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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21화)
7. 대화(2)


일은 대충 해결되었다.
빼앗긴 돈도 모두 돌려받았으니, 내일 선생에게 맡겨서 교내 방송을 통해 주인을 찾아 주면 될 것이다.
다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하연으로 인해 부담감이 느껴졌다.
“우왓! 정현아, 너 뭐야? 난 무슨 액션 영화를 보는 줄 알았어.”
“음…….”
뭐라고 답변하기가 애매했다.
정현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충 이런저런 격투기들을 많이 배웠다고 둘러댔다.
“그래서 그렇게 셌구나. 헤헤, 사실 아름이도 마음만 먹으면 이런 애들은…….”
“하연아!”
잔뜩 신이 나서 입을 여는 하연에게 아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순간 멈칫하다가 곧 아차하는 표정을 지은 하연이 정현의 눈치를 살폈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정현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자 안심한 하연이 아름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팔짱을 끼고 달라붙었다.
“……먼저 갈게.”
끄덕!
조금 어색하게 변한 분위기에서 아름이 말하자 정현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
그렇게 골목길에 홀로 남게 된 정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끼어들어서 일을 해결했다.
모든 것이 종료된 지금도 잘한 결정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기분만은 좋았다.
‘지금까지의 수련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누군가의 도움이 되어 주는 것.
분명 돈을 빼앗긴 당사자들은 모를 것이다.
소문이 나지 않은 이상 돈을 되찾아 준 것이 정현이란 사실을.
하지만 분명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고 호의를 품을 것이다.
정현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매일 매일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심장이 터져라 한 발자국이라도 더 뛰었다.
몸살이 나서 전신이 불덩이 같던 추운 겨울의 새벽에도 효율적으로 기운을 모으기 위해 산의 정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런 노력이었다.
그렇게 얻은 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를 인정받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광활해진 세계.
더 이상 제천문의 힘이 필요없어진 나라임에도 아직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확대 해석 하지 말자.’
정현은 조금씩 차오르는 흥분감을 가라앉혔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할 일도 아니었다.
괜한 공명심에,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큰 것을 놓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천심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스스로를 해치는 독이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욕심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음으로써 얻어지는 명예는 고귀한 가치다.
그 외에도 사람들이 탐내고 원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인정받고 싶다. 제천문이 해냈던 위대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 내기 위해서 우리가 해냈던 것들을.’
정현의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묶여서 잠들어 있는 욕망은 새삼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비슷했다.
다만, 그 스케일과 규모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것이라는 사실이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
한숨이 나왔다.
틈만 나면 삐져나오는 공명심을 애써 억눌렀다.
분명 정현은 과거 제천문의 문주들과 달랐다.
천심법을 통해 피의 저주를 이겨 낸 이상 영원히 역사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기를 바라는 현인의 의지와 다르게 제천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제천문의 비사를 기록한 책에서는 대륙과 섬에서 태동한 암중세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분명 명맥을 이어 오고 있을 것이다. 제천문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했고, 세상이 변했다.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은혜와 원한이었다.
‘제천문에게 적대적인 그들은 아직도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 괜히 제천문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시대의 흐름에 맡기자.’
어릴 때부터 해 왔던 수련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수양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겨 내기 어려운 욕심과 욕망!
정현은 오늘도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원래의 목표였던 아차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심법의 완성을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이어 가는 정현이었다.

***

“아름아, 아름아. 정현이 정말 대단했지? 순식간에 다섯 명을 파바바박!”
“…….”
“마치 옛날의 네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 그나저나 그 도망간 남자애는 정말 별꼴이다. 어떻게 혼자서…….”
“하연아, 좀 조용히 해.”
재잘재잘 수다를 떨다가 아름이 인상을 쓰며 분위기를 잡자 합죽이가 되는 하연이었지만, 잠시 뒤 집이 가까워져 오자 입이 근질거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우리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그치?”
“뭘?”
“정현이 말이야. 우릴 구해 준 거잖아.”
“……하, 뭐라고?”
약간 어이없어 하는 기색의 아름을 보며 하연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생각해 봐. 그렇잖아. 다섯이나 되는 불량한 애들을 향해 덤벼드는 것이 쉬운 일이야?”
“그런 녀석들은 나도 문제없이…….”
“하지만 보는 눈이 있었잖아. 예전처럼 안 좋은 소문을 달고 살 거야?”
“…….”
중간에 말을 끊고 들어온 하연의 반론에 아름은 침묵했다.
과거의 아름은 그야말로 사고뭉치였다.
처음 시작은 순수했다.
친구를 괴롭히는 남학생에 대한 응징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한 번, 두 번 반복되고 나중에는 근방에 소문까지 나서 다른 학교의 일진들이 덤벼드는 둥 별별 사건들이 벌어졌다.
그런 사건, 사고들에 점점 지쳐 가던 아름은 중학교 2학년 때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된다.
그로 인해서 결심한 전학, 그리고 다시 돌아온 뒤 새롭게 시작한 고등학교 생활까지…… 그간의 과정이 모두 주마등처럼 아름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내 말 틀렸어? 설사 보는 눈이 없고 아름이 네가 해결할 수 있었더라도 확실히 도와준 것은 맞잖아. 얼마든지 고마워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하연의 말을 듣고 보니 새삼스레 정현의 도움으로 큰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년 동안 쌓아 왔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던 일인 것이다.
‘얄밉기는 하지만…….’
여전히 좋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지만 신세를 지고는 못 사는 것이 아름의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하연과 헤어져서 집에 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서 고민을 했다.
정현에게 이번의 신세를 갚을 방법을.

“끄응, 끄응…… 아, 그게 좋겠다.”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며 고민을 하던 아름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정현이 유일하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식사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맛있는 반찬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사라져 갈 때면 아쉬움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종종 보아온 아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음? 아름아, 어쩐 일이니? 생전 부엌에는 밥 먹을 때 빼고 얼씬도 안 하더니.”
“엄마는 무슨! 그렇게 말하면 내가 밥만 먹는 돼지 같잖아요. 이런 예쁜 딸한테.”
아름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미숙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 했다.
“엄마, 자, 잠깐만요. 저기, 오늘 저녁은 제가 준비할게요.”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생전 요리라고는 고작 라면이나 끓여 먹을 줄 아는 딸아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믿기에는 너무 도전적인 시도가 아닌가.
“아이참! 잘할 수 있으니까, 한 번 믿고 맡겨 봐요.”
“어머, 어머! 이 애가 참.”
아름은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부엌에서 쫓겨난 미숙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시계를 한 번 보고 무엇인가를 깨달은 뒤,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호호호.”
“응? 뭔데 그렇게 기분이 좋아?”
안방에서 컴퓨터로 기사들을 읽고 있던 영진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미숙은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된다는 양 손짓을 하여 귀를 가깝게 하도록 만든 뒤 입을 열었다.
“당신 딸아이가 숙녀가 되려나 봐요. 호호, 아무래도 정현이가 마음에 들어서 직접 저녁 식사를 준비해 보려는 것 같은데.”
“뭐, 뭣! 그, 그럴 리가…….”
영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도복을 입고 도장에서 대련을 하는 아름이 아닌, 앞치마에 요리를 하는 아름이라니.
분명 바라 왔던 일이지만 그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영진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크으! 아무리 정현이라 해도 우리 공주님은 안 된다!’
영진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빠, 나 커서 아빠랑 결혼할래.”
“하하하, 우리 공주님. 아쉽지만 그건 힘들어요. 아빠는 이미 엄마랑 결혼했거든.”
“싫어! 나랑 결혼해. 난 아빠가 제일 좋단 말이야.”
“뭐라고? 아하하하!”

영진은 딸 바보였다.
그것도 보통 수준의 딸 바보가 아니라, 말기에 중증이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흥!”
영진은 수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정현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처음 받아 보는 적대적인 시선에 정현이 의아해하는 중 부엌에서 얼른 식사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별로 차린 것은 없지만…….”
모두가 식탁에 자리하자 마지막으로 앞치마를 한 아름이 부끄러움에 약간 얼굴을 붉히며 의자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호호호, 우리 딸 실력 좀 볼까?”
일단 겉모습은 양호했다.
생각보다 훌륭하게 차려진 밥상에 기대가 되는지, 미숙과 동생인 재성이 각각 국과 햄 반찬을 선택하여 입으로 가져왔다.
“으음!”
“호호, 이건 생각보다…….”
재성의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미숙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때요? 괜찮죠? 맛있죠?”
아름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렸다.
처음 시작은 정현에게 신세를 졌다고 느꼈기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요리를 해 보고 나니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호호호, 빨래를 널어놓는 것을 깜빡했네.”
“아이고, 성호랑 약속이 있었지? 늦었다, 늦었어.”
“……빨래는 아까 다 했고, 성호는 저번 달에 이사 갔다며?”
음울하게까지 느껴지는 아름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미숙과 재성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탈출했다.
“…….”
적막이 내려앉은 부엌에서 아름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것을 본 영진은 가슴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에 용기를 내어 아내가 포기했던 미역국을 수저에 담았다.
“후릅!”
이번에는 기대 어린 시선이 영진을 향했다.
그것을 보며 영진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커억! 모, 목이 타는 듯하다!’
짜다.
소금을 얼마나 넣었는지, 짠맛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정말 말 그대로 바다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