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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크1권(21화)
Chapter.9 남자 목욕탕에서 만난 소녀(2)
제네시드가 도시락 뚜껑을 열자 테리언이 감탄사를 흘렸다.
도시락에는 각기 다양한 종류의 반찬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테리언이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음식도 있었다.
무엇보다 하나하나가 맛깔나 보였기에 절로 군침이 도는 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눈빛으로 도시락을 바라보던 테리언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테리언은 검지와 엄지를 직각 모양으로 핀 채 받침대처럼 턱에 댔다. 그리고는 마치 뭔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이런 유형의 도시락……. 뭔가 낯설지가 않단 말이야.”
“응? 뭐가?”
“흐음.”
한참 동안이나 제네시드의 도시락을 바라보던 테리언은 뭔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드디어 떠올랐어.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마을의 여자아이들도 이런 방식으로 도시락을 싸 오곤 했지.”
테리언의 말에 일순간 제네시드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너무나 미묘한 변화였기에 테리언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돌연 테리언이 한쪽 다리를 벤치에 올려놓은 채 물었다.
“설마 너 여동생 있냐?”
“응? 한 명 있긴 한데…….”
“혹시 네 여동생은 요리 잘해?”
“기본기는 알고 있어.”
“역시.”
테리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벤치에 올려 놓았던 오른쪽 다리의 허벅지를 경쾌하게 끊어 쳤다.
뭔가 몰랐던 것을 알아냈을 때 테리언이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너 그 도시락, 여동생이 싸 준 거지?”
“그, 그렇지 뭐.”
“어쩐지 낯설지 않다 했었어. 보통 여자들이 싸는 도시락은 쓰는 재료는 달라도 그 고유의 방식이란 게 있거든.”
“…….”
제네시드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도시락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표정에선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복잡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지만 고개를 숙여서 테리언은 보지 못했다.
한편 테리언은 그런 제네시드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부럽네. 나도 가족이 있었으면 도시락이나 싸 달라고 해 볼 텐데.”
그러자 제네시드가 고개를 들며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넌 가족이 없어?”
“가족 같이 여기는 사람은 한 명 있는데 진짜 가족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라.”
“그럼 고아였던 거야?”
“그런 셈이겠지.”
“…….”
“…….”
잠시 둘 사이 간의 침묵이 흘렀다.
제네시드는 괜한 질문을 물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지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괜찮다면…….”
제네시드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같이 도시락이라도 먹지 않겠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테리언이 제네시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뭐, 그렇다고 가족이 없다는 것에 대해 큰 신경은 안 써. 그보다 더욱 괜찮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까.”
“테리언…….”
“아아. 나답지 않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 뭐, 너는 도시락이 있다니까 그럼 나 혼자 급식소에 갈께. 점심 맛있게 먹어라.”
테리언은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막 옥상 문을 열고 나가는가 싶더니 돌연 다시 문을 열어젖힌 테리언은 고개만 내민 채 제네시드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 물론 너도 내가 말한 괜찮은 사람 중에 하나니까!”
“쓰, 쓸데없는 소리를……”
“푸하하하. 수줍어 하기는.”
이윽고 테리언이 완전히 옥상을 떠났다.
제네시드는 테리언이 나가고 나서도 씁쓸한 표정으로 옥상 문을 주시했다. 그러더니 문득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둔 도시락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후 수업은 들었던 대로 검술 수업과 마법 수업이 진행되었다.
각각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마법 수업이 먼저 진행 되고 15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 후에 검술 수업이 진행되었다.
마법 수업을 먼저 진행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과거에는 점심시간이 지나면 배가 부르다 보니 나른해져서 마법 수업 때 잠이 온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은 검술 수업을 먼저 시작했는데 오히려 이 경우가 문제가 더 심했다.
검술 수업은 아무래도 육체적인 활동이 많다 보니 끝나고 나면 상당히 지쳤던 것이다. 그래서 검술 수업 후에 마법 수업을 배우려고 하면 피로가 누적되어 오히려 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학생회에서는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 오후 수업은 마법 수업이 먼저고 그 다음이 검술 수업을 배우도록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암.’
남방 차림으로 앉아 있는 테리언은 길게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교단 앞에는 지긋이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여교수가 마법에 대한 이론 지식을 강의하고 있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나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마치 우리 몸 안에 있는 피와 같죠. 그리고 마법은 마나를 소모하여 시전 하는 기술입니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마치 마법은 생명을 갉아먹는 기술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과도한 마법을 사용하면 정말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지만…….”
테리언은 오전 수업 때처럼 지루하게 설명이나 듣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론 설명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 마법이나 검술은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해 보는 것이 더 알기 쉬웠기 때문.
“자, 그럼 오늘은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기술인 마나 구체를 생성하는 것을 해 보도록 하겠어요.”
대략 마흔 명 정도 되는 F반 학생들이 여교수 앞에 반원형으로 둘러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교수가 뭐라 설명하며 마나 구체를 생성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자 주변에서 감탄사가 일었다.
“테리언, 저거 봐봐! 정말 신기하지 않아?”
“어, 응. 그러네.”
하지만 테리언은 결코 엄두도 못 낼 마법이다.
이론이든 실기든 테리언에겐 사칙연산도 제대로 못하는 학생에게 함수를 가르치는 꼴이자, 그림의 떡을 보고 먹어 보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테리언이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클레첼이 재미없다는 듯 볼을 부풀렸다.
물론 테리언은 마법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질적인 방법으로는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구현할 수 없는 것을 마법으로는 가능케 한다.
파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거나,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린다던가,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게 만든다. 이 얼마나 가슴 들끓고 두근거리는 요소가 아닌가!
단지 테리언이 마법을 쓸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것이다. 결국 테리언 앞에선 그림의 떡이다. 마법을 체험해 보고 싶어도 그걸 없애 버리는 체질, 재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안 좋았다.
검술 수업이 되었지만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법 수업 때 보다는 지루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힘이 든다는 것이었다.
검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체력이라니 뭐니 하면서 이번 수업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체력 훈련을 하는 것이 다였다.
검은 쥐어 보지도 못했다.
‘이게 뭐냐고!’
그렇게 정규 수업이 끝나고 종례가 끝나자 테리언은 투덜거리며 클레첼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수업이 지루할 것이라고는 오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바.
그런데 이건 사람을 가지가지로 힘들게 했다.
오전 수업 때는 그냥 복합적으로 지루한가 하면 오후 수업은 조금 달랐다.
마법 수업을 배울 땐 그림의 떡이다 보니 짜증이 나고, 검술 수업은 그냥 체력 훈련만 시키니 이건 뭐 사람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치게 만들었다.
그나마 학생들이랑 좀 어울리면서 논다면 지루함을 덜 느낄지도 몰랐다. 그러나 F반에서 테리언은 이미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혔기에 테리언과 가까이하려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테리언이 모르는 사이 이미 아카데미에선 불량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이런 지겨운 수업을 졸업할 때까지 견디라니…… 이건 미친 짓이라고! 뭔가……. 뭔가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야…… 잠깐.’
속으로 끙끙 앓던 테리언은 돌연 F반에 처음 올 때 리엘로트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S반은 정규 수업을 받지 않는다고 했었지!’
게다가 제네시드 역시 S반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오히려 딱 좋은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번뜩이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왜 이게 지금 떠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첼, 나 잠깐만…….”
“클레첼 양, 테리언 님.”
테리언이 막 옥상에 가려고 말을 꺼내려던 참에 그들의 등 너머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리엘로트와 로리에가 서 있었다.
“헉! 왜 또…….”
로리에의 시선과 마주친 테리언은 기겁하며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리엘로트가 신호를 주기도 전에 재빨리 클레첼이 재빨리 테리언의 오른팔을 낚아채며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클레첼, 이거 놔! 나는 아직 이대로…….”
“테리언 님!”
돌연 리엘로트가 테리언을 향해 소리치자 테리언이 깜짝 놀라며 리엘로트를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고함을 잘 치지 않던 그녀가 이례적으로 소리를 질렀기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테리언이 어느 정도 진정된 모습을 보이자 리엘로트가 말했다.
“아무래도 모습을 보니 확실히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오해?”
“제네시드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주입 받으신 것 같은데 그건 표면적으로 알려진 내용이지 사실이 아니에요. 로리에는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에요.”
문득 로리에를 쳐다보자 로리에는 떨리는 눈동자로 테리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가슴을 만지기 위해서였지만 오랜 시간 마을 여자아이들과 지내 왔던 테리언은 어느 정도 여자의 심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 테리언의 경험으로 봤을 때 저 눈빛은 그때 수풀 너머에서 처음 보았던 눈빛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현재 로리에의 눈빛은 그저 가녀린 소녀의 눈빛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 안 나는 거야?”
애처로운 눈동자로 테리언을 바라보던 로리에가 문득 입을 열었다.
테리언은 순간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어째서인지 이런 말을 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로리에의 눈동자를 보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뭐지? 저 모습은 제네시드가 말한 냉혈의 악녀라던가 그런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잖아?’
제네시드의 말에 의하면 로리에는 자신이 이야기해 준 것 외에도 악명 높은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테리언 역시 어저께 세르갈 무리를 단신으로 쓰러트리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로리에의 모습은 냉혈의 악녀라던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너는…….”
막 입을 열려던 테리언은 순간 알 수 없는 두통을 느꼈다.
“크윽!”
테리언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신음하자 로리에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클레첼과 리엘로트 역시 테리언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리언 님, 테리언 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테리언! 어디 아픈 거야?”
그러나 테리언의 귓가에는 그녀들의 말이 마치 울려 퍼지듯 앵앵거리며 들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