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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크1권(23화)
Chapter.9 남자 목욕탕에서 만난 소녀(4)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는 천하의 테리언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들어 있었다.
‘왜, 왜 여기에 여자 속옷이?’
보통 이런 경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 사실 이곳은 남자 기숙사가 아닌 여자 기숙사였다는 것.
따지고 보면 클레첼이 테리언을 업고 기숙사 안까지 들어왔다는 것부터 뭔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았다. 각 기숙사는 서로 다른 성별을 가진 학생들은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리엘로트는 선도부장이라서 변수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선도부장이기에 어지간하면 학교 룰을 어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렇다면 리엘로트가 인맥을 이용하여 다른 남학생의 도움을 받아 이 안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설마 여학생이 착각을 해서 남자 기숙사의 목욕탕에 들어왔다든가?
테리언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없는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
바로 남자가 여자 속옷을 입을 가능성.
하지만 만약 남자가 여자 속옷을 입고 있고 있다면 이유는 모를지언정 취향일 확률이 높았다.
취향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만약 테리언에게 배려와 이해심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일부로 모른 척을 하고 돌아섰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테리언에겐 배려와 이해심보다도 우선 순위인 것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여자 속옷을 입고 있는지 궁금한데?’
공교롭게도 테리언은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여자 속옷이 남자 기숙사에 마련된 목욕탕에 있는 건지, 그리고 이곳이 어느 기숙사인지, 만약 남자라면 왜 여자 속옷 입었는지.
테리언의 안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 속옷을 입은 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 오로지 그뿐이었다.
테리언은 거침없이 목욕탕으로 향하는 미닫이문을 열어젖혔다.
콰르르릉― 탁!
미닫이문이 경쾌하게 열리는 소리가 목욕탕 내에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다.
‘어디 있으려나?’
테리언은 가슴을 만지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 번째 순위일 뿐, 오로지 그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두 번째 순위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흥미진진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라면 더더욱 좋아했다.
그런 걸로 따지면 남자 기숙사의 목욕탕에 여자 속옷을 벗어 놓고 들어간 사람을 알아내는 것은 정말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클레첼이랑 리엘로트가 사고 치지 말라고는 했지만…….’
특히 클레첼은 테리언의 행동이 겁이 났는지 심지어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미 한 번 테리언은 제네시드와 같이 로리에를 훔쳐본 사건이 있었다.
테리언의 호위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클레첼은 제대로 한 것이 없었는지 책임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그냥 얼굴이나 확인하자는 건데 별 문제 될 일이야 있겠어?’
행여나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냥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 아직 테리언이 바구니 안에 담긴 여자 속옷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테리언 자신만이 아는 일이다. 안 봤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게다가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간덩어리가 크지 않고서는 대놓고 다가와서는 ‘내 속옷을 봤느냐’라고 물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안에 들어서자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옷. 있다, 있어!’
처음엔 수증기 때문에 잘 안 보였는데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금발 머리를 한 사람이 탕 안에 있었다.
그러나 뭔 놈의 목욕탕이 이리 수증기가 심한지 거의 15m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얼굴을 보이기 싫었는지 안 그런 척하면서도 절묘하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는 상태.
‘그러면 더욱 보고 싶어진단 말이지.’
테리언은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탕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는 후끈한 온기가 전신을 뒤덮자 온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원인 모를 이유로 두통을 느껴서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었는데 그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나른한 표정으로 뜨뜻한 온기를 만끽하던 테리언은 슬그머니 금발 머리 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기 참 물 좋네요, 그렇죠?”
“…….”
그러나 금발 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리언은 무시당하리라고 예상했는지 능청을 떨며 금발 머리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움직였다.
“제가 이 아카데미에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서 말이죠. 아, 혹시 귀족 분이었으면 실례했습니다. 제가 워낙 배운 게 없는 미천한 녀석이라 말입죠.”
테리언은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존댓말까지 해 가고 있었다.
이번 아카데미에 오면서 리엘로트에게 들은 조언 중 하나가 바로 귀족 앞에선 반드시 존댓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물론 워낙 마이페이스였던 테리언이 그런 걸 지킬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평소에 안 하던 짓까지 하는 것이야 말로 테리언이었다.
그렇게 각종 수다를 떨며 5m 정도까지 다가왔을 때였을까.
테리언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왔을 때 별안간 금발 머리는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 부위를 가리며 물에 몸을 담갔다.
얼굴을 가린 건 그렇다 쳐도 가슴은 왜 가렸단 말인가?
‘수상하군.’
테리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
한 번 목표 대상을 찾으면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테리언의 철칙이었다.
“저기…….”
테리언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지 마.”
“응?”
“다가오지 마.”
금발 머리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테리언은 잘못 들은 척하면서 오히려 더 가까이 접근했다.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
촤아악―!
바로 그때 돌연 금발 머리가 테리언의 안면을 향해 물을 뿌렸다.
“앗!”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테리언은 민첩성 하나는 끝내주는 편이었다.
테리언은 물이 안면에 닿는 순간 손바닥을 펼치며 눈에 물이 튀는 것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벌떡 일어서며 목욕탕을 빠져나가는 금발 머리를 바라보았다.
“…….”
평소라면 쫓아가면서까지 확인하고도 남았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뭐랄까,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믿겨지지가 않았다.
‘여자…… 였어?’
손가락 틈으로 본 금발 머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여자였다.
애초에 가슴은 오른팔로 가리고 있어서 볼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테두리로 봤을 땐 상당히 가슴이 작은 편이었다. 굳이 가릴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남자 기숙사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충격.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금발 머리의 이목구비가 분명 테리언이 아는 그 녀석과 너무나도 비슷했던 것이다. 물론 한순간에 본 얼굴이라 확실치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테리언이 저 금발 머리가 ‘그 녀석’ 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Chapter.10 달갑지 않은 재회(1)


프로티나 아카데미에는 세 개의 기숙사가 있었다.
하나는 교직원 기숙사로서 총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설비와 생활하는 데 있어서 편리함으로 치면 최상급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여자 기숙사. 총 10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각 층마다 순식간에 올라갈 수 있는 순간이동 마법진이 존재했다. 또한 설비도 교직원 기숙사 다음으로 버금가는 기숙사였다.
마지막은 15층으로 구성된 남자 기숙사였는데 유일하게 기숙사 중에선 가장 설비가 안 좋았다. 그러나 세 개의 기숙사에서 가장 안 좋은 축에 속할 뿐이지 평민의 입장으로 봤을 땐 뭘 봐도 호화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앞으로 이런 곳에서 생활하게 된다니! 지긋지긋한 수업만 빼면 웬만한 건 다 마음에 드는걸?’
로렌스카 마을에서 살던 숙식 생활에 비하면 아카데미의 생활은 마치 자신이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단지 아쉬운 점은 현재 테리언이 머무르게 된 904호 실은 현재 룸메이트가 없다는 것이었다.
원래 테리언이 904호 실로 배정받기 전엔 살던 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테리언이 편입하기 며칠 전 졸업 조건을 만족하여 퇴실해 지금은 빈자리가 된 상태였다.
‘응? 이건?’
침대에 앉은 채 멍하니 있던 테리언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수첩을 발견했다.
수첩을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상당히 정성 들여 쓴 듯한 필체로 무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잠시 수첩에 적힌 글씨를 읽던 테리언은 내용을 통해 이 수첩을 건네준 이가 리엘로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깐깐한 줄 알았는데 이런 면에선 친절하군.’
학교의 법에 어긋난 행동은 용납하지 않지만 그래도 선도부장이랍시고 학생을 위하는 태도는 신분과 남녀차별을 하지 않는 여자였다.
수첩에는 아카데미의 약도와 건물 명칭, 그리고 정규 수업 시간표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뭔가 자신을 걱정하는 의미에서 쓴 건지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 같은 것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빠르게 넘겼다. 어차피 쓸데없는 잔소리 같은 내용이겠지.
그러다가 마지막 부근에 추신으로 적힌 글을 발견했다.

‘본래 학생들이라면 교복 자체에 학생증 같은 기능이 달린 마법이 있어요. 그런데 테리언 님은 마나를 거부하는 체질이 있어서 당분간은 수첩에 끼워진 학생증 카드를 들고 다니셔야 할 거예요. 그리고 교복 면에서는 테리언 님의 체격에 맞추어 새로 제작되었으니 옷장을 열어 확인해 주세요.’

옷장을 열어 보니 기존의 갑갑했던 디자인과는 확실히 달라진 시원한 계통의 남자 교복이 걸려 있었다.
‘흠. 여자 교복들도 이런 디자인으로 맞추면 얼마나 좋아. 적어도 가슴 부근만이라도 좀 강조시키면 보기 좋을 텐데.’
테리언은 투덜거리며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첩과 학생증을 겉옷의 속주머니에 넣은 후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다.
로렌스카 마을에서 살던 당시엔 활동하기 편한 반바지와 하얀 반팔만 입었다. 신발 역시 다 낡아져 가는 허름한 신발이었는데, 지금은 깔끔한 디자인의 교복과 아카데미에서 지급해준 멋스러운 신발을 신은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솔직히 테리언은 외모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었는데 이렇게 차려입고 나니 상당히 괜찮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각 호 실마다 다른 호 실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했었지.’
아카데미에서는 흔히 연락 송신기라 불렸다.
그러나 정작 연락 송신기를 만져 보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눌러 봐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