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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4화)
chapter 2 내가 바로 영주다!(3)
라헬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회의실의 책상을 주먹으로 때렸다.
쾅!
“젠장! 8할을 빼앗기면 전 재산의 대부분이오! 그 돈을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이 영지를 뜨겠소이다! 그 돈이면 어떤 영지에 가도 마땅한 대우를 받을 것이오!”
가신들의 뜻도 대부분이 그랬다.
“맞소!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기에는 힘들 것 같소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타 영지에 가서 살겠소!”
“저도 그러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이 영주성을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헤르만은 라헬에 의해 가신들의 뜻이 변하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멍청한 자들! 지금 자신들이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건가? 영주가 국왕에게 아뢰는 순간 자신들을 받아 줄 영지는 어떤 곳도 없을 것인데!’
판도가 뒤바뀌어 버렸다.
라헬은 헤르만을 보며 물었다.
“헤르만 준남작은 어떻소? 우리와 뜻을 함께하겠소?”
헤르만은 분위기를 조심히 살폈다.
영주성에서 벗어나 타 영지로 도주하자는 의견에 8명이나 붙어 버렸다. 고작 헤르만 하나만 남은 것이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소! 우리는 지금 당장 벗어날 거요.”
“어쩔 수 없지만, 난 이 영지를 벗어날 수 없소.”
헤르만의 어려운 결정에 라헬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결정에 후회할 것이오. 그리고 혹시나…….”
자신들이 도주한 것을 얘기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헤르만은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 또한 의리가 있으니, 이 회의실에 적당히 앉아 있겠소.”
“고맙소! 헤르만 준남작!”
라헬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며 회의실 문을 조용히 열었다.
회의실 바깥을 지키던 병사들은 그들의 회의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별 의심 없이 그들을 보내 주었다.
헤르만은 그들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당신들이야말로 후회할 순간이 오게 될 것이오. 예전 프라시스 백작 같은 멍청한 영주가 아니니만큼, 당신들의 도주로 따위는 이미 그의 손아귀에 있을 테지.”
저벅저벅!
미로 같은 영주성을 발 빠르게 걷는 8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 뒤와 앞을 번갈아 보며 초조한 기색으로 진땀을 흘렸다. 그들 중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라헬 준남작님, 영주성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라헬 준남작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소. 곧 비밀통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비밀통로라는 말에 가신들도 반색의 기운을 띠었다.
엄중한 병사들이 지키는 곳보다는 비밀통로 쪽이 경계가 없으리라.
그들이 십 분쯤 더 걸었을 때 라헬이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헉헉! 저 모퉁이만 지나면 바로 비밀통로요! 이젠 우린 빠져나간 것과 다름없소이다!”
모퉁이와의 거리는 고작 30m 정도.
가신들은 지친 기색을 띠면서도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때, 가신들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죄다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저, 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발칸 신임 영주가 그 자리를 떡하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가신들이 멍한 순간에 병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그들을 포박했다.
미리 사전에 발칸에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라헬 준남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대, 대체 어떻게 여길……!”
“나를 너무 얕봤군. 혹시 아시오? 회의실에서 제일 가까운 비밀통로가 이쪽이라는 것을. 그대들이 도주한다는 것은 이미 예상 안이었소.”
라헬 준남작은 이제 갓 부임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 영주가 비밀통로의 존재 여부를 알고 있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라헬은 전신에서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놈들을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
“예, 영주님!”
병사들은 포박한 그들을 끌고 갔다. 가신들은 이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으아악! 여, 영주님……!”
“영주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들의 얼굴도 아조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 * *
똑똑!
누군가 헤르만의 집무실에 노크했다.
“누군가?”
“저입니다, 헤르만 님.”
집사였다.
“들어오게.”
덜컹!
집사는 흰머리가 지긋이 나 있는 노인이었다.
“지내는 데 불편은 없으십니까?”
헤르만이 작게 웃었다.
“후후! 지금 내 처지에 불평할 것은 아니지 않겠나? 집사도 알다시피 다른 가신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있으니.”
집사만이 간신히 영주성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헤르만만 동참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가신으로 예우를 받았으나, 감시가 철저한 감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는 시녀와 시종이 있는 따뜻한 방이라는 것과 다른 가신들은 차가운 감옥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헤르만 님, 드디어 영주가 움직인 모양입니다.”
헤르만의 두 눈이 변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군.”
가신들을 투옥한 지가 벌써 3일이 지났다.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더러운 바닥과 살 떨리는 추위, 푸석푸석한 빵과 수프는 정신을 한없이 떨어뜨릴 것이었다.
그 감옥 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자책하기에는 충분한 3일.
한없이 정신력을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집사가 헤르만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분명 칼자루는 영주가 쥐고 있지. 가신들이 영지를 배반하는 행위는 곧 죽음과도 같을 터. 가신들도 지금쯤 정신이 반쯤 나갔을 테니, 영주가 투옥 생활에서 풀어 준다고만 하면 어떤 협상이고 간에 응할 것이네.”
“그럼……!”
“최대한 우리 쪽이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것이 좋아.”
“영주가 응해 주겠습니까?”
헤르만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칼자루는 발칸이 쥐고 있을 터.
“안 되면 되게 해야지.”
헤르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영주성 지하 2층과 3층은 지독한 죄수들을 투옥하는 감옥이 존재한다.
발칸은 끝없이 이어진 원형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끼이익!
거대한 철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발칸은 그곳이 감옥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발을 내디뎠다.
똑. 똑.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천장에서 고인 습기가 물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복도 끝 방입니다, 영주님.”
미리 사전 연락을 받은 간수가 발칸을 안내했다. 발칸은 간수를 보며 물었다.
“얘기한 대로 만들어 놓았는가?”
“예. 하루에 한 번 빵과 수프를 배급했습니다. 물조차 몇 모금 주지 않았으니 지금쯤이면 정신이 황폐해져 있을 것입니다.”
“좋군!”
발칸이 복도 끝 방에 도착하자 간수는 자리를 떠났다.
아주 작은 방에 갇혀 있는 8명의 가신들.
“어, 어…….”
그들은 발칸을 발견하자 입을 쩌억 벌렸다.
“투옥생활이 어떠한가? 지낼 만한가?”
“이익!”
라헬 준남작은 이를 갈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감옥에 갇혔을 때는 발칸을 원망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었다.
하지만 라헬 준남작만은 발칸을 향한 원망의 눈빛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아직도 힘이 남아 있나 보군. 그렇다면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다, 이건가? 그렇다면 나는 나가도록 하지.”
발칸이 곧바로 등을 돌려 감옥을 나가려고 하자 라헬이 발칸을 잡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영주!”
고작 3일간 있었던 장소가 따사로운 방 안이 아니라 감옥으로 바뀌었지만 그들의 정신 상태까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들은 하루라도 이 지옥 같은 감옥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힐끔 라헬을 바라본 발칸이 살짝 웃더니 그대로 감옥을 나가 버렸다.
“저, 저런……!”
발칸의 행동에 라헬은 허탈함을 느꼈지만 그런 허탈감을 느낀 자는 라헬뿐만이 아니었다.
영주가 협상을 하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헤르만은 곧바로 돌아가는 모습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3일 만에 움직이나 했더니 고작 감옥 구경 한 번 하고 나온 것이 전부라니?
발칸의 그런 이상 행동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하루에 한 번은 찾아오되 두 마디 이상의 얘기를 나누지 않는 것.
그렇게 일주일을 넘어 열흘이 되었을 때, 결국 발칸이 원하는 대답이 라헬에게서 튀어나왔다.
“영주님, 영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영지의 모든 것은 영주님의 소유물입니다.”
말투도 공손한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찾아와 한마디만 하고 사라지는 영주에 대해 가신들 모두가 두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발칸은 선심을 베풀듯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만 잘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투옥생활을 끝낼 수 있을 걸세.”
꿀꺽―!
가신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라헬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가신들의 우두머리는 라헬과 다름없었다.
“물론입니다, 영주님.”
“그럼, 지금 당장 묻겠네. 프라시스 영지는 이번에도 메뚜기 떼들의 공격이 심각해질 것으로 사료되네. 하지만 더 이상 이대로 메뚜기 떼들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을 수는 없지.”
배가 고프고 지친 상황에서도 라헬의 머리가 어떤 때보다도 재빨리 돌아갔다.
“우리는 메뚜기 떼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낼 생각이네. 하지만 그 방도를 찾아내는 데만 해도 상당한 돈과 당장 이번 겨울을 지낼 만한 작황이 나올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지. 난 가신들이 영지가 힘이 들 때 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네.”
“그, 그러면 전재산의 90%를…….”
라헬이 살짝 운을 떼자 발칸의 얼굴이 구겨졌다.
90%만 해도 가신들이 커다란 결심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상외의 수확.
하지만 발칸 얼굴이 구겨지자 라헬이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 아니, 95%를 드리겠습니다!”
발칸은 쇠창살 틈으로 라헬의 두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기어 주니 이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가신들이 모은 돈은 우리 영주를 되살리는 훌륭한 곳에 쓰일 것이네. 나 또한 영지의 사정이 넉넉해지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부여하도록 하지.”
“커, 컥!”
인심을 쓰며 말하는 발칸이었지만, 대부분의 가신들은 졸도해 버렸다.
몇몇 가신들만이 정신을 차리고 발칸에게 말했다.
“여, 영주님, 일단 감옥에서…….”
“아, 그렇지.”
여덟 명의 가신들은 열흘이나 되는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투옥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헉!”
롬펠은 발칸의 가공할 능력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전 재산이 고작 4만 골드로 자금난에 허덕인다고 한 지가 고작 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뿐인데, 벌써 창고에 100만 골드 이상이 쌓여 있었다.
“끄끅!”
그리고 행정관리들이 돈을 보자 곧바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