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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6화)
chapter 3 자유도시 에밀(2)


날이 밝자 발칸은 프리 머천트 상단에 합류했다.
“당신이 우리 상단과 동행한다는 그 사람이오?”
키가 2미터는 될 법한 대머리 거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발칸에게 물었다.
발칸은 검은 후드를 살짝 손가락으로 벗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이라 하오. 발칸이라 불러 주시오.”
거인이 흥미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름 따위는 별로 상관없소. 수도까지 동행을 부탁받아서 할 수 없이 하는 것뿐이니, 나쁜 꼴 보기 싫으면 이제부터 나에게 말 걸지 마쇼.”
발칸이 미소를 지었다.
“명심하지.”
아무래도 상단 호위무사 중 하나인 듯싶었다. 그 거인이 입은 옷을 호위무사들 전부가 입고 있었다.
발칸 또한 그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적당한 짐마차 뒤로 가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 청했다.
상단의 맨 앞에서는 두 남자가 이야기를 벌이고 있었다.
“물건은?”
“몇 차례나 확인해 보았습니다.”
“수상한 자는 있던가?”
“이 영지에서 한 남자가 동행의 뜻을 밝혔습니다. 롬펠 행정관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동행을 허락했습니다만, 상단 마법사들이나 익스퍼트 급 용병들도 별로 신경 쓸 자는 아니랍니다.”
“음, 그자가 물건을 노리는 어쌔신이나 정령사가 아니오?”
“나이가 고작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4서클 마법사와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른 A급 용병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프리 머천트의 아일란 왕국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걱정은 없는 거로군.”
“예.”
“자,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지부장의 말에 상단 무사들의 대장 격인 남자가 말 위에 올라타서는 크게 외쳤다.
“출발하라!”

프리 머천트 상단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여유로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호위무사이건 상인이건 말이건 이런 움직임에 모두 익숙한 모습을 보면 상당한 베테랑들인 듯했다.
발칸은 생리현상을 겪을 때 빼고는 짐마차 안에 틀어박혀 편안히 앉아 있었다.
그가 할 일이라고는 20일이 넘게 걸리는 수도까지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짐꾼들의 밥을 한 숟갈 얻어먹거나 정 배고프면 근처 과일을 따다가 먹었다.
길이 험난하지만 몬스터들의 공격도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호위무사 숫자만 해도 물경 100명이었고 모두들 소드 익스퍼트 바로 아래 단계인 소드맨 최상급에 이른 실력자들이었다.
소드맨 최상급은 검술을 최소 10년 이상 연마했다는 뜻.
성인의 어른보다도 3배 이상 날렵하고 강한 힘을 가진 오크들도 이 소드맨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당하고 나자 오크들도 별다른 공격을 해 오지 않았다. 오크들도 두뇌가 인간들만큼은 못해도 몬스터들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나았다.
인간의 실력이 생각보다 까다롭다고 생각하자 곧바로 손을 놓은 것이다.
그 이후로는 아주 편안한 여행이었다.
첫 번째 습격이 있기까지는.

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에 발칸은 눈을 떴다. 분명 장작불이 약해지자 불침번을 서고 있던 용병이 다시 불을 살리려고 장작을 태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자가 있었다. 호위무사 옷을 입고 있는 2m의 거인이었다.
“뭔 일이냐?”
불침번을 서고 있던 호위무사가 거인을 보고 묻자 거인이 허리춤을 붙잡았다.
“헤헤! 소피가 마려워서.”
“얼른 갔다 오너라.”
“예예.”
발칸은 그 거인이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그에게 관심을 뗐다.
‘무료하군.’
이럴 줄 알았으면 롬펠이라든가 흑암의 탑의 원로들이라도 끌고 왔어야 한다.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롬펠에게는 여럿이 간다고 말해 놓고 혼자 덜컥 와 버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무료함을 달래기에는 힘들었다.
말이라도 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발칸은 사람 사귀기에는 그다지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침번을 서는 무사들을 보니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발칸이 한숨을 푸욱 쉬더니 거인이 사라진 수풀 속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늦군.’
소피라 하기에 금방 돌아올 줄 알았지만 거인은 자리를 비운 이후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발칸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는데 그때 그의 감각에 여러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상단의 숙영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를 점한 그들의 숫자는 일이십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50명 이상이다. 자는 사이에 당하면 손을 쓸 시간도 없이 끝나겠군.’
슈루룩―!
그들이 공격을 감행했는지 어둠에 믿힌 검은 표창이 불침번을 서고 있던 무사들의 심장에 박혔다.
“컥!”
“악!”
그들의 짧은 비명 소리는 사람들을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털썩!
그들의 시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 나가도 그 누구 하나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수풀 사이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끄덕이더니 몇몇 복면인들이 한 마차를 향해 빠르게 걸어 나갔다.
하필이면 발칸이 누워 있던 마차가 보이는 바로 뒤 마차였다.
‘저자는?’
수풀 속에서는 호위무사 옷을 입고 있던 거인이 이 상황을 모두 보고 있었다.
‘한통속이었나?’
발칸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한통속이든 아니든 간에 그에게 별로 좋은 이미지의 남자는 아니었다.
발칸은 한곳에 누워 있는 호위무사들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도와줘야 하나?’
하지만 발칸의 생각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다.
“매직 애로우(Magic arrow)!”
하얀 빛깔을 띤 마법 화살 수십여 개가 떠올랐다. 그 화살들이 복면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퍼퍼퍼펑―!
그것을 시발점으로 잠을 자던 무사들의 눈이 떠졌다. 그런 무사들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적의 습격이다!”
“적이다!”
복면인들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단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쳐라!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
챙챙챙!
복면인들이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무사들을 상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숫자는 2배나 차이가 났지만 복면인들의 공격은 순식간에 그 차이를 메웠다.
그사이 발칸은 매직 애로우 마법을 발현시킨 자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모름지기 마법사는 자신의 정체와 위치를 숨겨야 위력을 발휘한다.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후방에 숨어 지원 공격을 할 때 적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하기 쉽고 살상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마법을 날린 마법사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시동어를 당당하게 외쳤다.
‘꼬마?’
아니, 꼬마라 부르기엔 좀 더 성숙했다.
키도 어느 정도 크고 하니 여인이라 함이 옳다. 하지만 발칸이 보기에는 조심성 없는 애송이 마법사일 뿐이었다.
“마법사를 죽여라!”
“마법사가 먼저다!”
마법사의 힘은 판도를 뒤바꾸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매직 애로우를 발현시킨 그 여인은 곧바로 최우선 표적으로 변경되었다.
“아가씨를 보호하라!”
‘아무래도 재산가나 귀족의 영애인 모양이군. 실전 경험도 없는 주제에 저리도 당당히 나서다니.’
발칸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그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호위무사들이 그녀를 겹겹이 둘러쌌다.
“만만치 않은 놈들이다. 놈들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알겠느냐?”
“예!”
복면인들은 소도나 단검으로 호위무사들과 격전을 벌였다.
챙챙!
“크악!”
“으아악!”
시간이 지날수록 복면인들의 승세가 점점 높아졌다.
복면인은 다치거나 죽은 자가 한 명도 없는 방면 호위무사들은 빠른 속도로 중상을 입거나 죽어 버려 전투 불능이 되어 갔다.
“사, 살려 줘!”
뚜둑!
목숨을 구걸하던 호위무사의 목이 꺾였다.
“크아아악!”
호위무사 하나가 복면인에게 심장이 꿰뚫렸다.
“크흐흐!”
복면인이 진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다음 타깃을 찾으려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붉은 섬광이 그의 아킬레스건을 꿰뚫었다.
“어?”
그 어느 고통도, 감각에 어떤 공격조차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리의 감각이 사라지면서 그대로 무너졌다.
“놈이 쓰러졌다! 저놈을 죽여라!”
복면인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호위무사들이 자리를 이탈하고 나와 복면인을 능지처참했다.
“와아!”
그로 인해 호위무사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또한 공격에 슬슬 복면인들의 공격에 익숙해져 쓰러지는 호위무사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흠.”
발칸은 손가락을 거뒀다.
발칸이 사용한 마법은 바로 레이저 포인트(Laser point).
3서클의 흑마법이다.
상대방을 향해 검지를 펼치고 마법을 사용하면 그 사용자에게 3초 후 빠른 속도로 마법이 날아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용하면 감각이 초인이 아닌 이상은 상대방의 위치를 찾기 전에 죽고 마는 것이다.
흑마법은 백마법과 달리 그 용도가 살상마법으로 발전을 해 왔기 때문에, 같은 서클의 백마법사와 붙는다 해도 십중팔구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잔혹했다.
하지만 흑마법이란 것이 배우기 어렵고 서클의 성장이 힘들기 때문에 대륙에 분포된 흑마법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른 마탑에 비해 흑암의 탑의 제자들이 고작 50명밖에 되지 않는 이유도 그러했다.
발칸은 계속 그런 식으로 상단을 도와주었다.
워낙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마법이기에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했다.
또한 발칸도 아일란 왕국에서 흑마법사로 낙인찍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조심히 마법을 사용했다.

* * *

“사상자 62명, 부상자 16명입니다. 전투 가능 인원은 22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대로 수도로 가기에는 벅찹니다.”
“으음……!”
아일란 왕국 프리 머천트 상단의 지부장은 신음을 토해 냈다.
근처 도시에 들러서 인원을 보충한다 해도 5일은 걸릴 터.
‘상단 무사들이 벌써 78명이나 전투 불능. 엄청난 놈들의 소임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발을 빼는 것이 옳은가, 계속 진행해야 하는가!’
길은 세 개.
이대로 수도까지 가느냐, 아니면 도시에 들러서 용병들을 보충하고 출발하느냐, 아니면 상단의 신뢰도는 지장이 가겠지만 발을 빼서 목숨을 연명하느냐.
따지고 보면 네 개라고 할 수도 있다.
놈들에게 몰살을 당하는 것까지.
‘물건 운송이 이번만큼 지독한 적은 없었거늘.’
아끼는 무사들이 여럿 죽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아가씨께서 방금 전 전투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쉬다 가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음!”
지부장 하렌이 마차 안에 누워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인은 프리 머천트 상단주의 무남독녀였다.
그녀에게 잘못이라도 생긴다면 그는 지금 당장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도시로 간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놈들이 다시 한 번 공격해 온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으니.
“지금부터 신속히 시체를 묻고, 방향을 틀어서 자유도시 에밀로 향할 것이다! 어서 말 머리를 돌려라!”
“예!”
발칸은 상단 무사대장의 외침에 눈을 잠시 떴다가 다시 감았다.
‘에밀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