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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5화)
5. 깨달음(3)


정현의 과거는 불행했다.
사람이라면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어떠한 행복도 정현의 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히히. 이거, 우리 아빠가 사준 거다. 부럽지? 부럽지?”

철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동갑내기 꼬마들을 때려 주는 것이 가장 즐거운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여러분 내일은 각자의 부모님들을 모시고 진행되는 참관 수업이 있답니다. 저번에 나눠 주었던 가정통신문은 모두 부모님께 전해 드렸죠?”
“네!”
“그럼 내일은 모두 부모님을 모시고 오세요.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조금 머리가 굵어지고 난 뒤 겪은 혼자만의 외톨이 같은 참관수업은 늘 당당하던 정현으로 하여금 남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게 했던 아픈 기억이었다.

“왜, 왜 욱이를 때렸니? 어서 잘못했다고 사과해! 정말 선생님한테 한 번 혼나 볼래?”

삐뚤어져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학교가 끝나면 늘 집으로 향해야 했던 것은 변하지 않았고, 이어지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수련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엄마가 없다고 놀리는 아이들과 다투는 것도, 집이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것도, 제대로 된 친구가 없어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변했다.
“거짓말.”
하지만 사실 정현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이겨 내고 극복해 낼 자신이 없기에 조금씩 변해 갔고, 가면을 썼던 것이다.
자라나면서 자신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정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내공을 쌓기 위한 수련 따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매일 같은 체력 단련과 대련을 빙자한 실전과도 같은 수련을 겪어 낼 리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선식(仙食)을 강요당하며 그 흔한 군것질거리 한 번 입에 넣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지쳤다.”
정현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도, 학교의 선생들도…….
남은 것은 오직 세상 누구보다 무서운 얼굴로 다그치며 엄격한 수련과 선식을 강요하는 아버지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다.
매일 물집이 터질 정도로 내달렸던 산의 능선을 구르고 또 굴렀다.
다리에 쥐가 날 것 같고 한창때의 인내심으로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참아 내지 못할 운기조식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대련에 임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다.
힘이 빠져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어도 한 발자국 더 떼었고, 한 번이라도 주먹을 더 휘둘렀다.

“……잘했다.”

짧은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느낀 정현의 감정은 결코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환희요, 소름이 돋을 정도의 기쁨이었다.
“인정을 해 주셨지. 그 이후로…….”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정현의 부친은 종종 따뜻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서서히 다정함을 갖춘 부모로 변해 갔다.
그렇기에 정현은 힘겨운 하루하루를 견뎌 낼 수 있었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부친은 늘 수련을 강요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설명의 전부였다.
무책임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아버지가 모든 것이 된 정현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평범함을 거부하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만약 부친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그렇게…… 계속해서…… 수련만을 하며……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부친의 죽음은 정현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지금까지 끌려 다니는 삶만 살다가 이제는 본인이 모든 것을 선택해야 했다.
극의 엑스트라가 한순간에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으로 생겨난 혼란은 정현의 눈과 귀를 꼭꼭 막아 버렸다.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해 주위를 경계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소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게다가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천문.”
가문의 비사를 알게 된 정현은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해 왔던 수련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던 것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가문을 끝까지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문이 이뤄 낸 위대한 업적과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아련한 추억의 감정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려 혼란스러운 정현을 더욱 흔들어 놓았다.
“설상가상이었군.”
“그랬죠.”
정현과 영진은 한빛도장의 바닥에 앉아서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살아오면서 겪은 것들을 늘어놓고 있는 정현이었고, 영진은 맞장구를 쳐 주며 청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그저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으니, 만약 내공이 없었더라면 그냥 아사(餓死)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정말 세상에 다시없을 블랙코미디가 되었겠지. 제천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굶어 죽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구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영진을 보며 정현은 남몰래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슬펐던 기억이고, 잠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던 아련한 감정의 잔재였다.
‘이제는 직시해야지. 내가 있는 현실을. 지금의 나를.’
아버지의 죽음과 제천문의 진실은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정현으로 하여금 과거의 가면을 다시 한 번 꺼내 들게 만들었다.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예전의 모습을…….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불안해하며 항상 주위를 향해 벽을 둘러쳤던 것이다.
“그래, 해답은 찾았나?”
“후, 지금 생각 중입니다.”
“금방 끝냈으면 좋겠군. 이제 슬슬 우리 여사님께서 화를 내실 시간이거든. 저녁밥도 먹지 않고 어딜 돌아다니냐면서.”
“어지간히 잡혀 사시는군요.”
“무슨!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난 아내를 아끼는 거지. 이런 것을 애처가라 불러야 하는 거다.”
“음, 일단은 그렇다고 해 드리죠.”
“끄응! 갑자기 능구렁이로 변했구나.”
영진과의 대화는 유쾌했다.
그러자 문뜩 지금까지 했던 고민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정현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고민할 것이 무엇이냐. 제천문은 위대한 가문이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그러한 이유로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정현은 영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까지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생각이고 의도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 한 명의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 과거의 영웅들이 그러했듯…… 결국 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것은 스스로의 손으로 해내야 할 몫이다.”
“……스스로 해내야 할 몫.”
가슴을 때리는 한마디였다.
정현은 계속 멍한 눈빛으로 영진이 던져 준 한마디를 되뇌었다.
그렇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이었다.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결국 정현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어떤가?”
“큭!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래? 후후, 부러운 일이군. 가장이라는 이름 아래서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나로서는 말이지.”
“하하하! 지금 그 말, 아주머니께 전해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쉿! 쉿! 이 녀석이 지금 단란한 가정 하나를 망가뜨리려고 못하는 말이 없구먼.”
능청스러운 미소와 함께 엄살을 떠는 영진의 모습이 그야말로 유쾌했다.
물론 마냥 그런 식이기만 했다면 이토록 신뢰의 감정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평범하지 않지.”
가끔씩 보여 주는 영진의 진지한 모습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정현은 더욱 영진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 들거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대놓고 내공을 사용하는 것처럼 바보짓은 없지. 그것은 ‘우리는 신기한 녀석들이니 잡아다가 실험해 주세요’라는 말과 다름이 없으니까.”
“…….”
영진의 말은 시원하게 정현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평범하지 않기에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위로하기 위한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어떤가? 행복해 보이지 않나?”
함께 살게 된 지도 2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보았던 영진의 모습은 마누라에게 바가지도 긁히고, 딸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상처받을 때도 있으며, 아들이 동급생에게 맞고 왔을 때 분노하는…… 평범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로맨스 소설을 보고 부인에게 느끼한 멘트를 날리고, 용돈 인상을 목표로 보여 주는 딸의 치명적인 애교에 눈을 하트로 변신시키며, 아들의 전교 1등 성적표를 보고 동네방네 자식자랑을 하러 다니는 팔불출이었다.
“행복해 보이나?”
“……그렇게 듣고 싶습니까?”
히죽거리면서 묻는 모양새가 왠지 얄미워 쉽게 대답하지 않는 정현이었다.
그런 정현의 가슴께를 팔꿈치로 툭 치며 영진이 말했다.
“솔직한 것이 최고지. 응? 그 간단한 진리도 모르나?”
“아…….”
가볍게 던진 영진의 한마디가 다시 한 번 가슴을 때렸다.

솔직한 것이 최고다.

가면을 쓰고 항상 주위를 향해 벽을 세웠던 자신에게는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닌가 싶은 정현이었다.
“부러웠습니다.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정현이 너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네?”
“너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나도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하지. 하지만 난 이렇게 행복하다. 그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
“…….”
정현은 볼 수 있었다.
영진이 입모양으로 보여 주는, ‘너도 할 수 있다’는 한마디를.
“하…… 말로는 쉽죠.”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거냐? 애송이 같으니라고.”
“누가 포기한다고 했습니까?”
서로 틱틱대고 있지만 정현은 영진을 보며 용기를 얻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러한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저 배고픕니다.”
“……?”
“밥 먹으러 가시죠.”
피식!
영진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정현이었지만, 곧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것이 최고라고.’
머릿속을 스치는 영진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용기 있게 앞장서서 도장을 나섰다.
갑자기 영진의 부인인 이미숙 여사가 해 주는 따뜻한 밥상이 너무도 그리운 정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