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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1권(12화)
6. 점핑! 점핑!(2)
다음은 이 두목의 몸을 묶는 것.
영화에서 손발을 묶을 때 사용하던 타이(Tie)를 이용해 일단 다리를 묶었다.
그리고 손을 뒤로 해서 스스로 묶었다. 혹시나 싶어 손은 낑낑대며 두 번이나 묶어야 했다.
“휴∼ 혼자 묶는 게 쉽지 않네.”
땀이 흐른다. 하지만 이미 묶인 손이라 닦을 수도 없다.
“앗! 따거.”
망할 놈들의 모기. 산모기라 그런지 가렵지 않고 따갑다.
하지만 내 몸이 아니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나저나 눈앞에 정신을 잃고 있는 아저씨는 짧은 순간에 오지게 맞았는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난 아저씨를 보며 두목인 나상열의 기억을 훑었다.
“젠장! 하필이면.”
트럭의 번호판이 나상열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오늘 무사히 넘어간다고 해도 저 아저씨는 영문도 모르고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으∼∼”
짜증난다.
아무리 생각해 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영화처럼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억을 어떻게 지우냔 말이다.
‘혹시 지안이라면 좋은 생각이 있을까?’
난 고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해 혼자 살아왔었다.
누군가를 특별히 의존한 적이 없었다. 한데, 이 순간 지안이 생각나다니…….
곧 머리를 흔들었다.
연락할 길도 없는데 거기에 정신을 쏟을 시간이 없다.
무작정 나상열의 정신세계로 들어갔다.
방을 만들고, 방에 ‘오늘 일을 잊어.’라는 글자들을 채워 나갔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어 지우고 다시 ‘정직하고 착하게 살자.’라는 글자들로 채웠다.
하지만 이건 헛짓이다.
이곳은 그의 무의식의 세계일 뿐이다.
영향은 받겠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가만…… 무의식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면 의식의 세계도 있을 터.
난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둠을 향해 뛰어본다.
어느 순간부터 지나온 길에 등불을 하나씩 만들며 뛰었다.
‘헉, 헉! 이것도 바보 짓이다.’
돌아보니 장관이긴 하다. 등불의 길이라고 할까?
생각을 바꿨다. 나상열의 기억 중 억지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했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기억들.
난 그 기억들이 어디서 오는지 추적해 본다.
워낙 짧은 순간에 들어오는 것이라 추적이 힘들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세한 기억을 요구하며 어디서 오는지 느껴본다.
그러나 추적이랄 것도 없이 그냥 바로 위에서 그냥 흘러들어 온다.
끈이 연결된 것도 아니다.
‘으아아아아아! 빌어먹을!’
과일 장수 아저씨는 사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냥 놔둬도 된다.
그것도 아님 6명 모두를 죽여 버려도 알 사람은 없다.
어둠 속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 과거처럼 미쳐 버린 건가?
난 어둠 속에서 발광했다.
‘의식 세계는 어디 있는 거야? 어둠 따위 찢어져 버려∼∼∼!!!’
양손을 위로 올리고 어둠을 찢으려는 듯 행동했다.
어이가 없다.
그 순간 어둠이 갈리더니 또 다른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내 생각이 투영된 걸까?
또 다른 세계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온갖 기억의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기억!’
난 나상열의 기억이 영화의 필름처럼 나열되기를 바랐다.
또 다른 세계, 의식 세계에 기억의 필름이 생겨났다.
난 이곳에서 신(神)인 건가?
어린 시절 간혹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꿨다. 쫓기면서 이곳저곳을 뛰어 날아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 올라가면 ‘무섭다.’, ‘떨어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 어느새 떨어져 내리던 나. 그러다 다시 ‘솟구칠 수 있다.’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솟구쳤다.
밤새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다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내가 정신세계에서 방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글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창조와 마찬가지 아닌가.
난 기억의 필름에서 지울 부분을 찾았다.
그들은 내가 트럭으로 별장에 올라오기 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트럭이 올라오는 소리에 숨죽이고 있다가 날 덮친 것이다.
난 어느새 손에 잡힌 지우개로 술 마시는 기억 이후의 장면을 지우기 시작했다.
한참을 낑낑대며 지우다 웃음이 나왔다.
‘흐흐흐! 참 빈곤한 상상력이다.’
정말 기억을 지우개로 지우고 있었다니.
아직 뒷부분이 꽤 남았는데 난 그 남은 부분을 돌돌 말아 불을 일으켰다.
삼매진화(三昧眞火).
소설에서 나오는 대로 필름은 불이 나며 하얀 재로 바뀌었다.
난 그 재를 비비며 가루로 만들어 의식의 공간에 날렸다.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없다.
다섯 명의 기억을 지워야 했고 그들을 방으로 옮겨야 했다.
마지막으로 나상열의 기억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정말로 그의 기억은 술 먹는 장면으로 끝나 있었다.
그때부터 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응.”
드디어 6명을 별장 안으로 다 옮겼다.
그리고 그들을 묶어 놓은 끈들을 끊고 재빨리 별장에서 나왔다.
정말 저들이 기억을 잃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그들이 입은 상처를 설명할 만한 한 가지를 그들의 정신세계에 만들어놓는 걸 잊지 않았다.
“휴∼∼”
청평으로 가는 도로를 탔을 때 비로소 한숨이 나온다.
날은 어느새 밝아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
빨리 서둘러야 한다. 지난번에 묻어둔 돈을 파내서 지안의 별장에 넣어둬야 한다.
병원 이사장의 별장에는 역시나 돈 박스가 없었다. 마치 내 돈을 뺏긴 듯 분하다.
물론, 오늘 고생한 대가는 반드시 받아낼 생각이다.
난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
과일 장수 한씨는 눈을 떴을 때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분명 서울 시내도로 옆에서 과일을 팔고 있었는데 내비게이션을 확인해 보니 구리시의 골목이라니.
또한 방금 전까지 저녁이었는데 지금은 날짜도 지나 아침 10시 20분이었다.
“이게 대체…… 아야야!”
무엇보다도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
‘혹시 강도?’
후다닥 돈주머니를 확인한 한씨는 안에 들어간 지폐 다발에 놀라야 했다.
“하나, 둘, 셋…….”
총 102장의 오만 원권.
그의 기억에는 2장밖에 없었는데 어디서 이 돈이 생긴 건지 궁금해졌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트럭 뒤를 확인했다.
사과의 양이 많이 줄어 있었다.
“내가 사과를 팔다가 잠이 든 건가?”
하지만 역시 이해가 안 됐다.
사과를 몽땅 판다고 해도 100만 원이 안 되는 걸 자신이 알기 때문이었다.
―전화왔숑! 전화왔숑!
“여보세요?”
―인간아! 지금까지 어디서 뭐했어!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지금 어디야?
화난 건지 걱정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한씨의 처는 전화상으로 폭풍같이 말을 퍼붓는다.
한씨는 그런 처를 달래느라 현재의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끄응, 목이 왜 이리 아프지?”
나상열은 일어나면서 뒷덜미를 만졌다. 마치 뭔가에 맞은 듯이 아프고 뻑뻑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 속에 있는 동생들은 여전히 미동도 안 하고 있다.
“이건 또 뭐야?”
손목에 난 타이 자국에 그는 놀란다.
어젯밤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술 먹다가 목덜미에 어떤 물체에 가격을 당한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 물건은…….
막내가 사용하는 경찰봉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온다.
“아구구구! 형님 일어나셨어요?”
“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일어난 둘째는 볼이 두 배는 커져 있었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맞은 자국을 보니 경찰봉이나 쇠파이프에 맞은 자국.
“어떤 새끼가? 아∼! 아프다.”
문제는 부스스 일어나는 놈들이 대부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머리가 깨진 놈도 있었고, 여기저기 멍든 녀석도 있었다.
“야, 막내 깨워봐!”
나상열이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막내 저 녀석이 술 먹다가 깽판을 친 게 아닌가 싶다.
“이 새끼, 미쳤나? 얼른 일어나!”
여기저기 멍투성이인 장종철이 막내를 깨운다.
“으갸갸갸!”
막내도 심각했다. 턱이 완전 한쪽으로 쏠려 있고 연신 옆구리를 잡고 낑낑댄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형님.”
“혹시, 귀, 귀신?”
어디 구역 싸움을 갔다가 온 모양으로 엉망인 놈들이 머리를 아무리 맞대 봐야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장종철의 입에서 나온 귀신이라는 말에 다들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입을 다문다.
나상열도 뒷골이 쭈뼛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동생들 앞에서 약한 척할 수가 없었다.
“씨발, 귀신은……. 다들 내려가서 치료나 받자.”
그러면서 나상열은 슬며시 일어났다.
그는 어서 이 별장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형님, 그런데 아직 이곳에 며칠 더 있어야 하잖아요.”
“……일단 치료가 먼저지. 그리고 똘마니 놈들 몇 명 시켜서 지키게 하면 되겠지.”
“조, 좋은 생각이십니다.”
“종철 넌 여기 남아 있던가.”
“으갸갸갸갸!”
다들 자신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형, 동생들의 눈빛에 정신을 차린 장종철.
“아, 아닙니다. 저도 치료받아야죠.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다들 앞을 다투어 별장에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동시에 별장을 다시 돌아본다.
일순 그들의 머릿속에는 하얀 소복을 입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귀신이 그려지고 있었다.
“으익!”
장종철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부르르 떨더니 얼른 차로 뛰어간다.
그를 뒤따라 일행은 아픈 줄도 모르고 차로 간다.
나상열은 쪽팔린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지만 빨라지는 걸음을 어쩌진 못했다.
7. 윤승호 환자가 정신을 차렸어요!(1)
‘꺌꺌꺌! 그니까 그들의 정신세계에 귀신을 만들어두고 왔단 말이야?’
‘응. 기억을 지웠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좀 불안해서.’
‘하여간 엉뚱하기는.’
난 과일 장수 아저씨의 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선도법을 행한 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지안에게 모든 설명을 해야 했다.
‘어쨌거나 선도법을 통해 그 사람의 몸에서 오래 생활할 수 있다는 말이네?’
‘응. 넌 기는 느껴져?’
‘아니. 이론은 알겠는데 쉽지 않더라고. 아무래도 점핑을 최대한 연습을 하면서 해 봐야겠어.’
‘괜찮은 방법이네. 난 육체와 연결하는 방법이나 강구해 봐야겠다.’
‘금아…….’
‘응?’
‘아냐. 열심히 하라고.’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금세 화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유난히 병원이 시끄럽다.
창밖을 보니 병원 휴게실에는 방송국에서 나왔는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특히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누가 입원했어?’
‘맞다. 윤승호가 어제 입원했어.’
‘윤승호가 누군데?’
‘왜, 있잖아. 가수 겸 배우. 몇 년 전부터 얼마나 인기였는데. 그리고 우월한 외모에 늘씬한 키 똑똑함까지. 네가 좋아하는 음악 프로에도 많이 나왔잖아.’
내 머릿속에는 그런 인물은 없었다. 나에겐 오직 걸 그룹뿐이다.
‘몰라.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영화 촬영 중간에 낙마 사고가 났나 봐. 어젯밤에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지안이 윤승호에 대해 얘기할 때 왠지 모를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유명인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신경을 껐다.
지금 중요한 것 한시라도 빨리 내 육체를 되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