업이 끝났다.
오랫동안 머리를 쓴 탓에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던 학생들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오늘 하루도 모두 고생했다. 그럼 내일 보자.”
“차렷! 선생님께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종례 시간도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흘러갔다.
정현은 하교를 위해서 짐을 쌌고…… 아니나 다를까, 그 사이에 두 명의 특기생이 달라붙었다.
“정현아, 오늘은 같이 좀 놀자. 그러면서 서로 친목도 다지고.”
“그래. 한 번 재미있게 놀아 보자고.”
티격태격하다가 작전을 바꿨는지 둘이 힘을 합했다.
사실 두 특기생의 입장에서도 이러는 것은 굉장히 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대회 입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만큼 방과 후의 연습량도 굉장했다.
이렇게 하루쯤 여유를 부리는 것도 감독이나 선배들에게 찍힐 각오를 하고서 내뱉는 제안이었다.
“미안한데,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아…….”
“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일은 시간이 될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오후에 시간 좀 내 달라는 영진의 이야기가 있었고, 현재의 정현에게는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약속이었다.
“내일은…… 그래, 알았다.”
“오옷! 그럼 꼭 내일 같이 노는 거다.”
“드디어 성공이다!”
정말 대단하고 끈질긴 노력이었다.
계속 거절만 하는 것은 미안한 감이 있기에 정현도 결국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운동부에 가입하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름아, 가자!”
“응.”
그때, 반장인 하연과 단짝인 아름이 손을 잡고 사이좋게 교실을 나섰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현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집에 살면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은 무신경함만으로 넘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정현은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 아닌가.
결국 아름의 쌀쌀한 태도는 정현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관계 개선을 해야 해.’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의문이 남아서 정현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후…….”
그러니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하교를 위해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터벅터벅 걸어서 학교를 빠져나가던 정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체력은 국력이다. 하나, 둘, 하나, 둘…… 좀 더 빠르게!”
“우아아아!”
지금부터 놀 생각에 젖어 환하게 웃고 있는 학생들과 운동장에서 열심히 체력 단련 중인 축구부 인원들이 보였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일상으로 여길 만한 풍경이었다.
‘이런 여유가 언제부터지?’
정현에게는 이런 일상은 사치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평범한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학교 앞으로 쭉 뻗어 있는 대로와 시끌벅적한 인간 군상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각자의 방법으로 보내고 있었다.
사람 사는 향기가 물씬 풍겼다.
오직 수련만이 전부였던 과거의 삭막한 삶과는 너무도 달라서 사소한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왔으면 이야기 좀 하자꾸나.”
“네.”
일주일 동안 익숙해진 골목길을 지나서 현관문을 거치자 기다렸다는 듯 영진이 방에서 나와 정현에게 말했다.
그동안 서로가 익숙하고 편해졌기에 영진은 자연스레 말을 놓았고 정현도 그것이 더욱 좋았다.
“음…….”
“부담 없이 말씀하셔도 됩니다.”
둘은 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현은 무슨 이야기이기에 장소까지 이렇게 옮기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동안 보아온 영진의 사람됨을 생각하고 결코 자신에게 나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웃으며 말했다.
“그래, 뭐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을 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니까.”
“…….”
처음에는 가벼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영진의 표정을 통해 그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에 따라서 정현도 덩달아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문뜩 안 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최근 들어서 계속해서 느껴지던 아름의 모습들이 영사기에 투과되는 필름처럼 눈앞에서 흘러갔다.

‘아빠, 이제 싫어요. 더는 같이 못 살겠어요. 엉엉!’
‘그, 그래. 우리 사랑하는 공주님이 그렇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지.’

“…….”
비록 상상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아찔해진 정현이었다.
모처럼 손에 넣은 평온한 일상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정현에게 영진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내 몸에는 아주 특이한 피가 흐르고 있지. 가족에게도 쉽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긴 하지만.”
“……?”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물론 집에서 나가라는 이야기만 아니라면 정현에게는 나쁠 것은 없기에 반색하며 집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대무술협회의 회합에 참가해 ‘그분’을 만나게 된 이후지. 그래, 난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구나.”
정현은 순간 알 수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영진의 입을 막으라고.
아니면 귀를 막고 이 자리를 피하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정현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영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선언하듯 튀어나온 영진의 마지막 말은…….
“제천문…… 잘 알고 있지?”
“……!”
정현의 평온한 일상이 그대로 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