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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크1권(3화)
Chapter.1 괴짜소년 테리언(3)


프로티나 아카데미는 단순히 프로티나 왕국의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학생들도 적잖게 있던 것이다. 이른바 명문 아카데미라 불리고 있는 곳에 왕국의 공주의 가슴을 만진 사고뭉치 학생이 들어오려 한다면 아카데미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걱정되는 요소가 없지 않아 있었지만 로턴은 괜찮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 말게. 그 녀석은 애초에 이 마을에서부터 평범하게 지내 온 적이 없어. 그리고 그 녀석은 잘 해낼 거야.”
파르카는 탁상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을 마주 잡으며 턱을 괴었다.
“뭐, 저는 로턴 님을 데려갈 수만 있다면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던 파르카는 끝내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로턴 님이 왕궁으로 복귀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프로티나 아카데미 편입에 관해서는 내부 관계자와 어느 정도 상담을 해야 하니 보름 후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파르카는 로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현관을 나섰다.
로턴은 창문 너머로 파르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왕궁으로 복귀라…….’
아무리 생각해도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테리언의 재능이 이런 마을에서 아깝게 썩힐 수는 없다. 그는 좀 더 세상의 빛을 봐야 했고 좀 더 넓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테리언을 아카데미에 보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파르카의 협조가 필요했다.
비록 자신은 그의 친 가족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테리언은 매우 소중한 존재.
물론 그에 대한 이질적인 힘을 연구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난 그 녀석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었으니까.’
테리언에게 자신의 딸의 모습을 보여 줄 때 혹시 눈치 채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나 테리언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딸을 구해준 이후 테리언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아마 딸내미가 그 녀석을 보면 굉장히 반가워하겠군.”
그리고 그동안 테리언을 굳이 다른 가족과 같이 수도에 이동하지 않고 로렌스카 마을에 따로 남겨 둔 이유가 있었다.
‘만약 과거의 테리언과 알고 지낸 자가 있다면 언젠가 로렌스카 마을에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9년이나 기다렸는데도 감감 무소식인 것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찾아오지 못할 것 같군.’

* * *

“가슴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 전진 앞으로!”
“테리언…… 수도에 가서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침묵 마법을 걸어 버리겠어.”
보름이 지났다.
로턴은 수도에 향하기 위한 채비는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원래는 로렌스카 마을에 마련된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해서 간다면 곧장 수도에 당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리언은 마나를 거부하는 특이한 체질 때문에 공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테리언 일행은 60㎞ 가량 떨어진 수도를 직접 가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다 네 탓이다, 테리언.”
“어쩔 수 없는 경우라고, 쳇!”
로턴은 성인 남자 등판 크기만 한 배낭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름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만 선별해서 넣어놨는데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저걸 내가 들었다간 허리가 아작 날 텐데.’
로턴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돌연 잔뜩 볼을 부풀리고 있는 테리언을 불러 세우며 말했다.
“자, 어서 메거라.”
“에엑? 왜 내가 메야 하는데?”
“난 늙어서 이 무거운 가방을 멨다간 허리가 작살날지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파릇파릇한 젊은 피를 가진 네가 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니겠냐?”
시험 삼아 가방을 메려던 테리언은 엄청난 중량을 느끼며 순간 몸을 휘청였다. 그리고는 황당하다는 듯 떡 벌어진 입으로 로턴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나보고 들라는 것이냐’는 듯했다.
하지만 로턴이 다시 품 안에서 로리에의 사진을 보여 주자 테리언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거워 죽겠다는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주인이 훈계를 해서 토라진 강아지가 뼈다귀를 내밀자 곧바로 꼬리를 흔드는 격!
“하하. 얼른 가요, 아저씨! 시간이 금이란 말도 있잖아요.”
정말이지 테리언은 사람 다루기가 쉬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한숨을 쉬던 로턴은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테리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테리언…… 아카데미에 가면 절대 다른 여학생들에게 폐 끼치는 일은 하지 마라. 특히 귀족 아가씨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마.”
“왜?”
“몰라서 물어? 귀족 아가씨들은 대체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에도 엄청 화를 낼수 있단 말이다. 만약 네가 가슴 만져도 되냐고 묻기라도 했다가는 그녀들이 널 성추행 범으로 몰 수도 있어.”
“괜찮아, 그런 것쯤은 나도 마을 내에서 요령을 깨우쳤으니까 걱정 말라고.”
테리언은 자신만만한 듯 가슴을 떵떵 치며 대답했다.
그러자 로턴이 돌연 정색하더니 테리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지간해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부분에선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것은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는 것은 좋지 않아. 세상은 결코 네가 생각하는 대로 호락호락 하지 않다. 물론 너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철학에 대해선 딴죽을 걸고 싶진 않다만 적어도 자신의 명을 단축시킬 정도의 미련한 짓은 하지 마라. 저번의 레이시라 공주님 사건 때도 네가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올까 봐 내가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알기나 하냐?”
실제로 로턴도 테리언이 그 사건을 벌일 때 구경하던 마을 주민들 틈 사이에 껴 있었다. 특히 테리언이 왕녀기사단에 의해 제압당했을 땐 무슨 사단이 일어날까 싶었다.
다행히, 정말 다행이도 레이시라가 의외의 반응을 보여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로턴은 당장이라도 난입해 난장판을 벌였을지도 몰랐다.
테리언도 그때의 일을 떠올렸는지 두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레이시라의 가슴을 만진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왕녀기사단에 의해 제압당했을 땐 테리언 역시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간파한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녀기사단 역시 처음에는 그런 자신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으나 자세를 바로 잡으니 순식간에 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결과가 좋으면 괜찮잖아.”
“글쎄.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는 좋을지 몰라도 후폭풍이 올지 안 올지는 아무도 몰라. 행여나 네가 레이시라 공주님의 가슴을 만진 것으로 인해 왕국 측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그래도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학생의 신분으로 인해 직접적인 위협은 가하지 않을 거다. 솔직히 말해 아카데미를 보내고 싶은 이유가 그런 이유이기도 하고.”
“쳇…… 그래도 그 아카데미도 결국엔 왕국의 홈그라운드 아냐? 죽을 장소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바에 차라리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마을에서 죽치고 지내는 게……”
……로턴이 품 안에서 로리에의 사진을 꺼내 들자 테리언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주 착착 맞는 거 같아. 이거 아카데미가 기다려지는 걸? 하하.”
“어련하시겠어. 어서 출발하자. 갈 길은 멀다.”
마을을 떠날 채비가 완료되자 몇몇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배웅해 주기 위해 마을 입구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이 테리언의 괴짜 성격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주자 테리언도 씨익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테리언 수도에 갔다 오면 꼭 가슴 만진 경험담 얘기해 줘야 돼, 알겠지?”
“물론!”
테리언은 엄지를 추켜세워 보이며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말 쓸데없는 상황에서 저런 안 어울리는 표정을 짓다니 우스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로턴은 못 말리겠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사고만 안 쳤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테리언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 틀림없이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리라. 누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로턴은 직감적으로 그리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바꿀 의향은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테리언의 존재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고 말았어. 프로티나 왕국 최고의 기사인 카르반 남작과 왕녀기사단에게 한 방 먹인 소년의 등장. 인재에 목말라 있는 여러 존재들은 틀림없이 테리언에 대해 알아보려 할 거야.’
단순한 과민반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현란한 움직임하며, 마나를 거부하는 체질도 분명히 언젠가는 세상 밖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그전에 테리언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키워야만 해.’
단순히 테리언의 재능을 키워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로리에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 어차피 테리언을 아카데미에 보내면 나도 수도에 당분간 머물러야 하니 그동안만이라도 왕궁마법단에 복귀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계기가 다소 좋지 않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번 계기로 인해 가족과 오랫동안 지낼 수 있고 테리언의 재능을 갈고 닦을 여건만 있다면 어느 정도 페널티는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 * *

테리언과 로턴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 앞에 서 있는 거구의 여자과 대치하고 있었다.
“꺄하하하! 너희들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볼까?”
거구의 여자은 깔깔거리며 웃더니 준비 자세도 없이 곧바로 테리언과 로턴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거구의 여자가 서 있던 땅바닥이 움푹 파였다.
로턴은 순간이동을 통해 물러나는 반면 테리언은 특유의 몸놀림으로 각각 양 갈래로 피했다.
“으악! 십년감수할 뻔했네!”
“크윽.”
이런 상황에 마주하게 된 연유는 간단했다.
결국 공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수 없게 된 테리언 일행은 말 두 필을 구하고 본격적으로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평소에 로턴은 공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하다 보니 직접 수도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오로지 지도에 의지하며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좀 더 빨리 가기 위해 정규 루트를 버리고 일직선으로 가는 루트를 골랐다가 끝내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거구의 여자와 대치하게 된 것은 길을 잃고 방황하던 중 재수 없게 만나게 된 경우였다.
“아저씨. 저 여자, 인간 맞나요?”
“일단은 그런 거 같다만.”
거구의 여성은 딱 봐도 키가 2m가 훌쩍 넘었다. 몸집으로만 봐도 대충 150㎏은 되었을까.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닌 온 몸이 군더더기 없는 근육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단순히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풍압만으로도 온몸이 날아갈 것 같은 무서운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테리언은 로턴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게 깔더니 질책하듯이 말했다.
“그러게 왜 일로 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이 길로 가야 도착 시간이 사흘은 단축된단 말이야.”
“성질 급한 아저씨 같으니라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로턴은 콧방귀를 뀌며 한 손으로 가슴을 텅텅 치며 대답했다.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 이래 봬도 이 아저씨는 프로티나 왕국에서 이름 난 마법사라고.”
테리언도 로턴이 수준급의 마법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마을에 몬스터가 침입해 난동을 부렸을 때 자경단과 함께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몬스터를 격퇴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