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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3화)
5. 깨달음(1)


제천문의 역사는 아주 오랜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반만년의 역사라 불리는 한반도의 그것보다 더욱 오래된 만큼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셈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가문들이 흥망성쇠를 겪을 때도 제천문은 푸른 기상이 어린 소나무처럼 꿋꿋하게 모든 풍파를 이겨 내며 긴 역사를 이어 왔다.
때때로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현명하게 극복해 냈다.
그것의 바탕에는 현인의 피를 타고 내려온 막강한 재능과 주술의 힘이 있었다.
‘그런 피를…… 이었다고?’
정현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영진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제천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놀랐지만, 더욱 큰 충격은 바로 피를 이었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많이 놀랐나? 흠, 부친께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나 보군. 난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
“무려 반만년의 역사다. 피의 저주가 흐려져서 가문을 떠난 인원들은 새롭게 일가를 이뤄 냈지. 그리고 그런 수많은 가문들 중 하나가 바로 우리 가문…….”
영진의 설명은 간단명료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피의 저주를 벗어나 가문을 떠난 누군가가 평범한 사람과 혼인하여 한 가정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자식을 낳고 후대의 자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것은 가정을 넘어선 하나의 가문이 된다.
영진은 그렇게 만들어진 가문의 후손인 것이다.
“사실 제대로 피를 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지. 피의 저주가 없을 정도로 흐려진 핏줄이니까.”
“후…… 복잡하군요.”
정현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받은 충격이었기에 머리가 혼란스럽고 쉽게 수습할 수가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현재의 상황을 정리하며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해 낸 질문을 영진에게 던졌다.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이제는 빛이 바래 버린 위대한 가문이 마지막으로 나아갈 방향을 궁금해하는 것이지.”
“그건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다.”
“…….”
정현은 영진과 눈을 마주쳤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였다.
가끔씩 보여 주던 소탈하고 분위기를 밝게 만들던 모습의 영진이 아니었다.
오직 진지함만을 가득 담고 타오르듯 일렁거리는 느낌에 정현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피를 이었다고 해 봐야 어차피 미세한 수준. 결국 방관자에 지나지 않지. 주체는 어디까지나 제천문이니까.”
“그럼 어째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방관하실 것이면 그저 모른 척하였으면 되었을 것을.”
정현의 의문은 합당한 것이었고, 조금은 원망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과 그로 인해 얻어진 평온이었다.
이렇게 쉽게 흐트러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네가 많이 망설이고 번민하는 것 같아서 말한 거다. 그분이 부탁하신 내용이기도 하고.”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네 부친께서는 생전에 이미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셨지. 그렇기에 나는 그 부탁을 충실하게 들어줄 참이다.”
“……!”
정현은 놀랐다.
살아생전 이러한 일을 예견하여 부탁을 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의 영진을 보며 재차 놀랐다.
“고민이 많겠지. 이해한다. 그것은 힘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생겨야 할 의문이고 번민이다. 더군다나 제천문의 주인이라면 누구보다도 그럴 수밖에…….”
“…….”
정현은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고민하고 번민하는가.
영진은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자, 한판 붙자. 복잡한 머릿속을 시원스레 정리해 주마.”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정현은 황당했다.
아름도 그렇고, 영진도 그렇고.
이 무슨 막가는 부녀지간이란 말인가.
다짜고짜 덤벼드는 것이 아무래도 집안 내력은 아닌지, 살짝 의심이 드는 정현이었다.
“간다.”
“……!”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영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전신에서 풍겨져 오는 기세는 진심이었다.
어설픈 아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다듬어져 있는 영진의 모습에 정현은 본인도 모르게 다리를 살짝 벌리며 몸의 중심을 잡았다.
한순간이지만 본능적으로 긴장을 하고 자세를 잡은 것이다.
타닥!
영진의 두 발이 빠르게 땅을 박찼다.
처음부터 정면이었다.
약간의 잔재주도 배제한 채 최고의 속도와 파워를 담은 일격이 정현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왔다.
“흡!”
살짝 놀랐다.
아름의 실력을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영진의 수준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주먹에서 바위를 연상하게 만드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그것을 겨우 피해 내자 이번에는 무엇이든 꿰뚫어 버릴 것 같은 기세의 앞차기가 작열했다.
“후우…….”
마치 눈앞의 공간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사이도 없이 영진의 인정사정없는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쒜에엑!
마치 채찍이 휘둘러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돌려차기에 이어 강력한 공격이 중단을 찔러 왔다.
계속해서 회피 동작만 취하던 정현은 짐짓 얼굴을 굳혔다.
돌려차기는 차후 공격을 위한 안배였는지, 이어지는 지르기 공격이 너무 빨랐던 것이다.
터엉!
“흠!”
“큭!”
아쉬워하는 영진의 목소리와 함께 약간의 통증을 동반한 정현의 신음성이 도장을 울렸다.
손을 휘둘러서 쳐 내려고 했지만, 타이밍이 어긋나서 영진의 주먹이 팔뚝을 강타한 것이었다.
‘빠르다. 그리고 정확해.’
정현은 얼얼한 팔뚝을 쓰다듬으면서 살짝 거리를 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진과 주먹다짐을 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영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계속 방어만 할 수는 없다.’
이윽고 정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진은 싸움을 통해 해답을 찾으라고 하였다.
게다가 지금은 많이 억눌러져 있지만, 애초에 정현이 가진 성품은 결코 누군가에게 당하고 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촤악!
주먹과 주먹이 교차했다.
서로를 노리던 공격이 도착 지점을 남겨 둔 채로 궤적이 바뀌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동시에 몸을 돌린 것이다.
이번에는 발차기였다.
몸을 돌림으로써 얻어진 회전력이 그대로 담겼다.
터덩!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의외로 미약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힘을 뺀 공격이기에 다리의 회수는 빨랐다.
‘중심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내 장점을 살린다.’
일부러 발차기에 힘을 뺐다.
하지만 영진도 같은 생각을 한 듯 보여 정현은 작전을 세워서 공격의 방법을 달리했다.
바로 영진보다 긴 ‘리치’를 장점으로 내세운 것이다.
퍽, 퍼버벅!
날카로운 정현의 오른 주먹이 연신 영진의 얼굴 왼쪽을 노려 갔다.
워낙 정직한 공격인 탓에 미리 간파하고 방어에 성공한 영진이었지만, 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드 위를 두들겼다.
빠른 스피드와 상대적으로 긴 팔을 이용한 공격이기에 반격은 쉽지 않았고, 결국 영진은 두 번 정도 더 방어를 하다가 스텝을 밟아 몸을 뒤로 뺐다.
“후후, 처음에는 뒤로 빼더니…… 그래, 이래야 사내지.”
“이겨서 해답을 찾겠습니다.”
“과연 쉽게 될까?”
영진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살짝 비웃는 듯한 모양새.
정현은 그 웃음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쿠웅!
강하게 발을 구르는 정현.
더불어서 본격적으로 기세를 뿜어냈다.
그것은 자연의 기운과 같은 신비로운 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마음가짐의 발현이었다.
정현이 진심으로 싸우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거친 투쟁심이 일어나서 영진의 몸을 꼭꼭 옥죄었다.
“음!”
영진의 표정에 놀라움이란 감정이 담겼다.
이미 정현을 비웃던 입술은 갈 곳을 잃은 채 당황함을 표현하고자 부지런히 떨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역시 제천문인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소년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기세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무술 고수와 대결해 왔던 영진으로서는 깜짝 놀라긴 했지만, 반대로 쉽게 무너질 수 없다는 오기가 치솟았다.
“후읍!”
우웅!
기묘한 공명음이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전신의 솜털이 삐죽거렸다.
그것은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현의 눈가가 가늘어지며 날카로운 안광을 발했다.
이러한 기분은 최근 들어서 점점 익숙해지는…… 무척 달갑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내공을 가지고 있군.’
아름을 보며 이미 짐작했던 사실이다.
정현은 내공을 일으켜서 자신의 기세에서 벗어난 영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일이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이율배반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긴장감이 정현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 감정은 뭐지?’
부친의 별세 후 끝 없는 고독감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정현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감정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영진은 분명 직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 꾸며진 정현의 모습이 아닌…….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운명같이 정해진 제천문의 주인이 될 정현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