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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프 대제 1권(12화)
제5장 에린 폰 티르피츠, 아르니아 공주(1)


알렉산더는 크리스토프를 따라 알현실로 갔다. 알현실은 외국 손님이 올 때만 쓰는 방으로 내부 시설은 대전과 비슷하지만 왕좌의 단상이 낮아 사신들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알렉산더는 아직 정식 왕이 아니었기에 왕좌에 앉을 수 없었다. 대신 단상 중앙의 붉은 카펫에 서고 대신들은 좌우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사신은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어?”
열린 문에서 흰색 제복을 입은 기사 2명과 여자가 들어왔는데, 기사들은 여자의 좌우에 서서 아르니아 왕국기인 흰색 바탕에 하늘색으로 눈꽃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같이 들어온 여자 때문에 대신들, 심지어 크리스토프, 막스, 알렉산더까지 입을 딱 벌렸다.
은색 머리를 소유한 그녀의 하늘색 눈은 크고, 코는 오똑 하고 목이 시원스럽게 적당히 길며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피부 또한 잡티 없는 부드러운 흰 살결로 유약을 바른 도자기의 광택처럼 윤택했다.
게다가 양 볼에 살짝 도는 홍조는 물론이고 살짝 도톰한 입술은 선천적으로 핑크 빛이 돌아 핑크 색 루즈를 바른 것 같아 얼굴 화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 은색의 눈썹은 반달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었는데 관리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제일 특이한 곳, 그녀의 귀였다. 엘프와 혼혈인 아르니아 왕족들은 엘프들처럼 귀가 길쭉하다고 했는데 그녀 또한 길쭉했다.
책으로만 듣다가 실제로 보니 알렉산더는 그녀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와 수행원들은 눈을 내리깔면서 알현실로 들어왔다. 이는 외교 관례 중 하나였다.
“아르니아 왕국의 장녀인 에린 폰 티르피츠가 인사드립니다.”
무심한 눈빛으로 매우 지루하다는 듯이 또는 사무를 보는 공무원 같은 억양으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도도하면서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꿀꺽.
대신 중 하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알렉산드로프 폰 랑스도르프 후계자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제왕 수업을 통해 외교 관례를 잘 배운 그였다. 왕이 인사에 답하지 않으면 사절단은 절대로 왕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의 말에 사절단이 눈동자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들 역시 알렉산더의 제복에 놀란 눈치였다.
“먼저 선대 국왕 폐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대들이 우리를 언제 신경 썼다고 그런 말을 하지?”
크리스토프가 비꼬며 말했다. 헤르만 공작 또한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재상은 조용히 하세요.”
‘음?’
알렉산더의 말에 크리스토프가 짐짓 놀라며 그를 보았다. 자신을 꾸짖어서 놀랜 것이 아닌 알렉산더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자신 있다는 건가? 좋아, 지켜보도록 하지.’
“사신은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찾아왔나? 단지 선대 국왕 폐하께서 승하하신 것 때문에 온 조문 사절단이 아닐 터, 용건을 간단히 말하도록.”
알렉산더가 말했다.
“제 어머니이신, 에카테리나…….”
“난 용건을 간단히 말하라고 했지. 아르니아 여왕의 이름을 물어본 것이 아니다.”
“큭!”
“풉!”
그 말에 대신들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가렸다.
‘나이스!’
크리스토프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만약 둘만 있었다면 엄지손가락을 들어 줬을 것이다.
헤르만 공작은 눈물을 닦기 위해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에린의 아름다운 얼굴에 힘줄이 잡히고 온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분노로 인한 오라가 살짝 피어올랐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무엄하다 감히 누구 앞에서!”
크리스토프의 기운이 올라오더니 에린의 기운을 감싸 버리고 찍어 눌렀다.
“진정하십시오.”
수행으로 온 기사가 말했다. 마음을 진정시킨 뒤 에린이 입을 열었다.
“……저희 왕국은 귀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왔습니다.”
“동맹?”
“동맹이라니? 난데없이?”
그 말에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조용.”
알렉산더의 말에 대신들이 조용했다.
“무슨 연유로?”
“저희 왕국이 귀국을 도와주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제 제국에게서 벗어나 어엿한 독립국인 것을 아는 이상, 귀국과 동맹을 맺어 제국에게 대항하고자 합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 일리 있는 말이다. 그대의 말이 옳긴 옳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외교사절을 보내는 거지? 선대 국왕 폐하 치세 때도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근데 선대 국왕 폐하께서 돌아가시자마자 보내는 연유가 뭐지?”
“왕국과 왕국이 동맹을 맺으면 신의를 지키기 위해 왕족을 파견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좋게 말해 파견이지 사실은 볼모였다.
“그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우리 왕국에서 볼모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 오라버니는 왕국을 이끌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선대 국왕 폐하께서는 홀몸이셨습니다…….”
“잠깐, 그대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왕족을 파견하는 것이 관례이긴 하지만 왕족이 없다면 고위 귀족의 자제를 파견하기도 한다. 그 핑계는 일리 있는 말이 아니다.”
“아뇨. 확실히 후계자께서 말하시는 대로 귀족을 파견하는 대안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귀국은 자국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왕족이 아니니까 언제든지 배반을 할 수 있으니까요. 왕족이 죽는 것에 비하면 자국의 귀족이 한 명 죽는 것은 손실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대는 지금 동맹을 맺으러 왔다고 했다. 하지만 왕가의 후손은 나 혼자다. 전대 국왕처럼 나 혼자다. 우리 왕국에서는 귀국에 파견할 왕족이 없다.”
“귀국에서 왕족을 파견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뭐?”
알렉산더는 그녀의 의중이 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음?’
크리스토프의 눈에 에린의 양 볼의 홍조가 살짝 더 붉어진 게 보였다. 하지만 지극히 조금 홍조가 더 돈 것인지라 크리스토프 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에카테리나 이년이?! 이년이 설마…….’
“난 여기서 당신께 결혼을 주청합니다.”
쿵!
알렉산더는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겨, 결혼?”
“아국은 귀국과의 왕족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고자 합니다.”
대신들의 술렁거림이 커져 갔다. 이에 막스의 심기만 불편해졌다.
혹시나 있을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방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움직임을 감시해야 하는데 모두들 몸을 움직이며 말을 했기에 전부 다 행동을 감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는 생각에 빠졌다.
‘단지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주를 파견해 정략결혼을 한다?’
그렇기에는 공주의 그릇이 너무 크다.
‘뭔가 있어. 아, 그래. 아르니아 왕국의 왕자 에리히는 에린과 다르게 유약한 성품이라 들었다. 설마, 에카테리나 여왕이 원하는 건 에리히 왕자의 다음 권력 승계를 공고히 하는 것인가?’
에린 공주는 공주라는 직위가 무안하게 15살 때부터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자를 베고 그리고 승리했다. 그렇기에 아르니아 왕국 내에서 에린 공주의 평판이 좋았다. 그리고 에리히 왕자는 20살, 몇 년 만 있으면 여왕에게서 왕위를 선위받을 나이다.
‘그래 그거군, 동맹국을 늘려서 제국과 같이 대항하면서 왕의 다음 승계를 공고히 한다. 일석이조구나. 뭐 우리나라에게도 실은 없고 이득만 있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군.’
알렉산더는 뒷맛이 씁쓸했다.
‘동맹을 거부하면 홀로 제국과 싸워야 하니까……. 제왕학처럼 왕이 희생해야 신민들에게 좋겠지.’
“이 일은 지금 당장 결정하기 어려우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지요. 결정은 내일 아침에 하겠소. 숙소를 마련해 주겠소.”
“네, 그럼 이만.”
에린과 수행원들이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자마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생각을 대신들에게 말했다.

“바로 보셨습니다.”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에카테리나 여왕이 에린 공주를 매우 소중히 여겨서 공주가 사절로 오는 동안 저는 설마 그녀를 정략결혼으로 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정략결혼을 추진하는 이상, 후계자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지금 두 마리 토끼를 위해 그녀를 보낸 것입니다.”
“난 아직 일선에서 집무를 볼 수 없지만 내 결혼 문제이니 오늘만큼은 나서겠소.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 좀 해 주시오.”
알렉산더가 말했다.
“저는 반대이옵니다.”
한스가 나섰다.
“에린 공주는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전장에 나가 냉혹하고 동정심도 없이 적병을 죽인 경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인 무예가 출중한 여자입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폐하를 잠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 다음은 알베르트 백작이 나섰다.
“예부 대신(한스)의 말이 옳습니다. 그녀는 위험한 여자입니다.”
“전 그 반대입니다.”
발터가 나섰다.
“이유가 뭔가?”
“에린 공주는 말 그대로 에카테리나 여왕이 아끼던 인물입니다. 게다가 군사적으로 그녀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입니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가 매우 적고 또한 검의 길에서 상급으로 오른 이는 얼마 없습니다. 물론 거기다 소드 마스터는 더더욱 없습니다. 상급이라는 경지에 올라 소드 마스터의 자질을 보이는 그녀를 보내 정략결혼을 시킬 정도라면 아르니아 왕국의 왕위계승 내분이 심각하다는 소리입니다.”
‘맞는 말이군, 대표적인 사례로 공주인 그녀를 보내는 데 수행하는 귀족도 없이 오직 기사들만 보냈다. 이는 유례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알렉산더가 발터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저는 이를 감히 공주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서라고 추측합니다. 우리가 만약 동맹을 거부하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면 아르니아 왕국은 내분으로 휩싸일 테고 이를 노린 얀텐 제국은 아르니아를 공격해 속국으로 삼거나 제국에 귀속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렇다 된다면 아르니아 왕국 쪽에 배치된 제국군은 우리 아룬 왕국 쪽으로 창을 겨눌지도 모른다.
오토 2세 서거한 지금 그들에게는 전처럼 제국에게 맞설 힘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양국 둘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지금 같은 시국은 본 왕국을 포함 다른 왕국들이 서로 제국을 견제하고 있기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 왕국이 개국하기 이전에는 각 왕국들은 제국군에게 힘에 밀려 숨통이 막힌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본 왕국의 독립 전쟁, 그리고 개국한 이후 본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국이 타 왕국에 있던 병력을 빼돌려 본 왕국의 국경으로 배치한 덕분에 타 왕국들의 숨통이 트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힘의 균형을 이룬 덕분에 연말 행사처럼 각 왕국을 침공하던 제국군이 본 왕국이 개국한 이후 다른 왕국을 침공한 사례가 지금까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 두 왕국이 멸망한다면 다른 왕국들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후계자님, 나라 간의 정략결혼이나 동맹 같은 소소한 것이 아닌 세계의 패권을 결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다. 만약에 궁내부 대신(발터)의 말대로라면 나의 선택으로 나라가 사라지고 전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알렉산더는 등골이 서늘하다는 것을 느꼈다.
“궁내부 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비록 원치 않은 정략결혼이지만, 양국을 위해선 이 결혼과 동맹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허나, 폐하의 안전은…….”
“궁내부 대신의 말대로라면 아르니아의 에카테리나 여왕도 이 점을 알고 있을 것이고 도도한 자신의 딸을 설득해서 보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현명함 덕분에 여왕의 직위에 오른 그녀가 이 점을 모를 리 없습니다. 게다가 에린 공주 또한 군대를 지휘하며 호령할 줄 아는 현명한 여자입니다. 그런 그녀가 바보가 되지 않은 이상 자신의 지지하는 귀족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렇기에 에린 공주는 폐하께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반박을 하려는 헤르만 공작의 말을 한스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끄응.”
헤르만 공작은 반박할 말이 없자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동맹과 함께 결혼을 할 수밖에 없겠군.”
알렉산더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르니아 왕국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으로 하겠다.”
“네.”
그리고 대신들이 물러났다. 이후 알현실은 알렉산더와 크리스토프, 막스만 남았다.
“무슨…….”
“헤르만 공작이 왜 자꾸 방해를 하는지 아냐?”
공석이 아니자마자 크리스토프가 반말을 했다.
“후, 알고말고.”
“뭔데?”
“아르니아의 공주와 결혼을 하면 난 아르니아 왕실의 사위가 되는 것이니까. 안 그래?”
알렉산더의 생각대로라면 만약에 헤르만 공작이나 얀 백작이 왕의 자리를 빼앗으면 아르니아가 가만히 있질 않을 것이다. 사위를 위한다니 시집간 딸은 위한다니 뭐라니 하면서 공격을 해 올 것이다. 아니면 국내 정치에 간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