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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4화)
5. 깨달음(2)


“역시 명불허전이군. 어린 나이임에도 제천문은 제천문! 나 역시 이제부터 최선을 다하겠다.”
우웅, 우웅!
영진의 몸속에서 퍼져 나오는 장중한 기파가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정현의 기운을 조금도 자극하지 못한 아름의 어설픈 기세가 아니었다.
올곧으면서도 웅대한 기상이 어린 기운이었다.
그것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가자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감각을 느낀 정현의 몸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근육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현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감정의 둑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고, 이내 폭포수처럼 유쾌한 기분이 쏟아져 나와 심장을 때렸다.
‘어쩌면 나는…….’
정현의 머릿속에 부친의 별세 후 벌어진 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눈앞에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영진이 있던 것이다.
“진지하게 가지.”
휘릭!
말이 끝나기가 무서웠다.
영진의 모습이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땅이 꺼져서 지하로 추락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
긴장하고 있던 정현은 생각과 동시에 반응했다.
내공의 소유자를 상대하려면 마찬가지로 자연의 기운을 사용해야 한다.
아름이야 워낙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단순히 신체적인 능력으로 제압했지만, 영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부웅!
“호오.”
영진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현이 전방을 주시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영진의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
‘퍼져라.’
한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앞으로 몸을 날리며 정현은 바람의 단을 이루고 있는 기운들을 실타래처럼 풀어냈다.
너울거리며 주변으로 뻗어 나간 바람의 기운은 마치 촉수처럼 예민한 감각들을 통해 정현에게 주위의 정보를 전해 주고 있었다.
“후읍!”
우웅!
내공이 전신을 빠르게 질주했다.
그리고 이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정현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가늠한 영진이 안심하고 본격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정면으로는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정현도 영진의 실력을 가늠했다.
체술(體術)만 따지면 쉽게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
반면 내공의 우위는 확실했다.
놀랍게도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영진의 내공이 정현을 약간이나마 앞서고 있었다.
퍼엉!
“……!”
정현이 몸을 날려 회피하자마자 공간을 때리는 영진의 내공 실린 주먹이 가죽 포대가 터지는 것 같은 소음을 만들어 냈다.
절로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의 위력이었다.
만화책에서 나오는 타격음이나 효과음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다.
“조금 놀랐나 보군.”
“……계속하시죠.”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운의 크기는 영진이 우위를 차지했지만, 그 성질과 본질을 확인한다면 그것이 뒤집어지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이었다.
그리고 정현은 당장에라도 증명할 자신이 있었다.
‘바람의 기운이 가진 장점은 바로 스피드와 절삭력이지. 단순히 힘만 가지고 있는 내공 따위는 결코 따라오지 못한다.’
결심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정현이 주위로 퍼뜨린 바람의 기운을 모아 다리로 집중시킨 순간, 주위는 고요함으로 잦아들었다.
“……!”
그리고 그 적막의 공간 속에서 영진은 핏발이 돋을 정도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정현이…… 정현이 눈앞에서 귀신처럼 사라진 것이다.
기운의 양에서 우위를 차지했다고 방심한 순간,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흐읍!”
하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영진은 그 절묘한 타이밍 덕분에 목 뒤를 스치고 지나간 정현의 주먹에서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하지만 머리칼은 안전하지 못했다.
불어오는 폭풍에 굴복하여 이리저리 쓰러져 버리는 벼이삭처럼 영진의 뒷머리는 여기저기 새하얀 살갗을 드러내며 정현의 주먹이 가진 무시무시한 위력을 증명했다.
“크으…… 정말 인정사정이 없군.”
“칭찬 감사합니다.”
“…….”
처음의 당황했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상당히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땅속에 뿌리를 내린 천년거목처럼 맞은편에 서 있는 정현을 보며 영진은 남몰래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게 네 본모습이고 성격인가?”
“……?”
“보기 좋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시 분위기가 변했다.
정현은 영진을 보며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한판 붙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알 수 없는 감상평까지 내뱉는다.
왠지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에 정현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만…….”
“뭐긴 뭐냐, 어깨에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이겨 내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녀석을 붙잡아 주고 있는 중이지.”
“…….”
이건 무슨 불교의 고승들이 행한다는 선문답도 아니고, 정말 난해하기 그지없는 영진의 언어 세계였다.
“좁아 터져서 말이야. 제천문이 그렇게 대단한가?”
“……!”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제천문은 정현에게 있어 증오의 대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버릴 수 없는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민족을 지켜 왔다는 자부심과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의 발자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뿌득!
아무리 영진이라 해도 쉽게 용서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제천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를 갈던 정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함부로 말할 이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입에 담지 못할 이름도 아니지. 아니, 난 전대 문주의 부탁을 받았으니까 충분히 자격이 있다.”
“아버지가 그런 부탁을 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평생을 제천문의 이름 아래서 살아온 부친이었다.
그것은 원망을 하면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요는 간단하지. 중요한 것은 사람인가, 아니면 제천문인가?”
“뭔 소리입니까?”
“아직 모르겠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제천문이 아니다. 영웅? 분명 시대를 이끌어 나간 영웅들이 있었지. 살수에서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이나 귀주대첩의 강감찬 장군, 임진왜란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된 이순신 장군도 있지.”
“잘 아시는군요. 그들은 모두 제천문의 문도이거나 문주들이었습니다.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모든 것을 떨치고 일어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 확실히 대단한 분들이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이 나라의 역사는? 이 민족이 살아간 발자취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정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느끼고 있는 황당함이 잘 표현된 시선을 통해 영진의 입을 막고 싶었다.
“이름 모를 민초가 있다.”
“…….”
“전쟁 중 가족을 모두 잃고도 나라를 지키기 위한 마음 하나로 창을 든 이들이 있다.”
“그, 그게 무슨…….”
“국가의 대소 신료들과 임금마저도 피난을 갈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난 의병들이 있다.”
영진의 목소리는 점점 나지막하게 변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이상으로 정현의 귓가를 울렸으며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 나라와 민족은 결코 제천문 혼자서 지켜 낸 것이 아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민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
정현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기적과도 같은 승리는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귀신같은 용병술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장군의 명령을 따라서 목숨을 내던지고 전쟁에 임한 병사들.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평범한 농사꾼이나 상인 등으로 생업에 종사했을, 그런 민초들의 희생이 있었다.
“이 나라를 지킨 것은 결코 제천문만의 힘이 아니다. 한 가문의 힘만으로 지탱될 나라라면 망해도 옛적에 망했을 거다.”
“…….”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지략가나 장군이 있어도 그들의 명령을 받들 병사가 있어야 하고, 온갖 물자와 군량을 대줄 일반 백성들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제천문이라는 이름의 중압감에 시달릴 테냐? 제천문은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할 이름이다. 그로 인해서 네가 불행한 삶을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지.”
“전, 저는…….”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고 반박하고 싶다가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정현에게 영진은 한숨을 내쉬며 준비했던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이제 행복하게 살거라. 더 이상 고민하고 번민할 필요는 없다. 제천문이라는 이름은 내가 가져갈 테니…… 행복해라, 아들아.”
“……!”
정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당장에라도 거짓말이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귓가에 메아리치는 ‘아들’이라는 두 글자의 단어는 결코 잊혀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후, 길긴 했지만 잘 전달된 것 같아서 다행인데. 응? 지, 지금 설마 우는 거냐?”
“큭!”
정현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입이지 눈이 아니었다.
조금씩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끙! 잘된 건지 모르겠군.”
정현의 부친이 남겼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한 영진은 예상하지 못한 정현의 눈물을 보며 난감한 기색을 띠다가 이내 팔을 들어 눈가를 훔치는 모양새를 보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잘했다고 칭찬하는 느낌이어서 정현은 어쩐지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모르겠네요.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러게 말이다.”
난장판이 된 기분이었다.
한빛도장의 내부는 여전히 깔끔했고 별다른 변화도 없었다.
사람이 변한 것이다.
정현은 답답하게 막혀 있던 벽이 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잔해들이 아직 복잡하게 뒤섞여서 가슴을 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레 영진에게 말했다.
“저…….”
“말해 봐라.”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
영진은 기다렸다는 듯 시원스럽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