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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19화)
6. 사건(4)


‘흠,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정현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청각은 그 너머를 살폈다.
천심법의 바람의 단(團)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공능!
건우를 비롯한 제일고등학교 일진들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10대 1이라고? 그리고 매달 300만 원씩 상납을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
정현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워낙 단편적인 단서들이기에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마련할 상납금을 위해서 남의 돈을 빼앗다니.’
이해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기도 했다.
타인의 것을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빼앗다니.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청소년들이었지만 이것은 엄연히 범법 행위였고, 정현의 기준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침착하자.’
조금씩 분노를 일으키던 정현은 바람의 단을 이룬 뒤 스스로를 다스리며 내뱉은 말들을 되새겼다.
한 번을 행동할 때도 신중해야 하는 법이었다.
충동적인 행동으로 만들어진 결과를 감수해 내야 하는 것은 결국 본인이었다.
게다가 최근 영진에게서 고대무술협회에 대한 이야기도 듣지 않았던가.
‘힘을 이용하여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들 단체의 이목을 사겠지. 쓸데없는 관심은 피하고 싶으니까.’
오히려 직접 나서는 것은 더욱 문제를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에 정현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꺅! 아, 아름아…….”
“음?”
그러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던 정현은 그것이 곧 아름의 단짝이자 반장인 하연의 것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손 놔!”
“너희들, 혼 좀 나 볼래?”
“…….”
게다가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아름의 것이 아닌가.
‘우연이라면 너무 공교로운데.’
정형은 쓴웃음을 짓다가 등을 돌리고 있던 벽에 바람의 기운을 실은 손가락 하나를 찔러 넣었다.
카가가각!
손가락 끝에서 바람의 기운이 드릴처럼 회전했다.
그로 인해 얻어진 날카로운 관통력은 미세한 소음과 함께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지나갔다.
“대신 전화번호는 알고 지내자고. 우리도 알고 보면 제법 멋진 녀석들이니까.”
“웃기시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하연이 잡고 있는 더러운 손이나 떼!”
“뭐? 이게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이제 좀 보이는군.’
아름이 관계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영진의 딸 사랑을 익히 아는 정현이었기 때문이다.
‘뭐, 당할 거라는 생각은 없지만…….’
초보적인 단계라도 기를 사용할 수 있는 아름이었다.
제대로 운동도 하지 않고 덩치만 큰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이 당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아름은 가장 앞에서 깐죽거리던 남학생의 다리 뒤의 관절을 타격한 후 이어진 깨끗한 펀치로 턱을 날렸다.
“혼을 좀 내줘야겠네. 그래야 고분고분 말을 들어먹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가.”
“이게 진짜 맞으려고!”
잔뜩 흥분한 남학생 두 명이 동시에 좌우로 달려들었다.
좁은 구멍이지만 자연의 기운을 사용하여 시력을 향상시킨 정현의 눈에는 모든 행동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쒜에엑!
좌측의 남학생이 거칠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양심인지 얼굴은 아니고 어깨 쪽을 노리는 공격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아름의 반응은 영악했다.
턱!
“엇?”
주먹이 휘둘러지는 궤적의 측면에서 뻗어진 아름의 손바닥이 가볍게 좌측 남학생의 팔뚝을 밀쳐 냈다.
어이없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사이, 이번에는 우측의 남학생이 습관처럼 욕설을 내뱉으며 앞차기로 복부를 노려 왔다.
휘리릭!
첫 번째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왼쪽으로 손을 뻗은 자세로 있던 아름의 몸이 그대로 회전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앞차기를 시도했던 남학생의 왼쪽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그야말로 막힘이 없고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
“이 악물어.”
퍼억!
“컥!”
차가운 아름의 목소리 뒤로 남학생의 고통 어린 신음성이 흘렀다.
그대로 왼쪽 얼굴을 강타당한 남학생은 사선으로 쓰러졌고, 재빠르게 뒤를 돌아본 아름은 첫 번째 공격을 시도했던 남학생의 주먹을 목격할 수 있었다.
“큭!”
아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지며 주먹이 빗나갔다.
당혹감에 일그러진 얼굴로 재차 주먹을 뻗고 그마저도 빗나가자 남학생은 최후의 공격이라는 듯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온몸을 던져 왔다.
체중 우위를 이용한 육탄전인 것이다.
‘흠…….’
어느새 정현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격투기를 시청하는 사람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몰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본인이 직접 대련을 했지, 이렇게 타인이 싸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던 탓이다.
터억!
“악!”
그러는 사이, 아름은 정면으로 돌진하는 남학생의 옆으로 빠지면서 슬쩍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바닥을 뒹굴어 버린 남학생은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쉽게 일어나질 못했다.
“겨우 이 정도로 거들먹거리면서 다른 애들을 괴롭혔어?”
“으…….”
매운맛을 본 두 명의 남학생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한 명까지 해서 총 셋이나 되는 건장한 남학생들이 머뭇거리면서 눈치를 보았다.
그들도 이제 느낀 것이다.
눈앞의 여학생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만하면 나설 것도 없이 잘 해결된 것 같은데.’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에게서 흘러나오던 전의가 서서히 꺾여 가는 것을 느낀 정현이 만족스러운 결말을 예상할 때 즈음, 상황의 변화가 생겼다.
퍼억!
“악! 때, 때리지 마.”
“자식이 그러니까 순순히 따라왔으면 한 대라도 덜 맞잖아. 빨리 안으로 들어가!”
입구 쪽에 있던 두 명의 제일고등학교 일진 중 하나가 새로운 학생을 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다가 골목길 안의 분위기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바깥에 있던 친구까지 불러들였다.
“뭐야? 설마 여자한테 당하고 있던 거야?”
“시끄러. 장난이 아니라고. 무슨 격투기를 배운 것이 분명해.”
순식간에 인원수가 늘어서 다섯이 되었다.
그러자 약간 주눅이 들어 있던 안쪽의 인원들도 다시 기세가 살아나서 매서운 눈빛으로 아름을 노려보았다.
‘흠, 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조금 힘들 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실전 경험이 많아 보였으니까 문제는 없겠…… 음?’
신체 자체가 괴물 같은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기에 기(氣)라는 신비한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름에게도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신체적으로는 남성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탁월한 격투의 센스와 경험, 기술의 우위로 약간이나마 아름의 우위를 점치던 정현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아름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은 새롭게 골목길 안쪽으로 끌려온 명성고등학교 교복의 남학생이었다.
남학생 역시 하연과 아름을 알아봤는지 순간적으로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금방 어두워졌다.
현재의 좋지 못한 상황을 자각한 것이다.
‘곤란한 표정인데. 이유가 뭐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정현은 의아할 뿐이었다.
첫날부터 싸움을 걸어왔던 아름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세 명이 다섯이 되었다고 물러날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되었다고 더욱 저돌적으로 덤벼들 것이다.
“밟아 버려!”
그렇게 정현이 고민하는 사이, 다섯으로 늘어난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이 모두 아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험악한 기세에 뒤쪽에 있던 하연이 비명을 지르며 벽 쪽으로 물러섰다.
아름의 전방위가 노출된 상황이었다.
쒜에엑!
첫 번째 공격은 그대로 피해 냈다.
잔뜩 흥분해서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간 공격을 피하는 것쯤은 아름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터억!
두 번째 이어진 공격은 뒤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충격지점의 각도를 비스듬하게 세워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어째서……?’
세 번째, 네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피해 내는 아름의 몸놀림이 점점 아슬아슬하게 변했다.
동시에 정현의 의문은 깊어지고 있었다.
연속적인 공격이 험난하기는 하지만 아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회피를 하면서 반격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름은 피하기만 할 뿐, 막상 공격의 기회가 오면 멈칫거리며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
잠시 동안의 관찰을 통해 정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름이 새롭게 끌려온 명성고등학교 학생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이유가 뭐지?’
사실 이유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그럼으로 인해서 아름이 점점 밀리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잘 맞지 않자 악에 받친 제일고등학교 일진들은 점점 거칠게 행동했고, 자기들끼리 어깨가 부딪쳐 가면서도 공격에 집중했다.
그리고 반격을 하지 않는 아름으로 인해서 그런 저돌성의 효과는 점점 빛을 발하고 있었다.
퍼억!
“윽!”
억눌린 신음 소리.
처음으로 터진 정타였다.
아름의 복부를 후려친 주먹의 주인은 악의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주먹을 내뻗었다.
“어딜 감히 주제 파악을 못하고 여자 따위가 덤벼들어!”
“성한 몸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마.”
기세가 오른 일진들은 온갖 욕설들을 내뱉으며 더욱 기세를 피워 올리며 아름을 몰아붙였다.
금방이라도 침몰할 배처럼 위태롭게 보이는 싸움의 현장.
결국 정현은 더 이상 앞뒤를 재지 못하고 담을 뛰어넘었다.
터억!
가벼운 착지와 이어지는 작은 소음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투를 중지시키기 위한 다른 방법이 있는 법이다.
“멈춰.”
“죽여 버려!”
“다리를 꺾어 버리라고!”
“멈추라고!”
“……?”
“뭐, 뭐야?”
뒤쪽에서 터져 나온 거센 소음에 화들짝 놀란 제일고등학교의 일진들이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자연히 한숨 돌린 아름은 잽싸게 그 사이에서 빠져나와 하연의 앞을 지키고 섰다.
그러다가 잠시 뒤 고개를 돌려 정현과 눈을 마주쳤다.
“아……!”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감탄사였다.
정현은 그것과 관계없이 싸움에 끼어들기 전에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 낸 말을 내뱉었다.
“조금 있으면 경찰이 올 테니까 빨리 도망가는 것이 좋을 거야.”
오랫동안 생각했던 답안이다.
불량한 아이들이라 해도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있으리라.
그런 정현의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내 제일고등학교 일진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뭔 개수작이야.”
“킥킥! 저 새끼, 영화를 너무 많이 봤는데?”
“경찰? 경찰 온다고 하면 우리가 튈 줄 알았냐? 어쩌지? 우린 무서울 것이 없는데.”
이미 싸움이 한창이었다.
잔뜩 흥분한 일진들은 원래도 없던 인내심마저 바닥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현의 일침이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제일고등학교 일진들은 새롭게 등장한 정현을 마구 비웃으면서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럼 꿇어.”
“뭐?”
자신은 분명히 기회를 주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였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많이 참아 냈던 정현이다.
하지만 아름과 관계된 이상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제는 자리까지 준비되었다.
“이게 갑자기 나타나서 미쳤나?”
“히유, 미친 녀석은 매가 약이지.”
가장 가까이 있던 일진 중 하나가 기세 좋게 달려와서 주먹을 휘둘렀다.
페이크도 없고 날카로운 맛도 없다.
그렇다고 정확도나 강한 파워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수준의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질일 뿐.
퍼억!
“크, 크억…….”
“……!”
정현의 주먹이 뻗었다.
분명 늦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닿았다.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스프링이 튕기듯 솟구쳐서 적의 목덜미에 독니를 박는 코브라처럼 빨랐고 정확했다.
명치를 가격당한 제일고등학교의 일진은 정현이 힘을 많이 뺐음에도 사레가 들린 것처럼 컥컥거리면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그대로 앞을 향해 쓰러졌다.
“…….”
그것은 학생들 간의 싸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광경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얼어붙은 골목길 내부의 분위기를 정현의 가벼운 손짓이 환기시켰다.
“다음.”
“…….”
아름이 때보다 더한 침묵이 주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