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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얼스 1권(7화)
4장. 초보자, 카일러(2)


‘이, 이게 뭐지?’
카일러는 눈 앞에 뜬 퀘스트 창 때문에 당황했다.
가상현실 게임이 아니더라도 게임을 이미 수차례 접해 본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퀘스트 창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겠지만 카일러는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정육점 주인 말라크의 고민거…….’
“내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퀘스트 의뢰를 수락했습니다.”

볼보크 장로가 대답을 재촉하자 얼떨결에 대답한 카일러의 눈 앞에 새로운 창이 떴다. 카일러는 그 창의 내용을 보고 난 다음에야 왜 눈 앞에 정보창이 떴는지 알 수 있었다.
‘퀘스트 수락? 그러면 장로의 부탁이 퀘스트라는 것이었군. 그리고 좀전에 눈 앞에 뜬 창이 퀘스트 내용과 관련된 창이겠군.’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구만. 이름이 무엇인가?”
“카일러입니다.”
“고맙네, 카일러.”
“아닙니다. 어쨌든 지금 바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카일러는 볼보크 장로에게 인사를 하고 말라크가 운영한다는 정육점으로 갔다.
정육점에 가자 수염이 덥수룩한 뚱보가 어울리지 않게 침울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주변을 보니 판매하기 위해 진열해 놓은 고기뿐만 아니라 온갖 가구들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정육점 주인 말라크의 고민거리가 이것과 관련 있는 일인 것 같군.’
“이곳 주인이십니까?”
“넌 누구야?”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초면에 반말을 하는 정육점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퀘스트를 위해 가볍게 넘어갔다.
“카일러입니다.”
“난 말라크다.”
“저는 이곳에 처음 온 사람입니다만 볼보크 장로님에게 들은 것인데 걱정거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녀석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
말라크가 카일러에게 신경질을 냈다.
‘저놈을 제거하고 싶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 생활은 끝이다. 침착하자.’
카일러는 불타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혔다.
“이곳 상황으로 추측컨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누면 반이 되는 것이 고통입니다. 얘기라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날 약 올리나? 딱 보기에도 약해 보이는 주제에 뭘 안다고 설쳐 대는 거야?”
말라크가 자존심 팍팍 긁는 소리까지 하자 카일러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생겼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진정시켰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만 해도 될 것 같으니까 참자.’
“맞는 말입니다. 제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혼자 고민한다고 더 나아질 것도 없습니다. 최소한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하면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도움 안 돼, 분명히. 꺼져.”
“이런 멍멍이 같은 자식. 감히 도와주겠는 사람을 이렇게 막 대해?”
마침내 카일러는 그동안 참았던 분노의 마그마를 모두 뿜어냈다.
말라크에게 음성 서비스를 베이스로 깔고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팽개쳐 굴려 대며 롤링 서비스를 제공해 줬다.
“이, 이놈이! 네까짓 게 뭔데…….”
“네놈 버릇을 고쳐 주마.”
“아,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카일러의 폭력이 통했는지 말라크는 아까와는 상반된 태도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 봐라.”
말라크가 두툼한 턱수염을 만지며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밤마다 누가 내 가게를 다 망쳐 놓고 있어.”
말라크가 주변을 서글픈 시선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요새 밤마다 지키고 있었는데 드디어 정체를 알게 됐지.”
“누구였는데?”
“멧돼지였다.”
말라크가 분노와 억울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때려잡으면 될 것 아닌가?”
“한 마리 잡기도 만만치 않은데 잡아도 잡아도 또 온다는 게 문제지.”
“…….”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군.”
“뭔데?”
“그걸 몰라서 묻나? 멧돼지 소굴을 찾아서 멧돼지 가족을 멸족하는 것밖에 없지 않겠나?”
“…….”
“그런데 멧돼지가 이 마을 근처에 있는 몬스터 중에 제일 약한가?”
“지금 장난하나? 마을 밖에 나가자마자 보이는 게 토끼인데. 설마 토끼가 멧돼지랑 맞짱 떠서 이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기 처음 온 거라 마을 바깥쪽이라 할 만한 곳은 푸른 비석 있는데밖에 안 가 봤거든.”
“힘만 셌지 역시 초보였군. 푸풉.”
비웃음에 다시 이마에 힘줄이 터질듯이 튀어나오는 카일러를 보자 말라크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 소굴이 어딘지 알고 있나?”
“당연하지. 내가 며칠 동안 멧돼지 잡으며 집만 지킨 게 아니라 멧돼지를 몰래 따라가 봤거든.”
말라크가 어깨 딱 펴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곳에 가서 멧돼지 40마리만 잡아 주면 될 듯한데… 해 주겠어?”
말라크의 말이 끝나자 눈앞에 창이 하나가 떴다.

[정육점의 불청객]
난이도:E
초보 마을 슬란의 말라크가 운영하는 정육점을 밤마다 멧돼지가 와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말라크는 멧돼지를 소탕하여 자신의 가게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이제 말라크는 자신의 정육점을 지킬 방법은 멧돼지의 소굴을 찾아가 멧돼지 수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말라크가 해결하기에는 벅찬 문제였고 고민하던 말라크는 우여곡절 끝에 당신에게 멧돼지 40마리를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부탁을 승낙하시겠습니까?

‘이, 이게 아닌데. 그냥 물어보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게 뭔 상황이지. 그런데 퀘스트를 깨면 보상은 빵빵하게 줄 것 같은데.’
“좋아. 가서 다 죽여 버리고 돌아올 테니까 위치나 알려 줘.”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퀘스트 난이도가 E라 걱정되었으나 멧돼지라고 해 봤자 결국은 초보 마을 근처에 있는 몬스터이다.
뉴 얼스는 플레이어의 실제 능력이 어느 정도 반영된다고 했다.
따라서 아무리 현재 자신의 캐릭터가 레벨 1이라도 멧돼지를 충분히 이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카일러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잠, 잠깐만. 가기 전에 준비할 게 있잖아.”
“그러고 보니까 무기가 없군.”
“뭐? 무기가 없다고? 이방인들은 성능이 별로인 것 같아 보여도 최소한 무기 하나씩은 가지고 있던데.”
“이방인?”
“그래, 이방인. 이곳 마을에 처음 온 방문객들을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부르지. 너도 이방인이잖아.”
‘이방인이라는 말은 뉴 얼스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군. 어쨌든, 말라크의 말대로라면 나도 무기를 갖고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군.’
카일러는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 중 한 명을 붙들었다.
“질문 좀 하겠습니다. 무기를 어떻게 꺼내죠?”
“이 사람이 미쳤나? 그걸 나한테 왜 묻나? 당신이 갖고 있으면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겠지.”
“제가 아직 뉴 얼스라는 세계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시작할 때 기본적으로 무기가 지급되는 것 같은데…….”
“참 개념없는 이방인이로군. 본인 물건은 본인이 간수를 잘해야지.”
“이방인? 그럼 당신은 이곳 사람입니까?”
“당연하지. 더는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비키게!”
카일러가 붙들은 사람은 카일러에게 화를 내며 제 갈 길을 갔다. 그 장면을 지켜본 주변의 유저들은 카일러를 우스운 듯 쳐다봤다.
“저 사람 NPC한테 뭘 물어보는 거야?”
“NPC는 레벨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알겠어? 저 사람 게임 처음 하나 봐.”
뉴 얼스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시스템에 대해 물어보려고 아무나 붙들고 물어본 카일러. 하지만 그 사람은 유저가 아닌 게임 시스템에 대해 전혀 모르는 NPC였다.
사실 유저와 NPC의 차이는 그냥 외모만 놓고 봤을 때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유저들이 시작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장비템, 그러니까 옷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초보자 마을에서는 거의 헷갈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카일러는 생전 처음 해 보는 게임이 뉴 얼스였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다. 때문에 NPC를 붙잡고 NPC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게임 시스템을 물어본 엉뚱한 짓을 하게 됐다.
그 뒤로 몇 명의 사람들을 더 붙들고 물어본 끝에 카일러는 아이템에 관련된 시스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템 창.”
카일러가 말을 하자 여러 칸으로 구성된 아이템 창이 보였고 그중 한 곳에 초보자용 검이 보였다.
카일러는 그곳에 손을 뻗어 무기를 집었다.
“좋아, 무기는 여기 있다. 이제 장소를 알려 줘.”
“아니, 내 말은 그 무기만 갖고 잡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면서 말라크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 줬다.
무엇인가에 할퀴고 물어뜯긴 자국이 선명했다.
멧돼지 짓임이 틀림없었다.
“이 상처가 다 멧돼지를 상대하다 생긴 상처야.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몸이 이 모양이 되다니. 여자들이 보면 무섭다고 도망갈 걸. 한 마리씩 상대하는데도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멧돼지 소굴에 그냥 들어갔다가는 바로 사망이야. 그러니까 준비를 하고 가야지. 그런데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냐?”
카일러가 멍하니 말라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노총각인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이래 봬도 20살이야.”
“뭐? 20살이라고? 그 얼굴이? 참… 인간이 저렇게 삭을 수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멧돼지 소굴로 가기 전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 된다고.”
“아, 그렇지. 뭐 준비해 둔 것이라도 있나?”
“자, 받아.”
말라크가 카일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말라크가 카일러에게 건넨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포션이었다.
“자, 받아. 이것만 있어도 큰 도움이 될 걸.”
말라크가 호언장담했다.
카일러가 포션을 받아들고 아이템 창을 확인하자 ‘수상한 포션’이라는 이름의 알 수 없는 포션이 있었다.
“이게 뭐길래?”
이게 무슨 포션이기에 호언장담을 하는 걸까?
“눈치도 없는 놈이네. 동물용 진정제야. 고농축 진정제라 이걸 먹을 거에 타 아무 데나 뿌려 놓으면 멧돼지들이 뭣도 모르고 먹고 뒈져 버리거나 쓰라린 고통에 정신 줄을 놓겠지. 크큭.”
그동안 당한 게 얼마나 억울했으면 저렇게 사악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카일러는 말라크의 표정을 보고 살짝 당황했다.
“동물용 진정제? 흐음… 고마워.”
“그리고 이것도.”
말라크가 지도를 건넸다.

“멧돼지 소굴 지도를 습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