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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크1권(22화)
Chapter.9 남자 목욕탕에서 만난 소녀(3)
테리언은 한 번도 이렇게 뜬금없이 두통을 느낀 적이 없었기에 상당히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테리언 오빠!”
그때 로리에의 외침이 들려왔다.
클레첼과 리엘로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앵앵거리며 들려오는데 로리에의 그 한 외침만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오빠……?’
로렌스카 마을의 여자아이들은 전부 연상이었기에 테리언이 오빠라 불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로리에가 부르는 오빠라는 말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단어처럼…….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테리언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로렌스카 마을의 한 주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은 놀랍게도 로턴이 살고 있는 주택.
아직 불이 주택을 완전히 집어삼킨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큰 불로 번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마을 주민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지속된 가뭄으로 인해 물이 상당히 귀해진 상태였다.
“그나저나 로턴 씨 부인은 아직 안 오셨답니까?”
“제가 아까 전에 번화가에 들렀다 오는 길인데 장을 보고 계셨던 같아요. 아마 시간이 꽤 걸리실 것처럼 보이셨는데 어떡하죠?”
“혹시 저 안에 로턴 부인 씨 따님이 있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화재가 났다면 벌써 도망쳐 나왔겠지요.”
확실하지 않은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들은 섣불리 안에 들어가서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하긴 자기 일도 아닌데 그 누가 남 일에 목숨을 걸려 하겠는가.
바로 그때 로턴의 주택 앞에 몰려 있던 마을 주민들 사이로 한 소년이 뛰쳐나오더니 다급한 표정으로 주택 앞으로 다가갔다.
“얘야, 뭘 하려는 거니!”
“거긴 위험해! 어서 돌아와!”
마을 주민들이 만류했지만 소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로리에!”
소년은 로턴의 주택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 때문인지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잠시 주택을 향해 귀를 기울이더니 이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지금 구하러 갈게!”
소년은 안에 로리에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을 주민들은 만류하려고 했지만 이미 소년이 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물러났다. 괜히 소년을 말리다가 자신들 역시 일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현관문에 들어서자 주택 안은 이미 매캐한 연기로 가득 메워져 있었지만 소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손으로 입을 막거나 콜록거리지도 않았다.
그 모습은 억지로 참는다고 하기 보다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모습이었다.
소년은 집 안에 들어서자 다시 한 번 로리에를 부르며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시 후, 또 무언가를 들었는지 소년은 2층으로 향하더니 이윽고 다락방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바라보았다.
사다리에 올라 다락방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놀랍게도 인형을 부둥켜안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로리에가 있었다.
로리에는 상당히 겁을 먹었는지 얼굴은 이미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오, 오빠!”
로리에는 소년이 나타나자 얼굴에 화색이 돌며 빠르게 소년의 곁에 다가왔다. 소년은 로리에를 안아 주며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흐흐흑! 너무 무서웠어.”
“걱정 마. 이제 내가 데리고 빠져나가 줄게.”
이미 집 안의 대부분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상태였지만 유일하게 다락방만은 연기가 차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2층 부근에 열려 있는 창문이 많았기에 연기가 다락방으로 향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2층 부근의 창문이 닫혀 있었다면 소년이 도착하기도 전에 로리에는 질식사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소년은 로리에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조심스레 다락방을 내려왔다.
“로리에 잠깐 동안만 숨을 참을 수 있겠지?”
“흐흑, 으, 으응.”
로리에가 눈물을 닦아 내며 대답하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뿐하게 그녀의 몸을 안아 올렸다.
로리에는 갑자기 몸이 떠오르자 처음엔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는 소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로리에를 안고 1층으로 내려가던 소년은 문득 주방 쪽을 바라보고는 유난히 주방 쪽만 불길이 거세다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매캐한 연기가 주방에서 나오고 있었으니 확실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위해 잠시 불을 올려놓았다가 뭔가 사고가 일어난 것 같은 모양이었다.
소년이 막 1층의 거실까지 도달했을 때였을까.
“꺄악!”
화르르륵!
소년에게 안겨 있어 자연스레 시선이 하늘로 향해 있었던 로리에는 천장이 무너지려는 것을 보고는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소년은 로리에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깨닫지 못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로리에 갑자기 왜 그래?”
소년은 로리에가 다친 줄 알고 로리에를 바라보았지만 로리에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소년이 멈춰 서자 로리에는 당황하며 ‘천장이 무너질 것 같으니 피해라’라고 말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로리에의 나이는 고작해야 7살. 혼비백산한 상태인 그녀가 찰나의 순간에 그렇게 의사전달을 빨리 할 리 없었다.
우지끈!
결국 로리에가 말을 더듬는 사이에 이윽고 위태위태하던 천장이 무너졌다.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소년이 당황하며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게다가 로리에를 안고 있어 몸을 날려서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은 한순간에 벌어졌다.
소년은 잔해가 그들 위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안고 있던 로리에를 재빨리 멀리 내팽개쳤다. 그로 인해 잠시 바닥을 뒹굴던 로리에는 충격으로 인해 신음했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 오빠?”
로리에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자신을 구해 주고 잔해에 깔려 버린 소년을 바라보았다.
“로, 로리에…… 어…… 어서 도, 도망…….”
잔해에 깔리던 도중 머리에 큰 타격을 받았는지 소년의 이마에는 수 가닥의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를 얻어맞아서 그런지 점차 의식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바로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의식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어서 도망쳐……. 로리에…….”
“테, 테리언 오빠아아아아아!”
의식이 끊기기 일보 직전 소년의 귓가에는 로리에의 절규만이 어렴풋이 들려올 뿐이었다.
* * *
“로, 로리에!”
테리언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테리언은 이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 꿈은 뭐지?’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는 것은 둘째 치고 뭔가 의문이 남는 꿈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꿈에서 보았던 소녀는 틀림없이 로리에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 로리에라고 불린 소녀는 소년을 향해 테리언이라고 불렀다.
단순히 우연이었던 걸까?
그렇다고 치기엔 뭔가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꿈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꿀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뭔가 이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로리에와 마주했을 때 그녀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때 당시는 경황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곱씹어 생각하니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문득 주변을 둘러보던 테리언은 자신이 낯선 방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니 이미 바깥은 어두워진 상태였다.
‘여긴 설마 기숙사인가?’
테리언은 방과 후에 리엘로트는 정식 학생이 되었으니 손님 숙소에서 기숙사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보다 언제 정신을 잃어버렸던 걸까.
테리언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자신이 기절하기 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정규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던 도중 리엘로트와 로리에를 만났다. 그리고 로리에를 보고 도망가려던 나는 알 수 없는 두통을 느끼고는…….
‘기억이 안 나.’
테리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그 꿈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일 로리에를 만나 물어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테리언은 상념을 털어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상황에선 백 날 끙끙 앓고 고민한다고 해도 궁금증은 쉽게 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단서를 찾을 때까지는 잠시 접어 두기로 생각했다.
‘흠, 그나저나 그녀들이 나를 여기까지 옮겨다 준 건가?’
분명 학생 교사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이렇게 기숙사에서 정신을 차린 것을 보아 하니 틀림없었다.
테리언은 리엘로트와 로리에는 근력이 약하니 아마 클레첼이 옮겨다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는데.’
원래 이 시간에는 자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기절했다가 지금 깨어났는지라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테리언은 기숙사 구경이나 할 겸 주변을 둘러보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방을 나와 몇 십 분가량 기숙사를 돌아다녔을까.
그 중 알게 된 첫 번째는 이곳은 남자 기숙사라는 것이었다. 복도 끝에 있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니 반대편에는 여자 기숙사로 예상되는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혹시 이런 야심한 밤에도 여자 기숙사를 구경하겠답시고 옥상에 제네시드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혹시가 사람 잡는다고 옥상에 올라가 보았지만 의외로 제네시드는 보이지 않았다.
‘흠. 역시 밤에 보는 건 좀 어둡다 보니 무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테리언은 나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렌스카 마을에서 살던 당시에도 지겹도록 본 밤하늘이지만 이런 곳에서 보니 뭔가 기분이 새로웠다.
‘잠시 쉬었다 갈까.’
테리언은 평소에 높은 곳에서 시간 때우는 것을 좋아했기에 조금 더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늘만 기회가 아니니 언제든지 이 밤하늘을 구경하러 올 수 있을 것이다.
옥상에서 내려온 테리언은 다시 한 번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10분가량 기숙사를 더 돌아다닌 끝에서야 테리언은 목욕탕을 발견했다.
‘마침 잘 됐군.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목욕할 시간이 없었는데.’
탈의실에 들어선 테리언은 바구니에 옷을 담다가 문득 바구니 보관대의 한 구석에 옷더미가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자신이 오기 전에 미리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도 목욕하러 오는 사람이 있는 건가?’
테리언의 경우는 기절했다가 지금 일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경우였다.
그러나 굳이 참견할 이유는 없었기에 테리언은 그런가 보다 싶어 탈의를 전부 끝냈다. 그리고 목욕탕 안으로 입실하기 위해 보관대 옆을 지나갈 때였다.
“잠깐만.”
뭔가 엄청난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든 테리언은 목욕탕 문을 열려다가 흠칫하며 그대로 뒷걸음질했다. 그리고는 아까 보았던 보관대를 바라보았다.
“이건…….”
처음엔 남자 교복이 있었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옆을 지나가니 교복 사이로 뭔가 분홍색 같은 것이 보였기 때문에 시선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 교복에 분홍색 옷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속옷이라는 셈인데 남자가 분홍색 속옷을 입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