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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6화)
5. 깨달음(4)


똑똑!
“네, 문 열려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마 이미숙 여사라고 생각했나 보다.
정현은 그러한 상념들을 머리 한쪽으로 밀어 넣으며 조심스럽게 아름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후우…….’
남몰래 심호흡을 했다.
지금 정현이 하려는 일은 이제껏 살아왔던 인생 중에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만큼 긴장이 되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긴긴 인생과 그 사이사이에 있을 고난과 난관들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용기와 함께 자신 있게 고개를 들어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
“…….”
하지만 순간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어쩌면 앞으로 남은 긴 인생 동안 이보다 더한 난관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찰나간 머릿속을 스쳤다.
‘싸늘하군.’
마치 칼과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 물리력을 가졌더라면 벌써 몸 이곳저곳이 구멍이 났을 것이 분명한 정현이었다.
그만큼 방의 주인인 아름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
“…….”
좋지 못한 감정이 듬뿍 담겨 있는 하이 톤의 목소리였다.
‘후, 용기를 내서 말하자.’
정현은 어제 나누었던 영진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들을 정리해 낼 수 있었다.
가슴께까지 답답하게 쌓여 있던 감정의 부산물들을 어느 정도 처리한 정현은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좀 더 큰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싶다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바로 아름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아무리 정현이 뻔뻔해지려고 해도 식사 때마다, 또는 학교를 갈 때마다, 간간이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아름의 강렬한 시선을 이겨 내기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아름과의 악화된 관계를 수습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솔직한 것이 최고다.’
정현은 영진이 가르쳐 준 마법과도 같은 한마디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절로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자신감 있게 아름에게 다가섰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
째려보던 아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원래도 큰 눈이 조금 과장해서 얼굴의 반만 해지며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의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표현해 주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정현이 갑작스럽게 사용한 반말에 있었다.
아름이 반말을 사용하더라도 지금껏 말을 놓지 않던 정현이 갑작스레 말투를 바꾼 것이다.
“……말해.”
다행히 아름은 별다른 불만 없이 시큰둥한 얼굴로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자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한 반응들을 살피던 정현은 좀 더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에는 아름이 이야기도 들어 보지 않고 쫓아내지는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에 큰 고개를 하나 넘었다는 느낌이었다.
‘솔직하게……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거야.’
용기를 불러 오는 마법의 주문.
정현은 그 내용 그대로 솔직한 마음을 담아서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때 휴게실에서 했던 말들은 진심이 아니야.”
“……그럼 뭔데?”
“동갑내기 남자애과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 알려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한 거야.”
“…….”
순간, 아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무공의 고수답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정현은 이야기가 잘 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꽁해 있지 말고 앞으로는 식사 시간에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신경성으로 체할 것 같거든.”
“…….”
솔직한 것이 최고다.
정현은 그렇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며 진작 이렇게 할 것을 괜히 고민했다며 웃었다.
짝!
그러고는 그대로 뺨을 얻어맞았다.
“……?”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현은 볼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는 씩씩거리며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아름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잘 풀리던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정현을 일깨운 것은 아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최.정.현!”
2층은 물론이고, 1층까지 집 전체를 뒤흔드는 아름의 분노 섞인 포효!
“흠흠,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군.”
남몰래 지켜보던 영진이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는 백지와도 같은 정현을 보며 새로운 특강을 준비했다는 것은 후일담이다.


6. 사건(1)


영진과의 대화는 정현에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정현은 학교가 끝나면 수련도 잠시 미뤄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영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는 않았지. 쉽지는 않았어. 젊은 혈기(血氣)에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제하기가 힘이 들었으니까.”
“그렇군요.”
영진이 말해 주는 것은 힘을 가진 자로서의 경험담이거나 비슷한 길을 먼저 걸어간 선배로서의 조언이었기에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큼 소중했다.
게다가 거기에는 일반인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고대무술협회라고 들어 봤나?”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우리 한빛도장도 거기에 소속되어 있지. 문하생들은 보통의 무술을 가르치지만, 나와 내 딸이 익힌 것은 진짜배기지.”
“…….”
정현도 이미 예상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형(形)만이 남아 있는 현 시대의 무술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내공을 익히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소속된 도장이나 문파의 이름을 가진 단체들은 바로 그 ‘진짜배기’ 무술을 가지고 있지. 워낙 철저하게 통제하기에 일반인들은 그런 이들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지만.”
고대무술협회에서 일반인의 눈에 띄는 행동들을 통제하는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경계심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공상만화에서나 나오는 초능력자들과 정부에서 그들을 사로잡아 힘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서 벌이는 잔인한 인체 실험.
그런 일이 없다고 확신하기에 생명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고대무술협회의 수뇌부들은 이탈자들을 용서치 않지. 그 이탈자들은 이를테면 내공의 힘을 이용해서 온갖 범죄를 일삼는 자들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런 자들이 있습니까?”
“그래, 힘이 주는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한 자들이지.”
흔한 일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욕구를 갖는다.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이 대표적인데, 그것을 참아 낸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이라는 것의 특징은 간단했다.
가지고 있다면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탈자라고 규정 지어진 그들은 그 욕구를 참아 내질 못했고, 결국 기존 세력들에 의해서 처벌해야 할 존재로 낙인찍히게 되었다는 것이 영진의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고대무술협회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분란거리는 되지 않으니까.”
“……귀찮은 일이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디에나 규칙과 같은 것들은 필요한 법이니.”
내공과 같은 힘을 이용해서 거창한 사고를 쳤다간 고대무술협회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에게 제제를 당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힘을 가지고 분탕질을 할 생각도 없던 정현이지만 괜스레 찝찝한 기분이었다.
마치 집 바로 앞에 경찰서가 있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
정현은 물끄러미 눈앞의 영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진마저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였다.
혹시나 고대무술협회와 갈등이 생긴다면 중간에 있는 영진으로서는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리 막돼먹은 집단은 아니니까. 생각처럼 그리 강압적인 단체도 아니고, 애초에 성립된 목적 자체가 사라져 가는 진정한 무도(武道)의 맥을 지켜 가자는 것이니, 오히려 좋은 점이 많은 단체라고 할 수 있지.”
정현이 근심하는 기색을 느낀 것인지, 추가적인 설명을 통해 안심을 시켜 주는 영진이었다.
“혹시나 그 외의 단체도 있습니까?”
“중국 쪽에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단체들이 있다고 들었지. 이름까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로도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정현은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서 영진과의 관계가 점점 돈독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리던 영진이 가끔씩 말하다가 어깨도 두드리고 체면 차릴 것 없이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그렇게 느꼈다.
‘역시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이 중요하군.’
인간관계란 한순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꾸준한 노력과 관리가 필요하고, 그중 하나가 바로 많은 대화였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흥!”
“…….”
며칠 전, 반말로 표현된 용기 있는 도전은 무참하게 실패했고, 조심스럽게 던진 아침 인사는 그대로 묵살되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2연패다.
머쓱함에 볼을 긁적거리던 정현은 아름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자 얼른 뒤따라갔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아름의 째려보는 시선을 감당해 낼 정도로 아침 식사는 훌륭했다.
맛없는 선식과 부친의 손맛으로 단련된 정현에게 이러한 음식들은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오늘도 열심히 하렴.”
식사를 끝내고 집을 나섰다.
이제는 제법 길도 익숙해졌다.
영진이나 미숙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유로 애초에 집에서 따로 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재성을 포함한 셋이서 함께하는 등굣길이 벌써 한 달째였다.
“정현이 형은 왜 맨날 학교 끝나고 늦게 오는 거야?”
“운동을 좀 하느라고.”
“에엑? 너무 고리타분하잖아. 요즘 세상에 놀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재미있는 게임 하나 소개시켜 줄까?”
“…….”
주로 재성이 말을 많이 하고 정현이 대답하는 형태였다.
쌓인 것이 많은 아름은 간간이 입술을 삐죽이며 심심함을 달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