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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크1권(11화)
Chapter.4 오해(2)
* * *
다음 날 아침.
리엘로트는 곧장 기숙사를 나섰다.
다행히 오늘은 자율 등교인 날이었기에 학생 교사로 향하지 않고 곧장 손님 숙소로 향했다.
원래라면 자율 등교인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그녀는 곧장 학생 교사로 향했을 터였다.
학교 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부서인 만큼 선도부에게 있어서 휴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손님 숙소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클레첼에게 사정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멋대로 행동한 테리언을 상당히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갈며 숙소에 찾아간 리엘로트는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테리언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본래 목적 중 하나인, 피해자이자 중요한 참고인인 클레첼이 깨어 있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클레첼이 머무르는 숙소 안에 들어선 리엘로트는 그녀가 차를 대접해 주자 한 모금 마시며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테리언 관련으로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요?”
“네.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소개를 못했네요. 저는 이 프로티나 아카데미에서 선도부장을 맡고 있는 리엘로트 아르시아라고 합니다.”
“혹시 테리언이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반대편 의자에 마주 앉은 클레첼은 긴장 어린 눈빛으로 리엘로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로턴은 테리언이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니 시시각각 주시하라는 말을 전했었다.
어제는 갑자기 긴장이 풀린 나머지 잠에 들어 버렸기에 그 후에는 뭔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이 잠든 그 사이에 테리언이 무슨 짓이라도 벌였단 말인가?
그러나 클레첼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놀란 것은 리엘로트였다.
분명 자신들이 테리언의 방에 돌입했을 때 테리언은 마치 강제로 클레첼의 몸을 만지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그때 클레첼은 상당히 식은땀을 흘리며 굉장히 힘들어 보였으니까 말이다.
리엘로트는 그 모습이 클레첼이 저항하려다가 지친 나머지 자포자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클레첼은 테리언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설마 어제 그 남자가 진술했던 말이 사실이었나?’
리엘로트는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클레첼을 향해 물었다.
“그쪽에서 대답하기 꺼려지는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젯밤 그 남자가 당신의 가슴을 만지던 행위를 저희가 목격해서 말이에요. 그 남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는데 정말 무슨 이유가 있어서였나요?”
“테리언에게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네. 하지만 워낙 근거 없는 말만 늘어놓았는지라 믿을 수가 없어서요. 게다가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니 뭐니 하는 변명을 하더군요.”
“아…….”
그제야 클레첼은 리엘로트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클레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를 하고 계셨나 보군요. 다소 믿겨지지 않으시겠지만 테리언이 한 말은 전부 사실일거예요.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분명한 건 그때 테리언이 제 몸을 만지지 않았더라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당신을 치료하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는 건가요? 혹시 그 남자가 당신에게 협박을 해서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제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러자 클레첼이 고개를 젓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엘로트 양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만.”
“아직 제 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지금 이런 상황에 말씀 드릴 타이밍은 아닌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네요. 상황 설명을 위해서라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는 클레첼 가르바드라고 해요.”
“가르바드라면?”
리엘로트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는지 한차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어떤 가문인지 깨닫고서는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클레첼을 바라보았다.
클레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 하니 가르바드 가문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르겠네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보여 드릴 수가 없어요. 제가 왜 테리언의 손에 만져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여 드리려면 무엇보다 테리언이 필요하거든요. 리엘로트 양도 두 눈으로 직접 이유를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신 거겠죠?”
“그렇죠.”
“아직 테리언아 일어나지 않았으니 잠시 차라도 마시면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귀족 분에게 이런 자리는 조금 누추할지 모르겠지만요.”
“괜찮아요. 부담스러워하실 것 없어요. 이 프로티나 아카데미 내에선 귀족이나 평민이나 동등한 위치랍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대답한 클레첼은 리엘로트가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돌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프로티나 아카데미 내에서 누구나 평등한 존재라면 자신의 친오빠인 가르윈이 그렇게 절망적으로 편지를 보내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클레첼은 리엘로트가 눈치가 없다니 뭐니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각기 자신이 위치해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곳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 마련이니까.
리엘로트가 차를 전부 마시자 클레첼이 한 잔 더 마시겠냐고 권유했다.
본래 차를 즐겨 마셨던 리엘로트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세 잔 가량을 비웠을 때였다.
클레첼이 숙소에서 나가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리엘로트가 불러 세웠다.
“어디에 가시는 거죠?”
“숙소 앞에 있는 마당에 잠시만 나갔다 오려고요.”
“마당에는 왜요?”
“리엘로트 양도 제가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아무래도 날마다 꾸준하게 운동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리엘로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옆에서 구경해도 될까요?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 실력은 대단하다고 들었거든요. 한 번 견문해 보고 싶네요.”
“대단하다고 할 것까지 있나요. 하지만 무술 실력까지 보여 드리려면 상대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곤란할 것 같아요. 게다가 아침부터 과격한 움직임은 몸에 좋지 않아서 말이죠.”
“그런가요?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을 한 번 두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네요. 상대라면 저의 선도부원 중에 레이코 아즈바드라고 근접전에 뛰어난 무술을 가진 애가…….”
리엘로트는 잠시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래서 생각 난 건데 혹시 오늘 점심시간이 끝나고서 저의 선도부원인 레이코 아즈바드와 대련해 주실 수 없나요?”
그러자 클레첼의 표정이 환해졌다.
본래 그녀의 목적은 힘을 단련하기 위함이었으니 자신과 같은 계열의 무술가가 있다면 그녀야 말로 환영이었다.
“저야 말로 같은 근접전에 뛰어난 무술인과 대련할 수 있다면 환영이에요.”
“저도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니 가슴이 두근거려요.”
리엘로트는 괜히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은 다른 무술과는 다르게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를 양산해서 무술을 전파하려는 다른 가문과는 다르게 가르바드 가문은 오로지 가주에 오를 자에게만 무술을 가르쳤다.
그랬기에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은 좀처럼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아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가르바드 가문이 역대 하르카 대륙의 무술 중에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이 가장 우위에 있다고 장담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대륙에서도 유명한 몇몇 무술가가 직접 가르바드 가문에 찾아가 그 무술을 체험하여 위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궁금했다.
어떤 무술인지는 알려지지도 않았으면서 수많은 무술가들이 최고봉으로 인정한 무술이라니.
무술에 관심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이 정도가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엘로트는 클레첼을 따라 손님 숙소 바깥의 공터로 향했다.
사실 공터라고 해 봤자 그냥 아무런 방해 요소가 없는 널찍한 장소에 지나지 않았지만 클레첼에게는 최적의 여건이었다.
리엘로트는 근처의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클레첼이 운동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클레첼의 운동에서 별 다른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운동이었기에 리엘로트는 약간 실망한 기색을 내보였다.
무술 중에서 최고봉에 이른다기에 운동에서도 뭔가 범상치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이 지났을까.
어느 덧 클레첼은 운동을 끝마쳤는지 리엘로트 곁으로 다가왔다.
‘응?’
리엘로트는 클레첼이 무언가 용무가 있나 싶어 바라보았다. 그러나 클레첼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그저 근처를 서성거릴 뿐이었다.
왜 그런가 싶던 리엘로트는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마땅히 앉아 쉴 만한 곳이 자신이 앉아 있던 바위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엘로트는 아차 하며 황급히 왼쪽 가로 몸을 이동하며 말했다.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여기 앉으세요.”
“배려에 감사드려요.”
그제야 클레첼은 조심스레 바위에 걸터앉더니 준비해 두었던 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만끽하던 클레첼이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제 슬슬 테리언이 일어날 때도 됐는데 말이죠. 벌써 오전 10시가 넘었는데…….”
아마 리엘로트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늦게 잠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평소에 테리언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다.
이른바 잠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심지어 늦게 자 버렸으니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 깨우러 가죠.”
“하지만 괜찮을까요?”
“테리언 씨에겐 꼭 사과를 받아 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사과요? 혹시 또 뭔가 문제를 일으킨 건가요?”
클레첼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리엘로트를 바라보았다.
로턴에게 그렇게 주의를 받았는데 편입하기 전날부터 사고를 쳤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클레첼 양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뇨. 상관있는 일이에요!”
“네?”
갑자기 클레첼이 강경하게 나오자 리엘로트가 다소 놀라며 클레첼을 바라보았다.
“상관있는 일이라니 그게 무슨?”
“왜냐하면 전 테리언의 호위학생이니까요.”
“호위 학생요? 그럼 그 남자와 클레첼 양은 아카데미에 새로 편입할 학생이시란 말인가요?”
“네. 그러니까 테리언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저 역시 책임을 질 의무가 있어요.”
리엘로트는 멍 한 표정으로 클레첼을 바라보았다.
들은 바로는 가르바드 가문은 상당히 깐깐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가르바드 가문의 무예는 무술 중에서도 최고였기에 여러 나라와 귀족들 사이에서 수많은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가르바드 가문은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가르바드 가문의 무술인 신체강화술의 힘이라면 한 나라에서 백작 이상의 작위쯤은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으며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신비주의의 가르바드 가문.
‘그런데 그런 가문에 속한 사람이 호위 학생을 자처하고 있다?’
솔직히 처음 테리언과 대면했을 때 느낀 인상은 말 그대로 평민 그 자체였다. 딱히 특출나 보이는 것도 없었고 하물며 귀족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일단 그 남자부터 깨우도록 하죠. 자세한 사정은 그 남자와 대화하면서 듣도록 해 주세요.”
“알겠어요.”
그리하여 클레첼과 리엘로트는 테리언이 머무르고 있는 101호의 문 앞에 도달했다.
클레첼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테리언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