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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8화)
6. 사건(3)
“으, 으어…… 아파! 끄악! 너무 아파!”
“으아아악!”
비명을 지른다.
지르고 또 지른다.
기껏해야 또래의 녀석들에게 주먹질로 치고받은 것이 전부인 학생들이 감당해 낼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건우를 제외한 제일고등학교의 일진 모두는 팔이나 다리 중 어느 한 군데가 탈골된 상태로 바닥을 애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거기 너!”
“네, 넷!”
얼어붙어 있던 건우에게 눈앞의 섬뜩한 광경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앞으로 매달 300만 원의 돈을 구해서 상납하라는 것이었다.
이성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친구들을 눈앞에 두고 그런 답변을 할 수 없던 건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들에게 알리거나 경찰에 신고하려면 마음대로 해 봐. 물론 그 뒤에 있을 일은 책임질 수 없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은 탓에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 미소가 머릿속에 박혀 버렸다.
쓰러져서 나뒹구는 친구들의 관절을 하나씩 맞춰 주며 내뱉던 상대방의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도 건우의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만약 신고했더라면…….’
건우는 오늘 아침 뉴스에 나왔던 학생들의 패싸움에 관련한 내용을 떠올렸다.
경찰은 패싸움이라는 추측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놈이 움직인 거야, 그 잔인한 놈이.’
평소 중앙고등학교의 일진 중 친하게 지내던 녀석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우였다.
중앙고등학교도 며칠 전 제일고등학교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그리고 그런 미친 녀석은 소년원에 보내 버려야 한다고.
그것은 300만 원이라는 커다란 금액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건우에게는 희소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신고에 대한 경찰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증거, 바로 증거가 필요했다.
관절을 빼 버린 놈의 잔인한 손속은 싸움이 끝나고 다시 맞춰진 팔과 다리로 인해서 증명해 낼 방법이 없었다.
병원에 가 봤지만 아무런 후유증도 없고 멀쩡하다는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신고를 했던 중앙고등학교의 일진들은 바로 다음 날 끔찍한 일을 당했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할 정도의 심한 타박상을 전신에 입은 것이다.
뭔가 건질 것이 없나 해서 문병을 간 건우였지만, 중앙고등학교의 일진들이 보인 반응은 정신병자와 다름이 없었다.
사람이 접근하기만 해도 극도의 정신 불안 증세를 보이며 괴성을 지르고 공포에 몸을 떤 것이다.
그렇기에 경찰의 수사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무엇인가 결론을 내려야 했기 때문에 부상자의 숫자가 많다는 것과 평소 그들이 일진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다른 학교 일진들과 패싸움을 벌였다는 것으로 수사 방향이 결론 내려졌다.
‘무서움 놈.’
전신이 울긋불긋하게 멍이 들고 부어 있던 중앙고등학교 일진들의 모습을 떠올린 건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 뒤로는 바로 친구들을 설득하여 가장 가까운 명성고등학교로 원정을 왔다.
상납금을 구하지 못할 경우, 그들도 중앙고등학교 일진들과 같은 꼴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놈은 괴물이야.’
평소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살아왔던 건우와 친구들이었지만 빠진 관절 부위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며 느꼈던 고통을 다시 겪는 것은 억만금을 준다 해도 사양할 일이었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싸늘한 눈빛을 내던지던 놈의 목소리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는 평범한 그들이 버텨 내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역시 명성고등학교야. 겨우 네 명째인데 벌써 10만 원이 넘는다고.”
건우는 지금까지 빼앗은 지폐를 세어 보며 희희낙락해하는 귀복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속편한 녀석이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고, 이런 불법적인 금품 갈취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이용해서 좀 더 심한 일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대방은 잔인했고 인정사정이 없었다.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에 빠져든 듯한 기분이었다.
“히유, 우리 꼴이 이게 뭐냐? 제일고등학교 일진하면 그래도 근방에서는 가장 잘 나갔는데.”
“그런 괴물 같은 녀석이 실재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한 거지? 10대 1 같은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아찔한 광경이었다.
무엇을 배운 것인지 몰라도 놈의 몸놀림은 정말 귀신과 같았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해 내며 놈의 손에 붙들린 팔과 다리는 어김 없이 작살이 났다.
마치 격투기 세계 챔피언이 일반인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냐? 정말 앞으로는 매달 300만 원씩 놈한테 꼬박꼬박 상납해야 하는 거야?”
친구 중 하나가 절망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그대로 잡혀들었다는 것을.
“무엇인가 방법이 있겠지.”
그나마 친구들 중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이 건우였다.
그렇기에 억지로나마 희망을 심어 주고자 막연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래도 절망보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고 열심히 삥이라도 뜯을 것이 아닌가.
‘돈이 부족해서 관절을 빼 버리는 고통을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남의 고통보다는 그래도 본인의 안위가 우선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건우는 다시 소란스럽게 변한 골목길의 입구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학교에 알려져도 며칠 정학 정도 당하겠지 하면서…….
“꺅! 아, 아름아…….”
“…….”
이번에 잡혀 들어온 것은 두 명의 여학생이었다.
건우는 괜스레 입을 벌렸다가 닫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운도 없는 여학생들이었다.
그 넓은 대로를 다니면서 하필이면 골목길과 가까운 가장자리로 다닐 것이 무엇인가.
‘그래, 재수없는 것도 본인 잘못이지 뭐.’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끌려온 두 여학생의 모습을 살핀 건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왓! 뭐야? 이쁘잖아.”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란스러운 귀복이 나서서 건우의 감상평을 대신 말해 주었다.
연신 ‘오오’거리는 것이 정말 주책으로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건우도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았다.
그런 반응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두 여학생의 미모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입구 쪽에 있던 친구에게 손목을 잡혀서 끌려온 여학생은 어깨에서 살짝 위로 올라갈 정도의 길이의 단발머리를 했는데, 워낙 얼굴이 자그마해서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백설기와 같은 새하얀 피부, 앙증맞은 작은 입술이 정말 매력적이랄까?
활동적으로 보이면서도 160㎝ 정도 되는 자그마한 체구는 품 안에 쏙 들어올 크기여서 그야말로 건우의 취향이었다.
“그 손 놔!”
반면, 친구를 따라서 거침없이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선 여학생은 당찬 태도와 다르게 상당히 여린 인상의 외모였다.
허리에 약간 못 미칠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생머리와 커다란 눈동자는 순정 만화에 등장하는 청순한 여주인공을 연상하게 했다.
반면 키는 170㎝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여서 훤칠한 것이 조금만 더 자란다면 모델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너희들 혼 좀 나 볼래?”
“한아름이라…… 이름도 예쁘네.”
아름이 짐짓 주먹을 들어 올리며 사납게 쏘아붙이자 귀복이 슬그머니 명찰의 이름을 살피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것은 건우와 주위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냥 청순하게만 보이던 여학생이 이런 상황에서 내뱉을 말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귀엽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애들아, 얘들은 그냥 패스하자. 어차피 먹잇감은 많잖아. 나도 한 번 미인들한테 점수 좀 따보자.”
“뭐라는 거야? 이게 어디서 멋있는 척하려고.”
조금 전까지의 무거운 분위기가 사라지고 친구들끼리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졌다.
“대신 전화번호는 알고 지내자고. 우리도 알고 보면 제법 멋진 녀석들이니까.”
“웃기시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하연이 잡고 있는 더러운 손이나 떼!”
“뭐? 이게 말이면 다인 줄 아나.”
험악한 인상의 남학생들 사이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는 아름의 모습이 조금 거슬렸는지, 귀복이 인상을 쓰며 겁을 줄 목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름의 커다란 눈동자가 귀엽게 반달처럼 휘어졌다.
“지금 나 때리려고 한 거야?”
“그래. 말을 듣지 않는 망아지는 혼을 내줘야지.”
어서 겁을 먹고 빌어 보라는 듯 귀복이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을 본 건우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취미도 고약한 녀석이라 생각하며…….
퍼억!
‘뭐, 뭐야? 진짜로 때린 거야?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화들짝 놀란 건우는 뒤에 ‘쉽게 볼 수 없는 미인을’이라는 말을 생략하며 귀복을 바라보았다.
“……!”
그러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몸을 뒤로 물린 채 얼얼한 볼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귀복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는 정당방위잖아. 왜? 어디 부러지기라도 했어?”
“이, 이게!”
여자한테 맞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멍한 눈빛을 하던 귀복은 이죽거리는 듯한 아름의 말투에 분노하여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퍼버버벅!
“컥!”
“…….”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180㎝가 넘는 건장한 체격의 귀복이 덮쳐 오는 것을 옆으로 회피하면서 그대로 다리 관절 안쪽을 차 버린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연타로…….
균형을 잃은 귀복이 휘청하는 사이, 옆으로 접근한 아름의 주먹이 그대로 턱을 후려쳤다.
콰당!
“거, 거짓말.”
건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귀복을 보며 최근에 이것과 비슷한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귀복아, 장난 치냐? 에라잇! 거길 떼 버려라. 쪽팔리게시리.”
“아우, 진짜 귀복이 저놈은 제일고등학교 일진들의 망신이라니까. 여자한테 얻어맞고 다니네.”
다리가 식물의 뿌리라도 된 듯 굳어 있는 건우와 다르게 친구들은 아름이 여자라는 것을 상기했는지, 귀복을 비웃으며 천천히 아름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연아, 이리 와.”
“응!”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잽싸게 아름의 뒤쪽으로 이동해서 응원을 하는 것인지 폴짝거리면서 양손을 드는 단발머리 여자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을 좀 내줘야겠네. 그래야 고분고분 말을 들어먹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가.”
“이게 진짜 맞으려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아름의 모습에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도 슬슬 성이 났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남자란 존재는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도 결국 남자를 이겨먹으려는 여자는 좋아하질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아름은 제대로 도발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불안해, 불안하다고.’
그런 모습들을 모조리 지켜보면서 건우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왠지 모르게 자꾸 자신감 넘치는 아름의 모습을 보며 세현고등학교의 그놈이 생각나서 마음을 졸이는 건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