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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3화)
chapter 2 내가 바로 영주다!(2)


그는 롬펠을 집무실로 불러내었다.
“어제 그 이야기를 다시 해 주게. 영지의 사정이 말이 아니라니?”
롬펠은 행정관리자들을 독촉해 근 10년 동안의 영지자금 상황을 알아보았다.
“요 3년 동안, 아일란 왕국 전역에서 메뚜기 떼들이 출현한 것은 아십니까?”
발칸은 대륙에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갑자기 출현한 메뚜기 떼들의 공격은 아일란 왕국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식량 값이 폭등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정확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3년간 프라시스 영지는 가을 작황이 흉년과도 같았습니다. 메뚜기 떼들의 집단 공격으로 식량 값은 폭등했으니, 영지민들의 삶이 고단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좀처럼 없던 빈민층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 프라시스 백작님은, 30만 골드를 융통하여 식량을 최대한 사들여 식량난을 해결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뒤 이야기는 안 들어 봐도 뻔했다.
“실패했겠지.”
30만 골드는 일반인이 만질 수조차 없는 엄청난 거금이다. 하지만 그 돈으로도 3만 명이나 되는 영지민의 식량난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
결국 이자가 배로 불어나게 되어 발칸에게 이 영지를 넘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리란 걸 예측하고 돈을 빌려 준 발칸으로서는 놀랄 것도 없었다.
오히려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매년 가을마다 나타나는 메뚜기 떼들은 이미 신성제국에서 시작되어 요번 가을쯤에는 프라시스 영지를 덮칠 것으로 사료됩니다.”
추수의 계절이 오려면 아직 한 달은 남았다. 하지만 이미 3년간의 궁핍 생활로 빈민가까지 생겨 버린 이상 이번에도 영지에 막대한 피해는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영지에 남은 자본은?”
“영주 대리였던 라드의 집을 급히 처분한다면 약 1만 8,000골드 정도에서 2만 골드까지는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 보석류 등을 팔아도 지금 당장 4만 골드까지는 만들 수 있습니다.”
4만 골드로 영지를 운영하기에는 턱도 없다.
마법사 한 명을 양성하는 데는 1년에도 수천 골드 이상이 들어간다. 하물며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를 합치면 50명이나 된다.
그들을 1년간 유지하는 비용만 수만 골드에서 수십만 골드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대로라면 영지민들이 겨울을 날 수가 없겠군.”
어디에서나 나는 빈부격차.
식량 값이 올라가니 더욱 죽어 나가는 것은 입에 간간이 풀칠만 하던 빈민들이고, 평소에 많은 재산을 산처럼 쌓고 지내던 자들이라면 식량 값의 폭등은 오히려 기회가 되어 한몫 당당히 잡았을 것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영주님 말씀대로 이번 겨울에 엄청난 피해가 생길 것입니다.”
영지민은 영지의 재산이다. 영지민을 많이 잃는 것은 뼈아픈 손실과도 같다.
“어쩔 수가 없군.”
발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롬펠이 귀신같이 물어 왔다.
“무언가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면 털어서라도 만들어야지.”
발칸은 당장 가신회의를 진행시켰다.

회의에 참가한 발칸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웃기는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영지민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가신들의 옷은 날이 갈수록 고급스러워져 가고 있었으니.
오히려 영주인 발칸이 입은 옷보다도 가신들의 옷이 어느 나라의 황제마냥 비싼 용포 같았다.
“이번 년에도 어김없이 신성제국을 시작으로 메뚜기 떼들이 공격을 해 오기 시작했소. 내 그래서 영지민들을 위해 이렇게 가신들을 모았소. 뿐만 아니라, 아직 나와는 초면인 자들도 있을 것이오. 내가 부족한 것이 많을 테니 아무쪼록 많은 도움을 바라는 바요.”
발칸이 그렇게 서두를 떼자 가신들 중 대표인 헤르만이 일어섰다.
“저희 가신들도 프라시스 영지에 젊고 용기 있는 영주님이 취임하신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 영지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쳐 노력할 것임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발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겉치레로 하는 말임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내용만큼은 자신이 이용하기에 더없이 좋았던 것이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
가신들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발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영주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영주라 하시면…….”
“영주, 영지의 주인 말일세.”
헤르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제야 눈치 챈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젊은 귀족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프라시스 영지의 영주님은 이 땅의 주인이며 지배자이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영주님의 재산이며 영주님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셔야 하며 저희 가신들은 그런 영주님을 본받아 따라야 합니다.”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이었지만, 발칸은 헤르만의 대답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나를 이 땅의 지배자라고 생각해 주니 매우 고맙군.”
“별말씀을…….”
“그럼, 가신이란 무엇인가?”
“가신은 이 땅의 주인이신 영주님의 뜻을 본받아 그 가르침을 영지민들에게 널리 알리며, 또한 백성들의 귀와 눈이 되어 영주님을 바로잡는, 바로 영주님과 영지민들의 대변인입니다.”
“그런 대변인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는 없겠지?”
가신이 영주보다 배를 불리면, 그것은 영주에 대한 도전 의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영주가 바뀐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부귀영화라 하시면?”
발칸은 인심 쓰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내 자네들에게 영지민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 고충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어서 말일세. 그들의 고통을 겪어 봐야 가신들도 영지민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지 않겠나? 뿐만 아니라, 우리 영지가 무척이나 사정이 딱하고 어렵더군.”
“컥!”
발칸이 말하는 바를 모르는 가신들은 없었다.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날강도가 되겠다는 소리 아닌가.
“그, 그런…….”
꺼리는 가신들을 보며 발칸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다.
“내 자네들에게 백성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빨리 하면 할수록 좋을 걸세. 어떠한가? 그동안 창고를 늘이기에 매우 골치가 썩었을 텐데 내가 그 골치라도 하나 없애 주지.”
“헉!”
헤르만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하오시면 얼마나…….”
살짝 운을 떼자 발칸은 덥석 물었다.
“80% 정도면 되지 않겠나?”
“파, 팔십?”
가신들의 입에서 저절로 경악스런 말이 튀어나왔다. 재산의 팔십이면 대부분을 영지에 귀속시키라는 말이 아닌가!
가신들의 숫자만 해도 열 명이 넘는다. 그들의 재산을 긁어모은다면 엄청난 액수가 모일 터.
그때 한 젊은 가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님! 그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이십니다! 그 돈을 모으는 데 저희가 얼마나…….”
“어허! 이보게, 자네!”
헤르만은 얼른 끼어들어 젊은 가신의 말을 막았다.
저 철없는 젊은 가신이 하는 말은 자칫 잘못하면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으로까지 해석될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젊은 가신은 헤르만의 으름장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다른 모든 가신들이 자신을 탓하는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발칸은 자리에 앉은 그 젊은 가신의 이름을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아조트라 합니다.”
“자네는 영지를 위해 한 목숨 바쳐 모은 재산을 헌납할 생각이 없는 겐가?”
아조트는 열심히 변명했다.
“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영주님, 아무리 그래도 가신의 재산을 사사로이 가져가신다는 것은…….”
“사사로이?”
발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사사로이라니? 영지가 힘들어 돈을 헌납하라는 것이 사사로이인가? 그리고 아까 헤르만 가신이 말하지 않았나? 이 영지의 모든 것은 내 소유물이라고. 가신인 자네의 돈 또한 내 것이 아닌가?”
“마, 말도 안…….”
발칸은 가볍게 혀를 놀렸다.
“이런, 쯧쯧! 자네는 이 영지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군. 아조트라 했나? 한 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몇 번이고 간에 기회를 주셔도 변하지 않습니다.”
“영주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지금부로 네놈의 작위를 박탈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
“헉!”
아조트는 물론이거니와 가신들 전부의 얼굴이 굳었다.
헤르만이 재빨리 혀를 놀렸다.
“여, 영주님! 아조트는 아직 젊어서 혈기에 치우친 나머지 영주님과 영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해결될 일이니 명령을 재고해 주십시오!”
“재고해 주십시오, 영주님!”
다른 가신들도 이때다 싶어 합심해서 말했지만 발칸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단단히 작정하고 내뱉은 말을 바꿀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뭐 하느냐? 어서 저놈을 끌고 나가라. 이 영지에서 추방시킬 것이다!”
덜컹!
문이 열리며 병사 두 명이 재빨리 들어와 아조트의 양팔을 붙잡고 끌고 나갔다.
“여, 영주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영주님! 제발, 영주님……!”
쿵!
아조트가 갑자기 추방당하자 회의실에 앉아 있던 가신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을 지켰다.
발칸은 지금까지 취해 왔던 행동과는 달리 회의실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쾅!
“어떤 가신이든 간에, 영주인 나와 영지에 대해 일할 생각 없으면 지금이라도 좋으니 가신을 때려치우시오. 그렇다면 재산만 몰수하고 이 영지에서 내쫓지는 않을 것이오.”
“…….”
발칸은 헤르만을 보았다.
“어떻소? 가신들과 내가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을 걸로 생각되는데. 적당히 회의를 해서 영지에 돈을 헌납하시오.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겨울을 나기 위해 메뚜기들을 무서워하는 영지민만 3만 명이나 되오.”
“……알겠습니다, 영주님. 저희들끼리 회의를 하여 내일까지 답변을 내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셨소.”
발칸이 곧바로 회의실을 나가자 헤르만의 한숨 소리가 길게 나왔다.
헤르만은 가신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쩔 것이오?”
“어쩌긴 뭘 어쩐다는 겁니까? 지금 현 영주는 어린 나이에 너무도 패악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어떤 영주가 영주 대리와 가신을 단번에 추방시킵니까?”
라헬 준남작이 헤르만의 말에 단번에 반박했다. 라헬 준남작은 가신들 중에서도 재산이 제일 많아 이번 영주의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른 가신들도 라헬 준남작의 의견을 따랐다.
“맞습니다! 영주와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가신들의 병력을 모은다면 당장 성의 수비 병력 정도는 무참히 깨부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것을 순순히 내놓습니까?”
“아조트 준남작을 복귀시키고, 현 영주를 몰아내야 합니다!”
헤르만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오. 신임 영주는 회의라는 목적으로 우리 가신들을 전부 회의실에 처박아 두고 홀로 나갔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오? 바로 여차하면 우리들을 인질로 삼을 생각이오. 우리가 바깥을 나간다면 다른 꾀를 부리지 못하게 감시자를 은밀하게 붙이겠지.”
“음…….”
가신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어쩌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이 회의실의 내용을 샅샅이 기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얕봤다. 젊어 보이는 얼굴에 속아 영주가 능구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니…….’
헤르만은 신음을 흘렸다.
어찌어찌 해서 운 좋게 영주성을 나가서 병력을 집결시켜도 지금 당장 가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숫자는 천 명 정도다.
영주성의 수비 병력은 500명.
영주성의 수비 병력이 대응하기도 전에 기습을 한다면 충분히 장악하여, 아조트 준남작을 복귀시킬 것을 강요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신들이 영주성에서 나간다면 영주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갈 터.
기습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제압당할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 있는 한은 그가 우리 목을 쥐고 있는 것과도 같소. 일단, 지금 당장 영주와 협상을 해야 하오.”
“크윽……!”
헤르만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라헬은 신음을 흘리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신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바깥과 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가 있으면 말해 보시오. 이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되었소.”
가신들의 얼굴이 죄다 서로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