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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얼스 1권(2화)
1장. 새로운 시작(2)


‘뭐 때문이지?’
카일러는 그 이유를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시선이 카일러가 들고 있는 검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꺄악!”
카일러는 말하면서 생각없이 칼을 들어 보였는데 그것이 그 여자를 위협하는 꼴이 된 듯했다. 그 여자는 이제는 공포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기까지 했다.
“정말 이곳은 답답한 것들로 가득하군.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카일러가 다시 어두운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얼마 가기도 전에 또다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귀찮게 됐군.”
카일러가 뒤를 돌아보자 아까 도망갔던 깡패가 그 여자의 목에 면도칼을 대고 있었다. 게다가 그 깡패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이 열댓 명 정도 같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각각 쇠파이프,
“도망가려는 거냐?”
“쓰레기들은 뒤끝도 심하지. 두 명이서 안 되니까 지 친구들을 끌고 온 건가?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인질까지 만들어 놓은 건가?”
“이 자식이!”
“약해 빠진 놈들이 모였다고 강해지기라도 하는 줄 아나?”
“이런, 저 자식 밟아!”
‘다 죽여야 하나? 하지만 죽일 거면 저 여자까지 죽여야 한다. 살인한 것을 본 목격자가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죄 없는 사람까지 죽일 수는 없지.’
만약 카일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 여자가 봤는데도 살려 둔다면 그 여자가 신고라도 하는 날에는 이곳에서 적응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거지 자식, 죽어!”
빡!
카일러는 달려드는 깡패에게 검 대신 검집으로 아래턱뼈를 가격했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드는 깡패들은 하나둘씩 쓰러뜨려 갔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싸우는 것이 죽이면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싸움이다. 때문에 카일러도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퍽!
깡패가 분노에 눈이 뒤집혀 있는 힘껏 휘두른 쇠파이프가 카일러의 무릎을 가격했다.
‘젠장.’
뼈가 시리는 고통에 제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몰려드는 깡패들을 코앞에 두고 마냥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비 오는 날에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을 것이 분명했다.
“죽여 버릴 수만 있어도 훨씬 쉬울 텐데.”
“건방진 놈!”
카일러의 도발 아닌 도발에 깡패들은 더욱더 거세게 공격해 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허점만 더 드러날 뿐이었다. 그리고 카일러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즉각 공격을 퍼부었다.
퍽, 퍽!
“거지 주제에… 윽!”
빠각!
싸움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깡패들은 카펫으로 빙의하여 바닥에 깔려 있었다. 남은 깡패는 단 한 명뿐이었다.
“가까이 오면 그어 버린다!”
“사, 살려 주세요!”
그 깡패는 여자의 목에 면도칼을 대고 카일러를 협박했다.
“네가 사람을 죽일 정도의 위인은 못되는 것 같은데.”
“우, 웃기고 있네!”
카일러는 그 깡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카일러가 그 깡패 코앞까지 다가갔을 때도 깡패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저 벌벌 떨기만 했다. 카일러는 검을 빼 들어 깡패의 목에 겨눴다. 그러자 깡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거, 거지 주제에…….”
“아까부터 도대체 나보고 거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뭐지?”
“그야 옷이 거지 같으니까…….”
“옷 벗어.”
“뭐, 뭐라고?”
“옷 벗으라고.”
“그럼 난 뭘 입으라는…….”
“바꿔 입자는 얘기다. 눈치가 없군.”
깡패는 얼떨결에 카일러와 옷을 바꿔 입게 되었다.
“그런데 아까 주머니에서 뺀 건 뭐지?”
“지, 지갑인데…….”
“지갑? 마침 잘됐군. 돈도 이리 내놓도록 해라.”
“하, 하지만…….”
깡패는 카일러의 요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명 ‘삥’을 뜯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뜯기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깡패였다.
“여, 여기…….”
깡패는 주머니에서 파란 배춧잎을 꺼내 카일러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카일러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돈을 달라고 했지 종이 쪼가리를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게 돈이 아니면 도대체…….”
“죽고 싶나?”
“아니 이게 돈인데, 돈이 아니라고 하면…….”
“돈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 정도는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감히 날 농락하려고 해?”
“…….”
“안 되겠군.”
카일러는 깡패의 몸을 뒤져 금속으로 된 것들을 모두 챙겼다. 덕분에 카일러의 주머니에는 ‘100’이라고 적힌 것들이 꽤 많이 들어찼다.
“돈이 있으면서 종이 쪼가리로 날 조롱하다니. 이딴 건 그냥 찢어 버…….”
“안 돼!”
돈이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카일러는 파란 배춧잎 뭉치를 찢으려 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가슴 아픈 행동. 순간 이를 지켜보던 깡패의 눈이 뒤집혀서 카일러를 막았다.
“이, 이거 정말 돈 맞다니까!”
‘이곳은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돈이 종이로 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깡패 녀석은 믿음이 가지 않는군.’
카일러는 인질로 잡혔던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마, 맞아요.”
‘정말 이곳은 신기한 곳이군. 돈을 종이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카일러는 돈 뭉치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됐다. 이제 더는 허튼짓은 하지 마라.”
“…….”
깡패들에게 경고를 한 카일러는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아까 깡패에게 인질로 잡혔던 일 때문에 겁에 질렸는지 아직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는 게 좋겠군요.”
“오늘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그럼 혼자 가시죠.”
“자, 잠깐… 바래다 주세요.”
“앞장서시죠.”
그 여자가 앞장서고 카일러는 그 옆에서 동행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전 강혜린이에요.”
“카일러입니다.”
“고마워요, 아까 구해 주셔서.”
“고마울 건 없고, 앞으로는 밤에 조심하시죠.”
“그런데, 아까 왜 그런 옷을 입고 있어요? 혹시 코스프레 행사에라도 참여했었어요?”
“코스프레 행사? 그런 건 모릅니다. 그보다 여기가 어디죠?”
“네? 여기는 서울인데요?”
“서울이 나라 이름입니까?”
“아, 아뇨. 나라 이름은 한국이잖아요. 한국말도 잘하면서 왜…….”
혜린이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날짜는 어떻게 되죠?”
카일러는 자신이 궁금한 것을 계속해서 물었다.
“12월 14일이요.”
“년도는?”
“2100년이요.”
“2100년?”
‘2100년이라니… 내가 살던 곳이 1400년이었는데 그럼 내가 700년이나 거슬러 올라온 것인가?’
카일러는 2100년이라는 말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혜린은 그런 카일러의 반응을 의아해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숙박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아, 그래요. 그 문제는 아마도 제 삼촌께 부탁드리면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뉴 얼스사에서 새로 개발한 게임이 혁신적인 세기의 발명이라 호평을 받고 있…….”
삑!
“게임이 무슨 혁신적인 발명이라고 떠들어 대.”
강현수는 조카가 늦은 시간에도 들어오지 않자 걱정된 나머지 괜한 곳에 화풀이를 했다.
강현수는 상가 빌딩 몇 채와 원룸 빌딩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월세만 받아도 수입은 충분하지만 그의 직장인 군대로 계속 출근하고 있었다.
애국심으로 무장한 그는 그 누구보다도 군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의 불같이 화끈한 성격 때문에 군대에서 불호랑이로 통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자던 군인들도 바로 일어나 자세를 잡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쩔쩔 매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조카 강혜린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대신 돌보게 됐는데 이제 강현수는 자신의 조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도 남을 정도로 그의 조카를 아낀다.
‘벌써 12시인데 아직도 안 들어오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오늘 아침 조카가 빡빡 우기고 늦게까지 놀고 온다고 하자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점점 초조해진다.
딩동!
“어, 이제 왔구나?”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사랑스러운 조카가 집에 무사히 왔다.
그런데 조카 뒤에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놈이 하나 있었다.
“혜린아…….”
“네?”
“뒤에 있는 그 음침하고 우울하고 수상한 놈은 누구냐?”
강현수가 카일러를 노려보며 물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무례하군.’
강현수의 말에 카일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숙박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 분노를 삭였다.
“사실… 길에서 험악한 사람 두 명을 만나서 큰일 날 뻔했는데 이분이 도와주셨어요.”
“험악한 놈? 큰일?”
‘험악한 놈, 큰일 날 뻔’이라는 말에 강현수의 미간과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어떤 미친놈이냐?”
“걱정 마세요. 여기 이분이 다 헤치웠어요. 정말 고마운 분이에요.”
“저 사람이?”
“네.”
“빚을 진 사람한테 내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군. 사과하마.”
“그래서 말인데 삼촌, 이분이 방을 하나 구하고 있는데 마침 빈 집 하나 있잖아요. 이분하고 계약하면 될 것 같은데… 괜찮죠?”
“그래, 뭐… 빚을 졌으니까 사례하는 셈 치지. 하지만 월세는 선금이다.”
아무리 은인이라고 해도 집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빼 먹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집세를 꼬박꼬박 제때에 내지 않는 세입자를 들이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겪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은 상당히 계산적인 인간이로군.’
“제가 가진 돈이면 충분할 겁니다.”
카일러는 아까 삥 뜯은 돈을 꺼내 보였다.
“그 정도면 한 달치 월세로는 충분하겠군. 내 조카를 도와준 것도 있고 하니까 월세는 한 달에 25만 원 내면 된다. 반값이니까 이 정도면 이제 빚은 값은 거다.”
“반값이면 많이 선심 쓰셨군요. 알겠습니다, 계약하죠.”
카일러는 월세가 무엇인지 몰랐고 당연히 월세가 25만원이라는 말에도 싼 것인지 비싼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반값이라는 말에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자, 계약서부터 작성하자.”
계약서를 작성한 뒤 카일러는 한 시름 놓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저, 근데 집은 어떻게 찾아가죠?”
모든 것이 낯선 카일러에게 주소만 보고 집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강혜린이 웃으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현수의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카일러를 째려 봤다.
강현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카일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조카를 구해 줬는데도 날 의심하는 것인가? 고지식한 인간이로군.’
“걱정 마시죠. 저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