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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24화)
8. 조우(1)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가을 아침.
정현은 눈을 한 번 깜빡이다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바람의 단에서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 기운들이 자연 그 자체의 바람과 섞여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바람의 단이 새로운 안식처가 되었으니까.
“흠.”
정현은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서고 있었다.
분명 여느 때와 같은 싱그러운 햇살과 좋은 컨디션이었지만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느껴졌다.
‘그래, 이것은…….’
자주는 아니지만 살아오며 간간이 느껴 본 적이 있는 기분이었다.
높은 수준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현인의 피를 이었다면 자연스레 가지게 되는 그것!
“예지의 힘.”
“뭐야? 아침부터 혼잣말은 그만하고 얼른 가.”
뒤따라 나오던 아름이 투덜거렸다.
가족 모두가 외면한 음식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먹어 준 정현이기에 아름도 나름 느낀 것이 있었는지, 틱틱대긴 해도 완전 무시는 하지 않았다.
정현은 평소 때와 같이 밥을 먹었을 뿐인데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의문이었지만, 그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에는 17년의 인생 동안 만들어진 대자대비하신 미각이 문제였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늘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평소와 같이 등굣길을 걸었다.
재성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화를 이끌고, 정현과 아름이 대답을 해 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약간이나마 생긴 변화는 그 사이사이에 정현과 아름의 대화도 잠깐씩이나마 진행이 된다는 것,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타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인원들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여럿이었다.
‘심상치 않군.’
어디까지나 그것은 예상이었지, 확신은 하지 못했다.
정현이 집중적으로 배운 것은 무공이지 주술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했다.
웅성웅성!
반으로 들어서자 오늘도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정현을 반겼다.
5분 전에 먼저 반에 도착한 아름은 새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었고, 원태와 진찬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서 인사를 해 왔다.
“좋은 아침!”
“이런 날은 야구를 해야 제 맛이지. 어때, 정현. 생각 있어?”
“이게 어디서 선수를 쳐! 정현아, 농구하자. 오늘 체육 시간에 6반이랑 붙는 거야. 응?”
시작부터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
워낙 일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이제는 정현도 그러려니 했다. 그렇다고 원태나 진찬이 실제로 싸우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둘이 친한 사이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
정현은 만담 콤비라도 결성할 듯한 기세의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주위를 훑었다.
일상적인 분위기야말로 정현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상상만 했던 평범하고 평온한 삶.
천심법을 수련할 때는 과거의 치열했던 순간으로 돌아가지만, 학교나 영진의 집에서는 마음의 안식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음?’
그렇게 차분하게 교실 안을 살피던 정현은 뜻밖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장인 하연의 자리를 중심으로 다섯 정도 되는 아이들이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다들 표정이 어둡고 주눅이 들어 있어 안 좋은 일로 보였다.
‘궁금하긴 하지만 여기저기 참견할 필요는 없지.’
제일고등학교 일진들을 물리친 것은 아름이 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컸다.
정현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바람의 기운을 사용하면 그들의 대화를 쉽게 엿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관심을 끊었다.
어떠한 사정이 있든 간에 본인의 문제는 본인들이 해결하는 것이 가장 순리이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현아,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래.”
만약 하연이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여느 때와 같이 그렇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아, 먼저 인사를 못했네. 저번에 일은 정말 고마워. 다른 애들 시선도 있어서 쉽게 말을 못 꺼냈는데, 혹시 삐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휴게실로 들어선 하연이 꺼낸 첫마디는 제일고등학교 일진들과 벌였던 일전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장난기 넘치는 하연의 미소를 담담한 목소리로 받아 준 정현은 어서 용건을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침 등굣길에서 세현고등학교 학생들 못 봤니?”
“세현고등학교?”
아직 타교의 교복을 잘 모르는 정현은 하연이 말해 준 몇 가지 특징을 듣고 나서야 아침에 보았던 다른 학교 학생들이 세현고등학교 소속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 바로 그 애들이야. 정말이지…… 왜 자꾸 남의 학교 학생들을 괴롭히는 거야!”
“무슨 일인데?”
하연이 입술을 깨물고 화가 난다는 듯 두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며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등교를 하다가 우리 반 학생 중에 세 명이나 돈을 빼앗겼대. 정말 범죄자도 아니고, 그런 애들은 혼쭐을 내줘야 해.”
“…….”
그렇게 말하면서 정현의 눈치를 힐끔거리며 살피는 것이, 나서서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기색이었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정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싸움꾼이 아니야. 그저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은 학생이지.”
“그, 그래? 미안.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했나 봐. 결국은 싸움을 부탁하는 건데.”
정현이 거절하자 바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 오는 하연.
그 솔직한 모습에 정현은 피식 웃어 버렸다.
“어? 웃는다? 헤에, 평소에는 잘 안 웃더니, 별일도 없는데 그냥 웃어 버리네?”
정현의 웃음을 보며 손가락질까지 하며 좋아하는 하연의 모습을 보니 조금 어이없긴 했지만,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에 정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문 내지 않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응? 소문?”
“제일고등학교 일진들과의 싸움.”
“아……!”
정현의 설명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하연은 잔뜩 뻐기는 얼굴로 잘난 척하는 흉내를 냈다.
“내가 좀 입이 무겁지. 하지만 자물쇠까지 채우려면 뭔가 맛있는 것이 필요할걸?”
“간단한 것이라면.”
“콜!”
정말 유쾌한 소녀였다.
일부러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농담도 던지고, 특히 눈꼬리가 휘어지며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정말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증거가 바로 휴게실에 있는 다른 남학생들의 시선이 정현의 테이블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랄까.
“흠, 금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타 고교의 학생들이 우리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품을 갈취했다고 하는데, 이미 그 학교로 항의가 들어간 상황이다. 최대한 빠르게 해결할 테니 모두들 안심하고 학업에 임하면 된다. 이상!”
짧은 조회 시간이었지만 대연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긴장감을 불렀다.
더불어서 그 내용도 심상치 않았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하면서 평소와 같이 장난거리를 찾았지만,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몇몇 아이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반장이 말을 했군.’
좋은 선택이었다.
정현이 가진 힘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이고 정상적인 해결 방법이었다.
분명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
정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눈앞에 다가온 큰 난관을 생각한다면 다른 문제들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기에.
그때, 아름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나도 같이 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수련을 하나 한 번 보고 싶었거든.”
“……그래.”
감정의 골이 조금씩 매워진 덕분에 생겨난 부작용이었다.
첫날 저녁, 방을 찾아온 모습 그대로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아름과 반대로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정현은 거의 일방적인 관계였다.
아름이 주도권을 붙잡고 마구 휘두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물론, 정현의 성격을 아는지 부당하거나 무리가 되는 부탁 같은 것은 하지 않기에 조금씩 관계가 개선되고 있었다.
“보는 눈이 있으니까, 이따가 버스 정류장 다음에 나오는 삼거리 옆 골목에서 만나.”
아직도 정현이 아름의 집에 사는 것은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그리 친한 티를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름은 남몰래 말을 전한 뒤 교실을 나섰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현도 가방을 등에 멘 채 걸음을 떼었다.
‘음?’
교문을 나서 여느 때와 같이 느긋하게 평온한 주위의 풍경들을 즐기며 걷고 싶은 정현이었다.
아니, 하교를 하는 도중 보이는 의외의 모습들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저 녀석들은…….’
분명 아침의 등굣길에 보였던 타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가게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녀석부터 시작해서 골목길 인근에서 딴청을 부리고 있는 놈도 있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주위를 살피는 놈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명성고등학교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들은?”
“저건 세현 고등학교 교복이잖아. 이 근처에 단체로 무슨 볼일이 있나?”
정현의 반이야 피해를 본 학생이 있어서 담임선생님에게 보고가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반의 인원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평소와 같이 하굣길에 나섰다.
‘심각하군.’
바람의 기운을 이용해서 주위의 기세를 읽어 낸 정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큰길로 다니는 학생들은 상관없지만 PC방을 간다거나 골목의 입구에 있는 가게를 이용하는 학생들은 좋지 못한 일을 당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흉악한 기세들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정현은 갈등했다.
힘이란 수많은 책임을 동반한다.
만약 여기서 세현고등학교의 불량아들을 물리친다면 그때는 어떠한 책임이 생길 것인가.
영진에게 고대무술협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약간이나마 그 실체를 느꼈기에 더욱 망설여졌다.
자칫하다가는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은 직접 해결했지.’
그것도 아름이 관계된 일이었기에 나선 것이었다.
결국 지금의 소란은 정현과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하지만…….’
문뜩 떠오른 기억들.
아침에 하연의 자리에 모여서 울먹거리거나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반의 학생들.
‘그들은 타인이다.’
아니었다.
정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가슴은 부정했다.
그럴 리 없었다.
“안녕! 오늘도 일찍 왔네?”
“오늘 체육 시간에도 잘 부탁해. 5반 녀석들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고. 덤으로 내기도 이겨야지!”
한 달 전 전학 온 정현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따뜻한 인사말은 전해 왔던 반의 아이들이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얼굴을 마주치면 반갑게 웃어 주는 클래스메이트들이었다.
“…….”
정현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걸음을 떼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하고는 현재 가장 불쾌한 기분이 드는 골목가로 향했다.
“음?”
골목길 입구에서 얼쩡거리던 세현고등학교의 학생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정현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스스로 덫을 향해 달려드는 사냥감을 보듯이.
그리고 정현이 입구까지 도달하자 잽싸게 팔목을 잡아채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뒈지게 맞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고 따라와.”
“…….”
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겁을 먹은 것으로 여겼는지, 세현고등학교의 학생은 득의만만해서 팔을 더욱 강하게 잡아끌었다.
“뭐야? 벌써 다음 놈을 잡아왔어?”
“히유, 일 처리가 장난 아닌데?”
골목길 안쪽에서는 정현보다 앞서 잡혀 온 명성고등학교 학생 두 명이 있었고, 낄낄거리며 그들을 겁박하는 세현고등학교의 인원은 다섯이나 되었다.
“야야, 맞은편에서 사람 온다.”
“아우, 귀찮게. 저쪽 구석으로 끌고 가. 너희들, 시끄럽게 떠들어대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잘 행동해.”
망을 보고 있는 인원이 있는지, 한 명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받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흩어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양쪽에서 팔짱을 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 다음 명성고등학교 학생 두 명을 구석을 끌고 가는 세현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했군.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건가?’
세현고등학교의 인원들은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이런 일들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
그러한 정보들은 정현으로 하여금 조금씩 끓어오르던 분노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였다.
“쓰레기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중얼거리는 정현의 목소리를 들은 듯 팔목을 잡고 있던 세현고등학교 학생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정현의 얼굴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퍼억!
“큭큭! 머리가 나쁜 녀석은 몸이 고생하지. 이제 스스로의 입장이 이해가 가냐? 아니면 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
정현은 피하지 않았다.
너무도 느릿해서 얻어맞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정도인 상대방의 주먹을 왼쪽 얼굴로 받아 내며 오랜만에 느껴 보는 통증을 곱씹었다.
“이 자식이, 아직도 눈을 건방지게!”
쒜에엑!
재차 주먹이 날아왔다.
봐주는 것은 방금 전까지였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는 정현은 상대방의 주먹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정당방위를 위한 한 방이었지. 두 번은 용납하지 않아.”
“크윽! 이, 이게……!”
당황한 세현고등학교의 일진이 발을 들어 앞차기로 정현의 복부를 노려 왔다.
그러자 정현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잡고 있던 손을 옆으로 당겨서 발차기를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상대방의 자세를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