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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1권(19화)
10. 놈은 토끼였다(2)
“처음 정신을 잃은 동네가 어디였죠?”
차영호는 녹화 영상의 카피본을 받고 희희낙락한 백효준에게 물었다.
“거기가 ○○동이었어요. 대학가 근처에 걔네 집이 있거든요.”
“제 동생에게 그런 짓을 한 범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다니 고마워요.”
“저도 제 누명을 벗을 영상을 찾았으니 됐어요.”
민주에게 전화를 하는 백효준을 뒤로하고 차영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상부에 정식으로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느 정도 확신은 하지만 물증도 없이 말했다가 또다시 자신의 사부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방법이 좋겠군.”
택시를 타고 이남호에게로 돌아가던 차영호는 좋은 생각났다.
아르바이트생들을 이용해 그 동네에 깜박 정신을 잃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을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약간의 사은품과 아르바이트생 고용 비용이 들겠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선 그 정도 투자는 할 만했다.
우연히 지나다 정신 이동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 볼 작정이었다.
***
―……식물인간이 되었던 배우이자 가수인 윤승호 씨는 정신을 차렸지만 간혹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증상으로 연예계 복귀가 사실상 무기한 연기가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의 말씀을 들어보시죠.
―윤승호 환자의 경우는 극히 희박한 경우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고,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 일주일이 지난 후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틀 전 다시 12시간 정신을 잃고 일어났기에 지금으로서는 딱히 설명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몇 가지 검사와 테스트를 진행한 후에…….
―이에 소속사는 윤승호 씨의 건강이 먼저라며…… 삐리링!
난 TV를 껐다. 다행히도 나의 연기가 먹힌 것이다.
사실 연기랄 것도 없었다.
그냥 의사 앞에서 윤승호의 몸에서 내 육체로 돌아갔을 뿐이다.
덕분에 의사 책상에 부딪치며 코를 다쳤지만 말이다.
“승호야, 걱정 마. 잘될 거야.”
매니저 배동수가 기운 내라는 듯 말한다.
“괜찮아, 형. 정신 차린 것만 해도 만족해.”
난 병원에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물론, 조금 고민이 되긴 한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나저나 저것들은 다 뭐예요?”
병실 한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선물 상자들에 대해 물었다.
요 며칠 계속해서 쌓이고 있어 처치 곤란한 지경이다.
“팬들이 보낸 거야. 오늘이 빼빼로 데이잖아. 아마 오늘 더 많이 쌓일 걸.”
윤승호는 참 행복한 놈이었다.
무슨 날만 되면 팬들이 보내는 각종 선물들과 편지들이 한 트럭은 되었다.
각종 인형과 장신구는 기본.
명품 지갑과 옷까지 그의 팬들의 선물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치울까?”
그런데, 윤승호는 그걸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괜찮다 싶은 걸 제외하곤 다 쓰레기통행이었다.
이해는 한다.
아마 그가 지금까지 받은 인형만 모았어도 그가 살던 집은 인형으로 가득 찰 정도로 많이 받았으니까.
하지만 좋은 곳에 쓸 수도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 고아원에 있을 땐 그런 인형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형, 크리스마스카드하고 펜 좀 사와.”
“뭐하려고?”
“병원에서 할 일도 없잖아. 팬들한테 편지 보내기는 뭐하고 간단한 카드나 보내 보려고.”
“그냥 쉬어. 지금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역시 배동수는 내 변화에 놀라는 표정이다.
요즘 꽤나 저런 표정을 자주 짓는다.
“얼른요.”
“아, 알았어.”
후다닥 뛰어가는 그. 난 옆에 쌓인 선물 박스를 보며 괜한 짓을 하는 거 아닌가 싶어진다.
하지만 뭔가 할 것이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했다.
지안은 ‘그 새끼’를 만난 이후로 복수 계획을 앞당기려는지 두문불출이었고, 난 윤승호의 몸을 이용해 영체와 육체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선도술과 선도법도 하루 이틀이지 지루한 시간엔 사람들에게서 읽은 기억들을 내가 겪는 것처럼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가질수록 스스로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여러 사람이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
오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굳이 팬들에게 카드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인터넷 펜클럽에 들어가 인사말을 남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점핑한 사람 중 몇 명이 직접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게 친필 편지를 받고 직접 만났던 기억을 느껴보면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형, 일단 선물 박스부터 하자.”
박스 채 사온 카드 중 한 장을 펼쳐 놓고 선물을 개봉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기다란 과자류가 쏟아진다. 과자는 그중 하나만 남겨두고 다시 박스 안으로.
난 편지를 읽었다.
구구절절 아픈 윤승호를 위로하는 내용과 쾌유를 바란다는 내용.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 나왔다.
편지 봉투와 편지지에 쏟은 정성이 보인다.
To. 유지희
편지와 선물 잘 받았어요. 지희 양의 글을 보니 힘이 나네요. 빨리 나아 여러분을 볼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과자는 너무 많아 다 먹으면 뚱뚱해질 것 같아 조금만 먹을게요.
그럼, 남은 한 해 잘 보내고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해요.
지희 양에게 힘은 얻은 윤승호가
간단한 내용을 적고 몇 번 사인을 연습한 후 카드에 사인을 했다.
“형은 주소 적어.”
“주소? 알았다.”
박스 나르랴 주소 적으랴 나보다 바쁜 매니저.
하지만 월급을 주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 당연하니 신경 쓰지 않았다.
짧게 적는 카드라 선물 박스들은 빠르게 처리되어 갔다.
“형, 저기 한쪽으로 치워둔 건 뭐야?”
“주소 안 적힌 것들과 약간 수상한 것들. 저건 나중에 밖에서 내가 열어보고 줄게.”
팬들도 편지와 선물을 보내지만 안티 팬들도 꽤 많이 보낸다.
윤승호의 기억을 살펴보면 가관이다.
선물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그중 특히 많은 것이 윤승호의 사진을 괴상하게 조작해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정도면 그냥 애교로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크크크! 얜 엄청 지능적이네.”
“왜?”
“중간 중간에 말만 싹 바꿔서 은연중에 죽어 버리지 왜 살았냐고 써져 있어. 하하하!”
“웃음이 나오냐?”
“그럼, 울어? 하하하하!”
편지 읽기를 잘했다.
그들의 진심이 느껴져 있는 글들이 많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승호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이 아팠고, 배동수가 퇴근해 내가 할 일이 많아졌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카드를 쓸 수 있었다.
***
꿈을 꾼다.
선도법을 행하다 어느새 잠이 든 걸까?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지안과 스카이라운지에서 봤던 서울의 야경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어린 시절 고아원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만큼 아름답다.
난 그 아름다움을 구경하며 날아다닌다.
꿈이라기엔 너무 현실감이 넘친다.
이렇게 생각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더 높이, 더 높이.
서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한눈에 보인다.
‘더 높이 올라가 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려 본다. 그렇게 하긴 싫다는 간접적인 나의 표현이었다.
난 이제 돌아가고 싶었다.
돌연 느껴지는 따뜻함들. 그 수가 수백은 되어 보인다.
난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팟!
방금 전까지 보이던 대한민국은 보이지 않고 어떤 방이었다.
‘응? 여긴 내가 만든 곳 같은데?’
그랬다. 내가 점핑 상대에게 만들어 뒀던 방이었다.
―당신은 언제나 행복하답니다.
4면의 벽에 붙어 있는 문장은 한 문장이었다.
어라? 내가 이런 글을 누구에게 적어뒀었지?
나의 의문에 기억들이 들어온다.
‘과일 장수 아저씨!’
이사장의 별장에서 깡패들과 만났을 때 잠시 몸을 이용했던 분이다.
그때, 사과 값과 매 값(?)으로 500만 원을 남기고 갔었는데, 그 돈은 생활비와 애들 교육비에 사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쁜 건 내가 남겨둔 글처럼 정말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 것이다.
‘꿈이라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하하!’
재밌는 꿈이다.
이 아저씨를 보니 그때 그 깡패들은 어디 있는지 보고 싶다.
뭔가 간질거리는 느낌. 무작정 몸을 맡겨본다.
팟!
‘헉! 깜짝이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방 한가운데 내가 만들어 놓은 귀신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다.
내가 만든 귀신에 내가 놀라다니.
‘착하게 살자.’라는 글을 보며 기억을 읽어 들였다.
‘나상열이었군.’
나상열과 그 일당은 요즘 그나마 일반인들을 괴롭히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귀신 때문에 꽤나 고생하는 모양이다.
난 나상열의 정신세계에 있는 귀신을 없애고 새로운 문장을 추가했다.
―태어날 자녀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말자.
이 글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하지만 잘되길 바라며 귀신을 없애러 다섯 명 중 한 명에게로 점핑을 한다.
‘이게 정말 꿈일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생기는 의문.
내가 정신세계에 방을 만들어둔 이들과 연결 고리가 생겨 자유롭게 점핑을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난 다시 내 육체로 돌아왔다. 정확히 13번째 사람에게 점핑을 하다가 당기는 힘을 느끼고 돌아온 것이다.
난 다시 선도법을 행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점핑이 가능하다면 난 윤승호로 살아갈 수도 있고 내 육체와 영체를 연결만 하면 내 몸으로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니, 내가 원하면 미국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묘한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선도법을 충분히 한 후 원거리 점핑을 시도해 본다.
하지만, 꿈이라 생각하던 때처럼 대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꿈인가?’
결국 실패하고 지안과 내가 있는 방의 TV 켜지는 소리에 유체 이탈을 했다.
지금 시간 오전 8시.
30분 뒤에 매니저인 배동수가 올 것이라 윤승호에게 점핑을 해야 한다.
가만히 지안을 바라본다.
오늘도 역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냥 윤승호에게 갈까 하는데 그녀의 백회 부근 홀에서 영체가 스윽 나온다.
‘요즘 어떻게 된 게 얼굴 보기도 힘드냐?’
약간의 서운함을 누르고 장난스레 말을 건넨다.
‘미안, 잘 지내고 있지?’
‘쳇! 친구만 아니면…….’
그녀를 봐서 기뻤지만 말은 계속 퉁명스럽게 나온다.
‘그래, 친구니까 봐줘라. 그리고 곧 준비가 끝나니…… 끝나고 놀러 다니자.’
지안은 표정의 변화 없이 말한다.
뭐, 복수를 한다고 하니 용서를 해줄까?
‘그나저나 어젯밤 재밌는 일이 있었어.’
‘무슨 일?’
그녀는 내 말에 관심을 보인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는데 원거리 점핑이 가능했어.’
‘원거리 점핑?’
‘응, 편의상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점핑하는 걸 그런 식으로 부른 것뿐이야.’
‘그런데?’
‘내가 정신세계에 방 만드는 거 알지?’
‘그야 나도 몇 명한테는 만들어뒀지.’
난 마치 자랑스러운 발견한 사람처럼 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아직. 내 몸으로 돌아와 열심히 점핑을 해 보려 했는데 쉽지 않네.’
‘음, 잘됐으면 좋겠다. 그럼, 너도 윤승호로 잘 지낼 수 있잖아.’
‘응…….’
나도 참 이기적인 놈이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
난 윤승호의 몸을 차지했는데 지안에 대해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나 자신에 대해 실망감이 든다.
‘지안아, 이번에 원거리 점핑이 가능해지면 너에게 맞는 몸도 찾아보자.’
분명 윤승호처럼 영체가 사라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거리 점핑이 가능하면 한 번만 지안이 수고하면 그 육체를 움직일 수 있을 터.
‘으, 응. 그래.’
‘미안, 그동안 널 생각 못했어.’
‘괜찮아. 나도 생각 못했던 일인데. 고마워.’
지안은 환하게 웃는다.
‘에엑! 시간이 다 됐다. 난 윤승호에게로 갈게. 혹시 어디 가더라도 아침엔 꼭 와. 내가 원거리 점핑이 가능하면 바로 가르쳐 줄게.’
‘알았어. 즐거운 하루 보내.’
난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벽을 뚫고 윤승호 방으로 가 점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