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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2화)
chapter 1 영주 등극(2)
발칸이 타고 있던 마차는 어떤 허름한 여관에서 멈췄다.
영지민들에게 아직 영주 대리의 추방과 신임 영주 등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발칸 일행을 보고도 여관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손님이라 생각했다.
“몇 분이십니까?”
“50명일세. 말에게 여물을 넉넉히 먹이게나.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갈 테니 좋은 방 몇 개 선별해 주고.”
오랜만에 맞는 대규모 손님인지라 주인의 얼굴은 간만에 활짝 펴졌다.
“영지에서 본 적이 없군요. 여행객이시니만큼 경치 좋은 방으로 선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손님, 저희 여관은 선불제인 터라…….”
“아, 그렇군. 얼마인가?”
“15골드입니다.”
허름한 여관치고는 여관비가 상당히 비쌌다. 타지인임을 확신하고 바가지를 씌우는 것일 터.
하지만 발칸은 군말하지 않고 금화 열다섯 개를 꺼내어 주인에게 넘겼다.
“식사는 따로 계산하셔야 합니다. 헤헤, 물론 식사는 후불제이니 드신 뒤 계산하시면 됩니다.”
“알겠네. 자, 다들 들어오너라.”
발칸의 말에 검은 로브를 쓴 50여 명의 인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히엑?”
여관 주인은 그들을 본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아들놈한테 이상한 사람들이 손님으로 왔다는 말은 들었어도, 로브를 단체로 쓰고 있는 광신도 집단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방은 어디를 쓰면 되겠는가?”
“저, 저 아이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여관 주인이 제법 싹싹하게 생긴 열 살짜리 꼬마를 가리켰다. 발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그럼.”
그때, 발칸의 다리가 우뚝 멈췄다.
“혹시 나를 찾는 자들이 있으면 올려 보내게.”
“알겠습니다.”
발칸이 2층으로 올라가자 여관 주인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었다.
“거참, 이상하단 말이야? 나보다도 어려 보이면서 어찌 보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착한 것은 삼십 분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중 선두에 서 있던 노인은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언성을 높여 옆에 있던 한스에게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여관에 영주님께서 와 계시는 것이 정말로 사실이냐!”
“그, 그렇습니다요.”
한스는 자신 없는 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영지에 도착했으면 영주성에 가도 모자랄 판에 한눈에 보아도 쓰러질 것만 같은 여관에 영주가 들렀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한스도 영지 안내를 위해 붙여 둔 병사의 말이 아니었으면 믿지 못했을 일이었다.
“만약 거짓이라면 네놈을 용서치 않겠다!”
“끄응!”
한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노인의 뒤를 쫓았다.
이 노인은 프라시스 영주가 설립한 학교의 교수였다.
평소 학생들에게 인자하지 못하고 성격이 불같았지만, 이 영지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였기에 영지에 대해 논하자면 그와 같은 박식함을 지닌 자는 찾기 힘들 것이었다.
노인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대뜸 주인장을 보며 말했다.
“영주님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 영주님께 안내하거라.”
주인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노인장은 뉘신데 이곳에서 영주님을 찾는단 말이오? 영주님은 이미 한 달 전에 나가지 않으셨소?”
“오늘 신임 영주께서 이 영지에 오셨다. 오늘 이곳에 온 손님 장부를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냐?”
“컥!”
주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오늘 온 손님이라고는 50명의 대인원을 끌고 나타난 20대 중반의 청년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신임 영주를 찾다니.
그렇다면 설마 외지에서 나타나 자신이 바가지를 씌운 그 청년이 신임 영주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인은 턱을 덜덜 떨며 2층을 가리켰다.
“아, 알 것 같소. 2층 오, 오른쪽 복도 끝 방에 계시오.”
노인이 약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2층까지 가볍게 올라가서는 오른쪽 복도 끝 방으로 향했다.
복도에는 기사는커녕 그 흔한 병사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정말 영주라는 작자가 이곳에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어서 오시게.”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간 노인이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청년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오늘부로 부임된 신임 영주가 곧바로 여관으로 왔다는 말에 지긋이 나이가 든 영주라는 생각이 들었건만,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쯤으로 보이지 않은가?
게다가 방 한구석에 호위무사 한 명 없이 홀로 창가에 앉아 차를 홀짝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백작님이 맞으시오?”
“프라시스 백작의 후임 영주를 찾는 거라면 내가 맞겠지. 자, 앉아만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게나.”
“음…….”
노인이 앉자 발칸은 미리 준비된 찻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르.
노인은 찻잔을 양손으로 잡고 말했다.
“나를 찾으셨다고 들었소.”
“그랬지.”
발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왜 날 찾은 거요?”
“그대가 보기에 과연, 나는 영주의 자격이 있을지 궁금해서 불렀소이다.”
영주의 자격?
노인은 발칸의 말에 신음을 삼켰다.
“영주란 인덕이 있어야 하며, 영지민들을 제 자식처럼 알아야 하오. 뿐만 아니라…….”
발칸은 손을 들며 노인의 말을 저지했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기대하는 게 아니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 그럴 뿐. 그것이 당신을 부른 이유지.”
“그렇다면 이 노부가 젊은 귀족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발칸은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관에 온 이유가 무엇이오?”
발칸이 웃음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영지의 지배자라고 누가 허락해 줬단 말이오? 모든 이들의 아버지인 황제가? 아니면, 전 영주인 프라시스 백작이? 그들에게 과연 그런 자격이 있을까? 난 그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지. 과연 땅이 날 인정할까. 아니, 영지민이 날 인정할까. 그런 의미에서 영주관은 성스러운 곳이지. 이곳 영지민들의 아버지가 되는 곳이니. 난 전대 영주처럼 국왕의 옥쇄 찍힌 신분만을 가지고 유세를 떨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봐야겠군.”
발칸은 중간 중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노인은 발칼의 이야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발칸이 다시 답을 이었다.
“당신은 이 영지에 대해 박식하다 들었소. 수십 년을 이곳에서 지냈다고 들었으니. 그대는 이 땅이 인정한 인재. 난 그 인재에게 나의 자격을 묻고 있는 것이오.”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젊은 남자는 자신을 적당히 치켜세우면서도, 본인의 뜻을 똑바로 전하고 있었다.
즉, 입이 가볍지 않으며 생각이 짧지 않다.
‘20대 중반?’
과연 그것이 저 젊은 귀족의 나이란 말인가?
아니다.
저자는 수십 년을 살아온 자신과도 충분히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전부인 자가 아니었다.
노인은 이 젊은 귀족을 그렇게 간파했다.
“후후. 그리고 여관에 온 이유는, 높은 세금율 때문에 영지민의 인심이 어떠해졌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지. 난 무엇보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거든.”
“생각보다 어떠하오?”
노인이 묻자 발칸이 웃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더군.”
“아…….”
이 젊은 귀족은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내포된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지금 영지는 높은 세금율로 인해 도적이 들끓고 치안이 어지러워 인심이 흉흉했다.
하지만 도적 없는 영지 없으며 세금에 허덕이지 않는 영지민 또한 없을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
모호한 대답이었다.
“자격이 있다고 물으셨소?”
“그랬지.”
“나 또한 영지민 3만 명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그렇겠지.”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소.”
“말해 보시게.”
발칸은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떠한 대답이든 간에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이 노부의 이름은 롬펠. 이제부터 당신을 이곳의 영주라 생각하고 받들겠습니다.”
롬펠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영주입니다,영주님!”
“그러한가?”
발칸은 롬펠의 말이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롬펠의 반응은 아주 당연했다. 지금까지 발칸과 같은 영주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까.
“내 이름은 발칸. 그대의 영주, 아니, 이 땅과 영지민들의 지배자가 될 사람이지. 자, 일어나게.”
“예, 영주님!”
롬펠이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칸과 롬펠은 서로 죽이 잘 맞는 것인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아침이 되어서야 끝날 수 있었다.
chapter 2 내가 바로 영주다!(1)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롬펠은 발칸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했다. 오직 그의 생각과 지식에 감탄할 뿐이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운 두 사람은 여관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발칸의 기척을 느끼고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50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롬펠은 발칸의 옆에 서 있는 50명의 사람들이 풍기는 기묘한 기운에 놀라 발칸에게 여쭈었다.
“영주님, 저들은 혹시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들이 아닙니까?”
발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맞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비밀로 해 주게.”
“알겠습니다.”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곳은 마도국 자하드밖에 없다.
만약, 아일란 왕국에서 신임 영주가 대륙에서 배척받는 흑마법사를 양성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크게 작위 박탈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이들을 숨길 곳이 필요하겠군요.”
50여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영주관에서 지내기에는 티가 너무 난다.
“그래서 말일세. 안 쓰는 땅이 있나?”
“안 쓰는 땅이야 워낙 많으니 상관이야 없지만, 은밀한 땅을 찾는 곳이라면 영지 안에 많지 않습니다.”
“있으니 다행이군. 이 흑마법사들과 네크로맨서들은 이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에 아주 큰 공헌을 할 자들이네. 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해야 할 터인데, 마탑을 건설한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겠는가?”
롬펠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 또한 영지의 자금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마탑 건설은 물론이거니와 마법사의 지원이 현재로썬 역부족입니다.”
“어째서?”
롬펠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일단, 영주에 대한 기밀 얘기를 바깥에서 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영주성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좋겠군. 그럼, 영주성으로 가세나.”
영주성은 생각만큼이나 아주 조용했다. 프라시스 백작과 영주 대리 라드가 쫓겨나면서 식솔들까지 사라졌으니 이제는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영주성에 일하는 몇 행정관리자들만 남았다.
발칸은 영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롬펠을 덜컥 행정관리자 총무에 앉혀 버리고 영지에 있는 모든 학교의 학교장을 맡게 했다.
한 학교가 아니라, 모든 학교를 대상으로 말이다.
롬펠이 권력에 욕심을 가진 자가 아니었기에 수많은 거절을 해 왔지만, 발칸은 롬펠 같은 인재를 교수직 따위에 내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른 행정관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가신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발칸은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계획했던 일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