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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22화)
7. 대화(3)
“아, 아빠, 어때요?”
“…….”
차마 입이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중증의 딸 바보인 영진은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겨 내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저, 정말로 바다의 맛이 살아 있구나. 미역이 살아가는 환경을 그대로 옮겨와서 신선도를 최고로 살린 맛이다. 최고야, 최고.”
최대한 태연하려고 애를 썼지만 부들부들 떨려 오는 입꼬리는 막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아름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딸아이의 첫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릴 수는 없지. 그래, 이건 맛있다. 최고의 음식이다. 먹고 싶다. 더 먹고 싶어진다.’
영진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역국의 강렬한 맛이 뇌리에 새겨져서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아 연신 반찬들을 관찰했다.
‘햄은 기름 범벅이군. 계란프라이는 다 탔어. 보기만 해도 텁텁하네. 그리고 고등어는…….’
첩첩산중이었다.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 쉽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영진은 이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정현을 보며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쩝쩝!”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하고 있는 정현은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과도 같았다.
‘아니, 저놈은 미각이라는 것이 없는 것인가?’
영진이 그런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름이 만든 음식들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하나하나가 크리티컬 공격으로 다가올 정도.
하지만 10년이 넘는 시간을 무미(無味)의 벽곡단으로 버텨 온 정현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 신선한 자극 정도랄까?
‘지, 질 수 없다!’
중증의 딸 바보인 영진은 활활 타올랐다.
어쩐지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정현을 바라보는 아름의 눈빛이 수상했다.
그렇게 자극을 받은 영진은 겁 없이 반찬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저, 정말 맛이…… 컥! 있다. 너무 맛이…… 큭!”
“쩝쩝!”
부엌에는 정현과 영진의 식사 소리만이 울렸다.
그러는 사이 안의 상황이 궁금했는지 미숙과 재성이 거실로 나가는 기둥 옆에 숨어서 염탐을 했다.
그만큼 안의 상황이 치열했던 것이다.
‘크억! 이, 이제 한 숟가락이면…….’
태산처럼 느껴졌던 밥공기 안의 밥도 이제는 한 수저만 남았다.
인생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했던 영진은 이제 정신마저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극적인 맛에 신체는 거부를 하는데 억지로 밀어붙인 부작용이었다.
‘하, 한 수저만…… 한 수저만 더…….’
필사적인 의지로 수저를 뻗어 가던 영진은 순간 무엇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번 더 반복해서 울리는 정현의 목소리는 너무도 뚜렷했다.
“한 그릇 더.”
“그래.”
“…….”
태연하게 밥공기를 내미는 정현과 그 안에 수북하게 새로 밥을 떠 주는 아름의 모습을 보며 영진은 식탁에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
창문을 비추는 시린 달빛이 짙어진다.
골목길 사이사이로 비치는 가로등과 영역 다툼이라도 하듯 그 주위만을 피해서 내려앉은 땅거미들이 어둠을 뿌렸다.
그 시각, 식사를 마치고 한빛도장으로 자리를 옮긴 정현과 영진은 차분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지독한 녀석.”
영진의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정현의 눈빛이 의아함으로 빛났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두 그릇은 무리다.
영진은 한숨과 함께 완전 패배를 인정했다.
“……?”
그런 영진의 내심을 모르는 정현으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흠흠, 이야기나 하지. 오늘은 내공이나 무공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어떻게 생각하나?”
“좋습니다.”
내공이란 자연 상태의 기(氣)를 각자의 방법으로 가공 및 흡수하여 쌓은 힘을 말한다.
그러한 각자의 방법을 흔히 무공이라고 부르는데, 여러 가지 특성을 계산하여 그 우위를 나눌 수 있다.
무공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내가 배운 무공의 명칭은 바로 만성공(晩成功).”
“만성공?”
“만성공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공을 쌓는 속도가 느리다는 점, 그리고 중(重)의 특성을 지녔다는 점이 대표적이지.”
과거, 세계에는 수많은 무공들이 난립했다.
강한 발톱과 질긴 가죽을 지닌 포악한 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 인간은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무기와 방어구들을 개발했다.
무공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무기와 방어구를 지닌 적들을 제압하고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전자가 사람과 짐승의 대결이라면 후자는 사람과 사람의 대결이기에 더욱 치열했고,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수많은 무공들이 탄생하며 발전해 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급 무공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 몇 가지가 정해졌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내공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모을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만성공은 잘 봐줘야 중급 무공 정도로밖에 볼 수 없었지. 3년을 수련해야 1년 정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상급 무공의 기준은 엄격했다.
1년을 수련하면 1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효율성!
자연의 기운이 풍부했던 과거의 세상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혼탁해진 현대의 기운을 생각한다면 웬만한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정현이 천심법을 배우기 전에 익혔던 제천공(霽天功)이 12년의 수련을 통해 15년의 내공을 주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급 무공과 그 이하 무공의 차이는 그야말로 현격했다.
“고대무술협회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광복군의 일원들이었다고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고…… 아무튼 상급 무공들의 소유자 대부분은 모두 고대무술협회의 소속이지.”
영진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고대무술협회는 정현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크고 영향력이 있는 단체였다.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내공을 가진 자들의 숫자는 총 473명. 그중 346명이 고대무술협회의 소속이었다.
“나머지 127명은 뭡니까?”
“100명 정도는 고대무술협회의 소속은 아니지만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실생활에서 무공의 사용을 거의 자제하는 중도파라고 할 수 있지. 고대무술협회의 입장에서 크게 제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 판단하고 있기도 하고.”
고대무술협회에서 가장 최우선적으로 하는 일은 바로 정보의 통제였다.
무공의 존재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람에게는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하기에 무공을 통해 익힌 내공이라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한 반응이 걱정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체 실험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의 인간들은 널리고 깔렸으니까.”
“…….”
약간은 냉소적으로 들리는 영진의 말은 정현에게도 공감되는 것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사람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럼 저도 그 100명 중 하나로 분류되는 겁니까?”
“그렇지.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말하라고. 바로 협회에 추천을 해 줄 테니.”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고대무술협회는 확실히 필요한 존재였다.
통제되지 않는 힘만큼 무서운 것은 없으니.
하지만 자연의 기운이 약화된 현재의 세상에서 무공이란 총이라는 현대의 병기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몇몇 소수의 인물들은 경지에 올라서 총기를 무시할 정도였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였고, 그런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여 세상의 시선에서 가려 줄 단체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고대무술협회인 것이다.
“남은 27명은 어떻게 분류됩니까?”
“흠흠, 나머지는 조금 긴장하며 들어야 할 것이네. 후, 원래 말하려는 것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좀 더 확실하게 듣고 싶습니다.”
내공이나 무공에 관한 토론도 유익하겠지만 정현은 왠지 현 시대의 능력자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컸기에 영진을 재촉했다.
“일단 그중 15명은 앞서의 중도파들과 비슷하게 분류를 할 수 있지. 다만 앞의 중도파들이 자기 수양의 목적 외에는 무공 사용을 꺼려한다면, 그들은 전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차이점이라 들 수 있겠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까?”
“그래. 어디로 튕길지 모르는 고무공과 같은 부류지. 그럼에도 고대무술협회에서 직접적인 제제를 하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지켜야 되는 선은 지키기 때문이랄까.”
“판단하기 어려운 자들이군요.”
“그렇지.”
정현은 새삼 고대무술협회의 관리가 세밀하고 체계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향과 행동양식을 파악해서 분류를 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능력자들이었다.
아마 굉장한 노력과 비용이 소비되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정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12명……. 그중 9명은 범죄자야. 후, 정말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만 제법 능력이 있는 녀석들이어서 협회 차원에서 수배하고 있지.”
“흠, 만약 놈들이 궁지에 몰린다면 무공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겠다고 협박할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정현은 의견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이어서 영진은 고개를 끄덕여 주는 한편, 설명을 이어 갔다.
“사실 일반인 중에서도 무공이나 내공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제법 있지.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대통령이야.”
“……!”
“놀랐나? 후후, 사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놀랐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관계로, 이승만 대통령 시절 때부터 시작된 인연이지. 서로 상부상조하는 협력적인 관계를 맺기로 한 것은.”
그것은 정말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매력적인 관계였다.
고대무술협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무공을 바탕으로 해결해 낸다.
상상을 초월하는 난이도의 첩보전이라든가 정보 수집 능력, 적대국 요인에 대한 암살 등 국가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 온 것이다.
반대로 대통령은 권력의 힘을 바탕으로 고대무술협회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언론을 통제한다거나 공권력을 이용해 다양한 혜택을 준다.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관계였던 것이다.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겁니다.”
“어쩔 수 없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하지만…….”
“역대의 대통령들을 비롯하여 고대무술협회의 존재를 알게 된 자들은 하나 예외 없이 비밀 서약을 하게 되지. 더불어서 협회 직속의 인원들이 서약자들의 감시도 하고 있으니 최대한 믿어보는 수밖에…….”
“그나마 최선이라고 생각해야겠군요.”
“그래,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으니까.”
정현은 영진의 설명에 납득했다.
고대무술협회로서도 노력에 노력을 더해서 이룬 결과이고, 그 과정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