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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1권(15화)
8. 타인으로 살아가기(2)
윤승호의 방문을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지금 참 어정쩡한 상태로 있었다.
바로 벽과 벽 사이에 끼여서 지안과 얘기를 했고 방의 동태를 살폈다.
‘누가 또 왔나보다.’
‘이거 두 집 살림하는 서방님을 둔 것 같잖아.’
‘너가 이렇게 만든 일등공신이잖아.’
‘그래, 가라. 그리고 나도 한동안 못 들어올 거야.’
‘어디 가?’
‘테스트하러 간다. 나도 밖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테스트를 해 봐야지. 일 끝나면 내가 병실로 갈게.’
‘오케이! 조심히 다녀와.’
지안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윤승호에게 점핑했다.
“승호야, 자냐?”
“아함∼ 잠깐 잠들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형?”
난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기를 하며 일어났다. 지금 나에게 말을 하는 이는 윤승호의 로드매니저였다.
이름은 배동수.
윤승호보다 2살 많은 올해 27세의 형으로 이틀 전부터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윤승호에게 꽤 불만이 많던 형이었다.
그의 월급은 회사에서 80만 원이 다였다.
윤승호가 조금씩 챙겨주기는 했지만 정말 용돈 수준.
그러니 당연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난 그에게 점핑해 모든 사실을 알았다.
“미안하다. 사장님 오셔서 깨웠어.”
지금도 극도로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괜찮아요, 형.”
예전의 윤승호라면 짜증을 냈겠지만 난 그 정도로 안하무인한 성격은 아니다.
잠깐 날 이상하게 바라보더니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인다. 문으로 들어오는 깔끔한 중년의 사내. 승호의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괜찮냐?”
난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누워 있을 때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뭐, 심려까지야…….”
사장도 이상한 표정으로 날 본다.
윤승호의 기억을 살펴보고 꽤 건방지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윤승호의 행동을 배동수 매니저의 기억에서 볼 땐 정말이 개망나니 그 자체였다.
배동수가 나간 걸 확인하고 사장에게 점핑했다.
이제는 워낙 숙달되어 이질감을 느낄 새도 없이 일체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억을 읽었다.
웃! 대박이다.
이 양반 정말이지 바람둥이다. 아니, 직업상 그런 건지 여자들과 어지간히 놀아났다.
큭! 내가 좋아하던 배우가 이 사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다.
기억은 1인칭 시점으로 나에게 보여진다.
즉, 대상자가 직접 눈으로 바라봤던 그대로 보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여자의 기억을 읽을 때는 약간 곤욕스럽다.
그런 장면은 그냥 넘긴다. 대신 남자의 기억을 읽을 땐 꼼꼼히 읽는 편이었다.
한데 이 양반의 기억은 레어템, 아니, 유니크템이다.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기억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아주 샅샅이 읽어들인다.
기억을 모두 읽고 나의 취미 활동을 위해 유체 이탈을 한 후, 신현국 사장의 정신세계에 들어갔다.
취미 활동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방을 만들고 방에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적어두는 것이다.
―남자가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 할 것은 세 치 혀뿐만이 아니다.
꽤나 만족스런 글이다.
난 그의 몸에서 벗어나 윤승호로 돌아왔다.
“어? 내가 깜빡 졸았나?”
“어젯밤에 좀 무리하셨나 봅니다.”
신현국은 어젯밤 많이 무리했다.
참 예쁘장한 아가씨였는데…….
“험험! 그래 병원에서는 뭐라고 해?”
재빨리 화제를 전환하는 신현국.
“아직 지켜보자고 합니다. 이렇게 멀쩡하다가도 또 정신을 잃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음, 그런가?”
그가 걱정하는 게 뭔지 기억을 읽었기에 안다.
윤승호는 HK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맺을 때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다.
계약상 군대 입대를 할 경우 계약이 그 기간만큼 자동으로 연장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쳤을 경우에는 회사 입장에서는 곤란하다.
오로지 나, 윤승호가 빠른 시간에 복귀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영화 얘기는 들었지?”
“아뇨.”
“네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새로운 배우를 찾는다고 하다가 보류했어. 나으면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로 했어.”
“그렇군요.”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못하는 신 사장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만 할 뿐이다.
“음, 그런데 복귀 시기는 언제쯤이 좋겠나?”
“글쎄요. 저야 최대한 빨리 복귀하고 싶지만 그게 쉽게 될지 모르겠네요.”
아직까지 복귀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최대한 오랫동안 병원에서 버틸 생각이다.
간혹 정신을 잃는 모습을 보여주면 퇴원하라는 소리는 안 할 것이다.
“알았다, 상황을 지켜보자고. 몸조리 잘해. 다음에 다시 오지.”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사생활이 좀 지저분하지만 사업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겐 미안하지만 난 연예계 생활을 아예 안 할 생각을 하고 있다.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런 생활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뭐, 필요한 거 없니?”
“괜찮아요. 참, 형. 형 통장 계좌번호 불러줘요.”
“그, 그건 왜?”
난 스마트폰 전원을 켠 후, 윤승호의 기억을 더듬어 모바일 뱅킹에 접속했다.
“2456134―XX―234, ○○은행.”
난 계좌번호를 입력하고 몇 번 더 터치를 하자 금액 입금란이 나온다.
“형이 나랑 일한 게 15개월짼가?”
“으, 응. 벌써 그렇게 됐나?”
난 월 300만 원을 계산해 그의 통장으로 송금했다.
내가 돈이 많아서 퍼주는 것이 아니다.
배동수의 정당한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과거 내가 공장을 다닐 때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았다.
난 공장 사장을 존경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유일하게 감명받은 것이 있다면 일한 만큼 월급을 줬다는 것이다.
고졸에 아무 기술이 없던 내가 2년간 옥탑에 불과하지만 전세방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 건 공장 사장님의 그러한 철학 때문이었다.
“15개월 월급 300만 원씩 일시불로 지불했어. 미안해, 형. 그동안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살았어. 월급은 일단 300만 원으로 정했으니까. 앞으로도 고생해 줘.”
“승호야…….”
“형이 일한 대가니까 부담 갖지 마. 나 좀 쉴게.”
“그, 그래.”
“6시 되면 문 잠그고 퇴근해. 간호사에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해주고.”
감격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배동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고 나간다.
신 사장은 그에게 날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명령을 했었다.
그게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아주 약간은 있었다.
난 선도법 3단계를 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후후∼ 흡! 후후∼ 흡! 후후∼ 흡!”
발가락의 힘으로 온몸을 지탱하며 무릎을 살짝 구부린다.
그리고 선도술의 1단계에 나오는 27식(式)의 동작을 최대한 빠르게 반복한다.
이때, 중요한 건 호흡법.
일단 한 번의 공격과 방어의 동작을 세분화시켜 ‘뻗다, 치다, 당기다, 막다’ 4단계로 나눈다.
뻗을 때 입으로 숨을 서서히 숨을 내뱉는다. 중요한 것은 모든 숨을 내뱉으면 안 된다. 다음, 칠 때 숨을 멈춘다.
그 다음, 당길 때 코로 빠르게 뱉은 만큼의 숨을 다시 흡(吸)한다.
마지막으로 반격에 대비해 막을 때 숨을 멈춘다.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켜 아주 천천히 연습을 하다 점점 속도를 높인다.
어느 순간이라도 27식의 동작을 호흡과 일치시켜 단번에 펼쳐 낼 수 있으면 선도술 1단계의 완성이었다.
선도술을 할 때 선도법 3단계도 같이하고 있다.
왠지 그렇게 하는 게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선도술을 시작한 이유는 선도법으로 내 육체와 윤승호의 몸에서 행할 때 생기는 차이점을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였다.
땀이 온몸에 흘렀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튀어 오른다.
“후우∼∼∼∼∼”
남은 숨을 모두 뱉으며 자세를 바로하며 운동을 마쳤다.
똑똑!
샤워를 마치고 나와 책을 읽을까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이미 밤늦은 시간. 매니저도 이미 퇴근해서 문을 닫아두고 있었다.
“저예요.”
저가 누군데?
하지만 아름다운 여자 목소리에 문을 안 열어줄 수가 없었다.
문을 여니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쓴 여자가 주변을 살피며 서 있다.
“누구…….”
내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이미 들어와 스스로 문을 닫아 버리는 정체불명의 여자.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겠다.
딱 봐도 연예인. 저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더 잘 알아볼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네요.”
날 아는 사람 같은데 목소리만으론 도대체 누군지 짐작이 안 된다.
“응, 덕분에. 이쪽으로 앉아.”
가장 무난한 대답을 하고 윤승호의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 본다.
하지만 찾기 전에 그녀가 먼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는다.
‘아! SFS(Seven Fairys:일곱 명의 요정)의 은진이다.’
SFS는 윤승호와 같은 소속사의 걸 그룹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그룹이었다.
그리고 은진은 윤승호가 사고 나기 전에 찝쩍대던 여자들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병실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그의 찝쩍댐이 통했다는 것이다.
은진은 스케줄이 끝나고 바로 왔는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요정과 같이 예쁘고 깜찍했다.
“흠, 마실 거 뭐 줄까?”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을 자신이 없어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물었다.
“물 있으면 주세요.”
“자, 여기. 그런데 스케줄 끝나고 바로 온 거야?”
“네, 숙소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어요. 전부터 계속 병문안을 오고 싶었는데 틈이 안 났어요. 미안해요, 오빠.”
TV에서 볼 때보다 몇 배 예뻐 보이는 얼굴로 미안하다고 하는데 애간장을 녹인다.
“전혀! 신경 쓰지 마. 지금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
진심이 나와 버린다.
“휴∼ 다행이네요.”
왜 연예인, 연예인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작은 머리에 오밀조밀한 얼굴.
보통 화장을 지우면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아주 반짝반짝거린다.
평소라면 바로 점핑을 시도했겠지만 차마 눈앞에 있는 귀여운 아가씨에게는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요? 공연 중에 춤추다가 앞으로 철퍼덕하고 넘어졌다니까요. 애써 일어나 모른 척하며 계속 췄는데 앞에 있는 관객들이 얼마나 웃는지 부끄러워 혼났다니까요.”
“하하하하!”
“웃지 말아요.”
정말이지 유쾌한 아가씨다.
‘철퍼덕’을 말할 때 행동까지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에 난 한참을 웃었다.
나도 윤승호의 기억 중 그녀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을 말했다.
“나도 그룹 활동할 때 비슷한 일을 겪었어. 다들 왼쪽으로 가는데 나만 오른쪽으로 가는 거야. 순간 멍해지더라고 그때부터 안무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노래하는 내내 다른 친구들 동작을 보며 따라하느라 반 박자씩 늦었다니까. 그래서 한동안 내 별명이 박치었잖아.”
“아! 그거 저도 봤어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었잖아요. 호호호!”
“맞아. 그 때문에 한동안 안무 연습할 때마다 엄청 놀림받았다니까. 하하하!”
난 원래 수다를 싫어했다.
어릴 때부터 주변 환경의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성격도 약간 내성적이었다.
하지만, 8년간의 어둠은 나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안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누군가와 얘기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눈앞에 예쁜 아가씨를 두고 침대에 눕힐 생각보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