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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1권(16화)
8. 타인으로 살아가기(3)


팬들이 보내준 과자를 같이 먹어가며 한참을 얘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오빠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헉! 벌써 12시가 넘었잖아. 미안!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가 온 지도 2시간이 넘었다. 난 서둘러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택시 타고 가서 오빠한테 꼭 전화해. 아님 걱정 되서 내가 못 자거든.”
“괜찮아요. 효미 언니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래? 다행이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그리고 오늘 정말 고마워. 퇴원하고 다음에 한턱 쏠게.”
“네! 호호호!”
난 그녀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내 행동은 은진의 손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돌아섰다.
“오늘 오빠랑 얘기를 해 보니 오빠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오빠의 제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그러니 빨리 퇴원하세요.”
응? 윤승호가 했던 제안?
난 은진과 관련된 기억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이건 오빠가 빨리 나으라는 뜻에서 주는 병문안 선물이에요.”
“…….”
은은한 숨결과 함께 다가오는 입술을 난 거부할 수 없었다.
병문안 선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난 선물을 거절할 정도로 강한 남자는 아니었다.
“으응∼”
한참 달콤한 키스에 매달리다 은진의 비음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입술을 뗐다.
주책스러운 손 같으니라고.
주인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녀의 상체를 더듬고 있었다.
정말이다. 이건 본능이다.
혹 의심스러운 사람 있으면 남자 친구에게 물어봐라.
“……갈게요.”
“으, 응. 조심히 들어가.”
붉게 상기된 얼굴.
그리고 방금 전까지 그녀의 입술에 있었던 립스틱은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문을 열고 후다닥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아본다.
문을 다시 잠그고 본능에 충실했던 내 오른손을 바라본다.
손가락은 방금 전에 느꼈던 크기만큼 적당히 구부러져 있다.
아무래도 연예계 복귀를 신중히 고려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윤승호 이놈은 은진에게 무슨 제안을 한 거지?
…….
아무래도 연예계 복귀는 반드시 해야겠다.

***

아직 환자였기에 특별히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해야 할 일은 없었지만 병문안을 오는 이들이 꽤 있었다.
개중 연예인들도 꽤 있었는데 은진과 같은 여자 연예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선도법과 선도술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찾아오는 이들의 기억을 읽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똑똑!
‘또 다른 손님인가?’
“누구세요?”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신미향의 목소리다.
“들어오세요.”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신미향은 예전의 곰이 아니었다.
이제는 잘 빠진 여우라고 해야 할까?
약병에 주사기를 꽂아 쭈욱 뽑더니 안에 들어간 공기 방울을 없애려고 손가락으로 몇 번 튕긴다.
난 오른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엉덩이 주사인데요.”
난 단번에 신미향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너 지안이지?”
“아닌데요. 어서 바지 내려요.”
간만에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바지 내리라니 야하기 그지없는 간호사다.
“그동안 뭐했기에 이제야 나타난 거야?”
난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흥! 속은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맞은편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를 입에 넣더니 우물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래 톱스타로 지내는 생활은 어때?”
“별다를 것 없어. 대신 꽤 재밌는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더라고.”
“좋았겠네?”
“비디오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물론, 거짓말이다.
비디오와 비교할 수 없는 스릴감과 마치 내가 겪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훗! 여전히 거짓말은 서툴러.”
“거, 거짓말 아냐!”
“알았어. 그렇다고 믿어주지. 그런데, 뭐하고 지냈어?”
“선도법으로는 내 육체와 연결할 방법을 못 찾겠더라고. 그래서 선도술 연습을 하고 있었어. 나머지 시간은 책을 주로 읽었고.”
“판타지 소설?”
“응, 재밌잖아. 혹시 단서가 있을 수도 있고.”
“핑계도 좋다. 앞으로 윤승호로 생활하려면 다른 책 좀 읽어야 해.”
“네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넌 어떻게 지냈어?”
지안은 테스트한다고 지난주에 나간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했다.
“별거 없어. 집 한 채 사고 쇼핑 좀 했지.”
참 쇼핑 좋아한다.
그리고 집 한 채 산 걸 마치 구두 한 켤레 골랐다는 듯이 말하다니.
“그런 표정 짓지 마. 니 돈 사용한 거 아냐.”
“어라, 이거 서운한 걸. 우리 사이에 네 돈 내 돈이 있었던가?”
“그래? 말은 고맙지만 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러니 정확한 게 좋아. 병원 이사장의 남은 비자금을 꿀꺽했어.”
“하하! 이사장 억울해서 죽으려고 하겠다.”
“호호호! 아마 괜찮을 걸. 내가 비자금과 관련된 기억을 지워 버렸거든.”
이사장의 비자금을 어떻게 꿀꺽했는지 재미있게 얘기한 지안은 묻지도 않았는데 지난 일주일간 뭘 했는지 시시콜콜 말하기 시작했다.
꽤 단순한 얘기를 마치 엄청난 일을 겪은 것처럼 말하는 지안을 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참, 간호사의 기억 중에 네 방에서 후다닥 뛰쳐나가던 여자애를 봤는데, 누구야?”
“으, 응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 하면 말이지…….”
정말이지 다양한 책을 읽어야겠다.
딱히 변명이 안 떠오른다.
“걔 SFS의 은진이지?”
“어, 어. 근데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윤승호의 기억을 모두 읽었잖아. 간호사의 기억과 비교해 보니 누군지 딱 나오던데?”
마치 바람 피우다 걸린 사람처럼 당황스럽다.
“뭐했어?”
“뭐, 뭘 해? 그냥 얘기만 나눴어. 스케줄 끝나자마자 왔는데 늦은 시간이라…… 자, 잠깐 얘기만 하다가 갔어.”
왜 이렇게 말이 더듬어지냐?
정말 정직하게 살아온 삶이 원망스럽다.
“후후∼ 역시 남자들이란…….”
단순하다? 늑대다? 바람둥이다?
뒷말을 듣고 싶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바보야! 뭐 좀 하면 어때? 너도 혈기왕성한 남자 아냐? 설마 지금까지…….”
움찔!
거의 본능적인 움찔거림이다.
고등학교 시절 총각(?)이냐 아니냐로 얼마나 서로 자랑질을 해댔던가.
그때 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 트라우마가 이럴 때 나타나다니.
“그랬구나아∼ 그 흔치 않다던 희귀 동물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되다니.”
이런 건방진 것 같으니라고.
감히 내 어깨를 두드리다니.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말로 뱉지는 못했다.
“금아, 남자든 여자든 경험이 많은 게 좋아.”
경험? 역시 아줌마들은…….
“쓰으∼ 연애 경험 말이야! 많은 경험을 해야 그만큼 이성에게 잘해줄 수 있다고 난 생각하거든. 그러니 앞으로 많이 사귀고 상처도 입고 상처도 입히고 해 봐.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줄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런 지안의 태도에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친구 사이이지만 약간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데……
지안은 날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를 알기에 내 마음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지안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았다.


9. 경험 쌓기(1)


내 나이 29세. 하지만 여전히 정신 상태는 스물한 살 때 그대로다.
물론, 8년간 남들이 못하는 독특한 경험을 체험하고 있지만 말이다.
경험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으로 나눌 수 있다.
직접경험이야 내가 직접 겪은 일을 말하고 간접경험은 책이나 동영상,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남의 기억을 읽은 걸 곱씹을 땐 과연 그것이 직접경험이냐 간접경험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간접경험이지. 네가 직접 겪은 게 아니잖아.”
지안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하지만 간접경험이라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물론, 직접경험이라기에는 네가 기억을 바라볼 때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물론 주관적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그 짜릿함이란…… 험!
그때가 언제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겨 본다.
선도법과 선도술을 행할 때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점핑을 하며 얻은 다양한 기억들을 재생해 보고 있다.
연예인이 되어 보기도 하고, 나상열이란 깡패가 되어 보기도 했으며, 과일 장수 아저씨가 되어 과일도 팔아본다.
“더! 더…… 아야!”
한참 기억을 체험하고 있는데 누군가 머리를 때리는 아픔에 깨어난다.
“간접경험을 해 보라고 했더니 그런 경험만 하고 있냐?”
“아냐! 이삿짐 아저씨가 장롱 설치하는 기억이야.”
“그러니? 미안.”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는 백윤희의 탈을 쓴 지안.
물론, 난 이삿짐 아저씨에게 점핑을 한 적이 없다.
대신 엄청난 사기꾼에게 점핑한 적은 있었다.
경험은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어?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톱스타 윤승호는 여전히 환자야. 밤에도 간호사들은 왔다 갔다 해야 한다고. 그렇다고 자는 사람 깨울 수 없으니 이렇게 하는 거야.”
지안은 내 질문에 열쇠를 흔들며 설명한다.
“그건 그렇고, 이 밤에 어디 가려고?”
“응, 오늘부터 직접경험을 체험하러 가자고.”
“나랑?”
“그럼, 당연하지. 난 밤 문화에도 꽤 경험이 많아. 넌 없잖아?”
“…….”
‘그렇게 확신하듯이 말하지 마!’라고 하고 싶지만 진실이니 딱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역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윤승호의 몸으로 나갈 수 없잖아?”
“괜찮아, 내가 백윤희와 퇴근할 간호사를 같이 가자고 잡아뒀어. 들어가서 끝에 부분의 기억만 지우면 될 거야.”
“좋아!”
난 백윤희가 불러 들어오는 간호사에게 점핑을 했다.
그리고 문밖에 ‘절대 깨우지 마세요.’란 종이를 붙이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원 근처에서 점핑 대상자들을 살펴본다.
“쟤네들 어때?”
난 꽤 괜찮아 보이는 남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기만 화려해 보일 뿐이야. 남자가 신고 있는 신발도 가짜. 여자가 들고 있는 백(Bag)도 가짜.”
점핑을 하다 보면 대상자를 고를 때도 빈부의 격차를 최대한 살펴보게 된다.
호주머니에 몇 천 원밖에 없는 대상에게 점핑을 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체에도 호주머니가 있다면 카드나 현금을 들고 다니면 될 텐데 하고 쓸데없는 생각도 자주 한다.
지안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대상자를 물색하고 있다.
“쟤네들은?”
“패스!”
“왜? 내 눈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점핑해 보고 와.”
내가 찜한 상대를 계속 거절하는 지안.
난 간호사를 잠깐 붙잡아 두라고 말한 뒤 내가 찜한 상대에게로 점핑을 했다.
그리고 기억을 읽고는 다시 간호사에게로 돌아왔다.
“어때?”
“쩝! 가난한 대학생 커플이었어. 데이트비용이라도 보태주고 싶었어.”
역시 경험이란 이래서 중요한가 보다.
“저기 미용실에서 나오는 커플 보이지?”
“응.”
“저들에게 점핑해.”
아까 내가 봤던 애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지안을 믿고 남자에게 점핑을 했다. 이질감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남자의 기억이 흘러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