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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7화)
6. 사건(2)


웅성웅성.
중학생인 재성을 가장 먼저 보내고 아름과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교실로 들어선 정현은 오늘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이름도 모두 외웠고 조금은 친해진 이들도 있지만, 워낙 부친과 단둘이 했던 시간이 긴 탓에 이런 소란스러움은 영 적응이 되질 않는 정현이었다.
“정현이 왔네. 너도 이야기 들었냐?”
“……?”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걸어오는 것은 뒷자리의 주인인 원태였다.
“저번 주에 근처에 있는 한일고등학교에 도둑이 들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자그마치 폭행 사건이야.”
“처음 듣는 소린데?”
자신의 일도 아닌데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댈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정현이었지만 반복되는 공부와 교육에 지친 학생들에게 이런 사건사고들은 색다르고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다친 사람 숫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봐서는 패싸움이 벌어졌다고 추정된다는데, 이게 자그마치 뉴스에도 나온 사건이거든. 오늘 아침에 보고 나왔어. 그러니 다들 이렇게 소란인 거지.”
“흠…….”
“뭐야, 어제 벌어진 사건 이야기하고 있었어?”
어디를 갔다가 온 것인지, 방금 막 교실의 뒷문을 통과한 진찬이 바로 정현과 원태를 곁으로 다가왔다.
“마가 낀 건가? 이 동네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이런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인데.”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생님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등하교 시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녹음된 알람 소리를 울려대듯 매 시간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같은 소리들을 반복했다.
그만큼 이번 일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일이며, 학교 측에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모습들이었다.
“자, 모두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시기가 좋지 않으니 한동안은 일찍 하교를 해서 가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무슨 말인지 다들 잘 알겠지?”
“네에!”
종례 시간에는 담임선생님인 대연마저 일찍 들어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직 1학년이기에 강요는 없지만, 은근히 들어오는 야간 자율학습의 압박감에서 벗어난 학생들은 신이 나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산에 가 봐야겠군.’
한동안 영진과의 대화를 위해 산에서 하는 수련을 포기했다.
물론 남은 시간에 방에서라도 수련을 했지만, 그것은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다.
영진을 제외한 미숙이나 재성 등의 시선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주위의 기운도 순수하기보다는 오히려 혼탁했다.
‘아무리 유익한 시간이라 해도 천심법보다는 우선할 수 없지.’
현재 정현에게 있어서 제1의 가치를 가진 것은 바로 천심법이었다.
평생 살아가면서 제대로 사용할 일이 없다고 해도 천심법의 완성은 800년을 이어온 제천문 내 최씨 일족의 염원이요, 아버지의 대에서 꽃을 피워 낸 결과물이었다.

‘음?’
학교를 나서서 걸어가고 있던 정현은 문뜩 대로 주변으로 뻗어 있는 골목길의 입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한 남학생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현은 쉽게 넘기지 못했다.
정확히 잡아낼 수 없지만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 뇌리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것은…….’
제천문은 무공과 주술이라는 두 가지 힘을 가지고 이 나라를 지켜 왔다.
그중 정신적인 면이 강하게 작용하는 주술(呪術)은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법사 이상으로 신비하고 기상천외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래를 내다본다는 예지(豫知)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현의 주술은 무척 기초적이다.
그것은 정신보다는 신체적인 면에 많이 의지하는 무공을 집중적으로 익혔기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연히 예지의 능력도 미약했고,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감이 좋다고 느낄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그 감이 상대방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엇인가를 알려 오는 것이었다.
‘잠시만 지켜볼까?’
그것은 변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머릿속으로 오늘의 수련 방식을 그려 가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일어난 예지의 힘을 무시하기에는 정현이 지닌 신경이 그렇게 굵지 못했다.
결국 내키지 않은 심정으로 반대편 골목에 조심스레 들어간 정현의 시선이 마치 ‘네가 책임져라’고 말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변하여 입구 쪽의 상대방을 향했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지났을까?
슬슬 일어나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괜스레 주변에 있던 작은 돌멩이들을 툭툭 차 내고 있던 정현의 시선을 갑작스러운 사건 하나가 사로잡았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골목길의 입구 쪽에서 어슬렁거리던 남학생이 잽싸게 움직이더니 주변을 걷던 누군가의 팔목을 낚아챈 것이다.
소란스러운 것도 잠시였다.
골목 안쪽에서 튀어나온 두 명의 남학생이 주위의 시선을 차단하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뭘 봐?”
“눈 안 깔아?”
마치 신경 끄고 자기 갈 길이나 가라는 모양새였다.
‘뭔가 있군.’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닌, 상당히 치밀한 계획 아래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기에 정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반대편에 있는 골목길의 벽을 탔다.
그것은 대로를 걷고 있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

건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염세적이고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가득 내뱉으며 살아가는 그였지만 이러한 일들을 벌일 때는 항상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하기 마련이었다.
“왜, 왜 이러세요?”
눈앞에는 친구들에게 팔이 잡혀서 끌려온, 겁먹은 눈초리의 두 여학생이 있었다.
검은색의 단정한 느낌이 살아 있고 위아래로 매치가 잘되어 왠지 모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교복은 다름 아닌 명성고등학교의 것이었다.
“아직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있네. 이걸 그냥 확!”
“꺄악!”
겁을 줄 요량인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한 여학생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그만 겁주고 일이나 해. 자식이 성격 한 번 더럽네.”
“하이고, 여기 양반 하나 나셨네. 어이, 김건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이 일에 안 꼈냐? 혼자서 깔끔 떨지 말라고.”
“…….”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친구 녀석의 말을 듣고 건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나라고 다를 것 없지.’
행동에 대한 적극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결국 건우도 일에 동참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쳇! 기분만 잡쳤네. 야, 가진 것 있으면 빨리 다 털어놓고 꺼져라. 우리도 계집애들이랑 계속 드잡이하기는 싫으니까.”
“제, 제일고등학교 학생이죠? 이러는 것 그쪽 학교에 알리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걸요.”
“호오, 제법인데? 킥킥!”
“푸핫! 혼 좀 나 봐야겠어.”
그나마 조금 강단이 있는 것 같은 여학생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주위에 있던 제일고등학교의 남학생 두엇이 코미디라도 보는 것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정말 귀엽게 놀고 있네. 한 번 어디 한 군데 만져 줘야 정신을 차릴래?”
“꺄악!”
건우의 시선에 친구 놈들 중 하나가 가볍게 여학생들 얼굴 앞쪽으로 주먹을 뻗는 척하는 것이 잡혔다.
그러자 다시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는 명성고등학교의 여학생들.
이내 고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들어 둬. 우리 그렇게 신사적인 녀석들이 아니니까. 만약 남자 놈들이 잡혀 들어왔으면 시작부터 몇 군데 얻어터졌을 거다. 그나마 여자들이니까 이 정도인 거야. 알아들었으면 지갑 꺼내서 다 내놓고 꺼지라고.”
친구들 중에서 인상이 가장 험악한 귀복이의 목소리였다.
마찬가지로 다른 친구들도 여학생들을 둘러싸고 인상을 썼다.
“아, 알았어요.”
“줄게요. 줄 테니까 그만하세요.”
항복 선언이었다.
잔뜩 겁에 질려서 떨리는 목소리를 흘려 내는 두 여학생의 태도에 만족한 친구 녀석들의 표정이 풀리는 것을 확인한 건우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학교에서도 포기한 양아치들이라 해도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일 자체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건우는 흔히 말하는 ‘일진’이었다.
제일상업고등학교 2학년으로서 3학년이 취업 준비의 시기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학교의 불량한 학생들을 이끄는 실세 중의 하나였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쳤던 1학년 때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싸움도 솔찮이 했고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쉽게 말해서 삥도 뜯어 봤다.
2학년으로 올라가서는 가끔 싸움만 했지, 금전을 갈취하는 행위는 지양했지만…… 아무튼 그런 그였는데 이제는 다른 학교까지 원정을 와서 돈을 빼앗고 있었다.
‘이게 다 그놈들 때문이야.’
건우는 이를 갈았다.
사흘 전에 벌어진 일들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었다.
갑작스러운 세현고등학교의 도전장!
명성, 제일, 한일, 세현, 중앙고등학교는 같은 지역 내에 있는 학교로서 예전부터 왕래가 많았다.
그중 명성고등학교는 사립이며 명문을 표방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고, 세현과 중앙고등학교는 평범한 인문계, 그리고 남은 제일과 한일고등학교는 실업계 학교였다.
원색적인 표현을 써서 각 학교의 주먹 세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제일과 한일고등학교가 근방을 지배했고, 세현과 중앙, 명성고등학교는 그저 그런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던 세현 고등학교가 제일고등학교 일진들의 성질을 건드린 것이다.

“모두 박살을 내주지.”
“이것들이 제정신이 아니네. 이번 기회에 원정 한 번 뛰어 보자.”

당연히 자신만만했던 건우를 포함한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은 분기탱천해서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아직도 거짓말 같아.’
건우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새 돈을 빼앗긴 여학생들이 눈물을 훌쩍이며 골목길에서 쫓겨나는 사이에도 그러한 상념은 계속되었다.

“뭐야? 지금 겨우 이 정도 숫자로 덤볐냐? 이것들이 아예 관을 짜 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네.”
“푸핫! 귀복아, 너무 웃기지 좀 마라. 형들 웃느라 배가 터져서 제대로 싸우기나 하겠냐? 물론 저런 애들 상대로 우리까지 필요하진 않겠지만.”

약속 장소에서 맞이한 세현고등학교의 숫자는 고작 셋에 불과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제일고등학교의 일진 십여 명을 상대한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소수였다.

“이것들이 영화를 너무 봐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지네들이 액션 영화의 주인공 줄 아나 봐. 이번에는 10:1이라도 찍으려고 하나 본데.”
“킥킥! 귀복아, 네 선에서 다 처리해라.”

친구들의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건우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벌벌 떨고 있는 다른 두 명의 남학생과는 다르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지는 남학생이었다.

“넌 뭐야? 건방지게 어디서 실실 쪼개고 있어?”
“귀복아,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라. 애들 오줌 쌀라. 킥킥!”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은 모두 상황을 낙관했다.
이것이 무슨 영화나 소설도 아니고, 평범한 학생들끼리의 싸움에서 3대 10의 커다란 숫자 차이로 정해진 승부의 결과가 뒤집어질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에 평소 가장 성격이 불같은 친구인 귀복이 나서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세현고등학교의 남학생에게 주먹을 날릴 때까지만 해도 신나게 웃을 수 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게…….”
“으악! 아, 아파! 너무 아파!”

건우를 포함한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차가운 적막과 긴장감이 넘치는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울리는 소음은 팔의 관절이 빠져 바닥을 나뒹굴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귀복이밖에 없었다.
불량한 학생들의 싸움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두 주먹과 다리를 이용한 다툼이었고, 심해지면 어디가 부러지고 찢어지는 정도였다.
이렇게 다짜고짜 관절을 어긋나게 해서 탈골시키는 모습은 결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 귀복아, 장난치는 거지?”
“왜 그래? 얼른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저 세현 샌님들을 밟아 줘야지.”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를 눈앞에 마주했을 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뭐, 뭐야! 이 새끼가 지금 귀복이를!”
“죽여 버려!”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하거나, 아니면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한 원인을 배제하려는 것!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으, 으아…….”

하지만 건우는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두 다리가 지면에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꼿꼿하게 멈춰 섰다.
머리로는 친구들과 함께 달려들어야 한다고 외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심이 육체를 통제해 버린 것이다.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마치 눈앞의 녀석은 괴물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런 본능의 속삭임은 곧 결과로 변해서 건우의 눈앞에 드러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