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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7화)
chapter 4 움직임(1)


자유도시 에밀.
귀족이 다스리는 것이 아닌, 평민들 중에서 시장을 선출하여 통솔하는 도시.
특이하다면 특이한 도시였지만 발칸은 이미 흑암의 탑을 세울 곳을 찾기 위해 대륙을 떠돌며 수많은 자유도시를 거쳤기에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이랴, 이랴.”
짐마차는 관문을 통과하고 한참을 더 움직인 후에야 멈췄다.
‘흠.’
후드를 살짝 벗어 주위를 둘러본 발칸은 이곳이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후미진 여관임을 알 수 있었다.
프리 머천트 지부장 하렌이 호위무사 대장을 보며 말했다.
“무거운 짐마차는 전부 다 팔아 버리시오. 정 팔 수 없으면, 싼값에 넘겨도 좋소. 지금 우리는 그런 물건에 연연할 때가 아니오.”
각 영지에서 특산품만을 사 와서 파는 것만큼 많은 이윤이 남는 것이 없지만, 하렌은 그것들을 모두 포기했다.
한시라도 빨리 재정비를 하고 도착하는 것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다.
복면인들이 노린 물건.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꼭 지켜 내야 했다.
하렌은 그것을 위해 짐마차를 팔고 행렬의 이동 속도를 높이려는 속셈이었다.
“몇 놈들만 나를 따라와라!”
“예!”
호위무사 대장이 무사들 몇을 끌고 사라졌다.
발칸은 짐마차를 보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동 수단이 마차에서 두 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하렌은 여관으로 들어가서 잠시 여관 주인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왔다.
“며칠 정도 이 여관을 통째로 빌렸다. 며칠 후면 다시 출발할 것이니, 그때까지 여독이라도 풀고 있어라.”
짐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툭 튀어 나왔다.
차라리 며칠 통째로 빌릴 돈으로 좋은 여관에서 지내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겠지만, 사람의 왕래가 적은 이런 여관이 적의 기습에도 움직임이 용의했다.
하렌 지부장의 선택은 아주 효과적인 것이다.
“그럼 편히 쉬고들 있어라. 난 용병 길드로 가 볼 테니.”
그렇게 하렌 지부장까지 사라지자 짐꾼들과 호위무사들은 부상자들을 옮긴 뒤에 테이블 한 자리씩 차지하여 음식을 시키기 시작했다.
호위무사들만 해도 100명 정도의 인원이었지만, 단 한순간에 22명만 남아 있었다.
짐꾼들의 피해도 적은 것이 아니었다.
마차의 이동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는지 호위무사들만큼이나 짐꾼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발칸은 방을 하나 구하고 바로 여관을 나섰다. 바람이라도 쐬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툭.
바깥에 나가는 발칸의 몸이 이제 막 여관으로 들어서려던 한 여인의 어깨와 부딪쳤다.
“앗!”
연약해 보이는 발칸의 몸과는 달리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여인만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인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 뭐야…….”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호위무사들이 재빨리 여인의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이 옷이 얼마짜린데…….”
그 여인이 가볍게 투정을 부리자 호위무사들의 눈에서 불통이 튀었다.
호위무사들 중 하나가 발칸을 보며 성을 냈다.
“이놈! 이분이 감히 누구인 줄 알고! 어서 아가씨께 사과해라!”
“미안하게 됐소.”
발칸은 짧게 사과를 하고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호위무사들은 발칸의 태도에 화가 났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을 개소리로 알았구나! 천한 놈 주제에 감히! 상단 어디의 짐꾼이냐? 아니, 일단 얼굴을 봐야겠다. 후드를 벗어 보아라!”
발칸은 호위무사의 요청에 손을 들어 올려 후드를 벗었다.
그런데 발칸의 얼굴이 드러나자 여인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발칸은 나이에 비해서 엄청난 동안임은 물론이거니와 상당히 준수한 얼굴.
거칠고 각진 호위무사들만 봐 왔던 여인으로서는 묘한 기분에 들 만도 했다.
“난 상단의 짐꾼이 아니오. 그러니 상관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오.”
“짐꾼이 아니다? 그럼 어째서 이 여관에 있는 것이냐?”
“상단과 동행하기로 한 것뿐이오. 무례를 저질렀다면 내 사과하리다.”
호위무사 중 하나의 얼굴이 변했다.
“설마 네놈이 그 어쌔신들을 부른 것은 아니더냐?”
“내가 그랬다면 무슨 염치로 계속 이 상단에 남아 있겠소?”
“어쌔신들에게 염치가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발칸은 코웃음을 쳤다.
“프리 머천트 상단 사람들은 다 그렇소? 동행한 자를 어쌔신으로 몰아붙이고 사과한 자를 어찌 천한 자라 욕한단 말이오. 귀한 집의 영애를 모시는 호위무사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귀해졌고 언제부터 같은 평민을 아래로 보기 시작한 거요? 당신들은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라도 되오?”
“이, 이 새끼가 정말……!”
호위무사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하면서 손에서 검을 뽑으려는 찰나, 여인이 중간에 난입했다.
“아, 정말……! 나 때문에 싸울 것까진 없잖아요? 네? 호위무사 오빠들도 이제 그만두면 좋겠고 검은 로브 아저씨도 이제 관두세요. 옷만 좀 더러워졌지 전 괜찮으니까요.”
그녀가 온몸으로 말리자 호위무사들은 이를 갈며 무기를 넣었다.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거라. 언제 네놈의 목을 딸지도 모르는 일이니.”
발칸은 그 말을 듣자 걸음을 우뚝 멈췄다.
“크흐흐!”
“푸하하!”
호위무사들 간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발칸은 입술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명심하겠소.”
“그럼, 명심해야지.”
탁탁!
호위무사들이 발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사라졌다. 아무래도 발칸이 지금 자신들에게 잔뜩 겁을 먹어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호위무사들 중에는 제법 마나를 다루며 익스퍼트 급에 들어선 자도 적지 않았다.
중요한 집안의 영애를 지키는 일이니만큼, 그들의 실력 하나하나가 모두 일당백이었다.
발칸은 뒤를 돌아보며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바로 어젯밤,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서 복면인들의 기습을 알린 마법사였다.
‘풋내기 애송이. 성격은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설치는 기질이 너무 강해. 하지만…….’
그런데 요상하게 갑자기 그 여인도 뒤를 돌아보더니 발칸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서는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발칸의 앞에 당당하게 다가와 그 고운 이마를 찡그리는 것이 아닌가.
“아, 그리고 검은 로브 아저씨? 우리 프리 머천트 상단이 전부 다 그런 건 아니거든요? 명심해 주셨으면 하네요.”
“……후후. 그럼 사람에 맞춰 차별을 한단 뜻이오?”
“아니요, 절대! 그럴 리가 없죠. 저희에게는 농노든 노예든 귀족이든 모두 똑같은 손님이니까요.”
“그렇소이까?”
발칸은 짧게 웃었다.
“그럼…… 기대해 보겠소이다.”
“아, 자, 잠깐만요!”
발칸이 곧바로 등을 돌리더니 사라졌다. 그 여인은 갑자기 분통을 터트렸다.
“아, 정말! 뭐야, 진짜…….”

“당차긴 하군. 백마법이 아닌 흑마법의 길로 들어섰으면 더 대성할 상이건만.”
흑암의 탑주이면서 프라시스 영지의 영주인 자신에게 그렇게 당당함을 보일 수 있다니.
물론 자신의 신분을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발칸이 본 그 여인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자신의 뜻을 굽힐 성격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의 영애인 줄은 몰라도 그런 당찬 성격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응?”
발칸은 바로 그 순간, 저 멀리서 호위무사 중에 어제 그 격전 중 유일하게 나타나지 않고 의심을 받은 거인을 볼 수 있었다.
그 거인은 호위무사 복장도 벗어던진 채로 은밀하게 주변을 살펴보면서 한적한 골목길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커다란 몸을 아무리 웅크려 봐야 숨길 수 없는 법이지.”
발칸은 사납게 웃었다.

* * *

“쫓아온 자는 없소?”
콧수염이 난 중년의 남자가 거인을 보며 묻자,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거인의 이름은 바론.
수년 전에 은밀하게 프리 머천트 상단에 잠입한 로열 크로이츠 상단의 간부 중 하나였다.
로열 크로이츠 상단은 프리 머천트 상단과 더불어 대륙 십대상단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상단의 이름에서부터 시작해서 상품까지 프리 머천트 상단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그들에게 프리 머천트 상단은 항상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바론은 콧수염이 난 중년인을 보며 따지듯 물었다.
“헌데 어제 그 습격이 실패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오. 그토록 그 물건을 회수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하더니.”
“……일왕자 저하께서 보내 주신 특급 암살범들. 왕자 저하를 위해 양성된 자들인데 당장 A급 어쌔신들과 맞붙어도 지지 않을 만큼의 강한 힘을 지녔다 들었소만…….”
A급 어쌔신들이 어떠한 자들인가. 암살만 한다면 익스퍼트 급도 능히 죽일 수 있는 살수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찌 실패한 거요?”
“아무리 어쌔신들이 익스퍼트 급의 무사를 암살할 수 있다고 해도, 기습이 실패하면 소드맨 정도도 상대하기 버거운 법이오. 처음엔 승기를 잡았으나 마법사 한 명이 가세하자마자 곧바로 뒤집히더군.”
“끄응! 어찌 그래서야. 이래서는 우리 로열 크로이츠 상단의 이름이 말이 아닐 것이오. 일왕자 저하께 아뢰어 어서 병력 보충을 요구하시오.”
“그것이…… 좀 힘들 걸로 보이오. 일왕자 저하는 지금 우리 상단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고 계시오. 아무래도 왕자라는 신분 때문인지 이번 식량 폭등에 우리 상단이 개입했다는 걸 알고 계시는 듯했소.”
현재 아일란 왕국은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아일란 왕국의 왕은 투병 생활을 겪고 있고, 일왕자와 이왕자 간의 후계자 구도에서 여러 귀족들과 상단이 줄을 대고 서로 맞붙고 있는 셈이었다.
로열 크로이츠 상단은 일왕자에 줄을 대고 있고 프리 머천트 상단은 이왕자 파에 붙어 있는 상황.
왕이 서거해 버리면 그 왕위 계승권은 당연히 장남인 일왕자가 이어 받는다.
하지만 그 일왕자는 후궁의 자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가 나면 다혈질이 되기에, 왕자로서의 소양이 없었다.
반면에 정실의 자식인 이왕자는 생각이 깊고 가치관이 아주 뚜렷한 자다.
어떤 지식이든 간에 박식하며 예의를 알고 속마음을 감출 줄 안다.
하나 그런 재주도 왕이 서거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왕위 계승권을 일왕자가 지니게 되어 이왕자는 단숨에 숙청당하고 말게 될 터이니.
프리 머천트 상단에서 이번 수도로 움직이는 이유는 바로 약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프리 머천트 상단에서는 이왕자를 왕으로 올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왕을 상단의 이윤을 위해 더 오래 살려 두어야 했다.
프리 머천트 상단에서는 자신들이 옮기는 이 약의 정체를 숨기고 단순히 특산품을 팔아 치우는 평범한 상단이라 여기게 만들려 했지만, 어디서부터인지 정보가 새어 로열 크로이츠 상단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바로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론이었다.
훌륭한 배신자 역할을 톡톡하게 해낸 것이다.
바론은 인상을 찡그렸다.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다고 해도 그들을 저지할 방법이 없소이다. 좋은 방법이 없겠소?”
바론의 말에 콧수염의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 설마, 나 데이브가 그 정도 손도 못 써 둔 거라 생각하는 거요? 잊으셨소? 이 에밀의 시장이 바로 일왕자 파에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평민인 시장으로서는 직접적으로 프리 머천트 상단에 도움을 주거나 간섭을 할 수 없지만 간접적이라면 또 다르다.
“그럼?”
바론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콧수염의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전 이곳 인근에 위치한 영지에서 오크 부락이 발견되었소. 그리고 전날, 이곳 대부분의 용병들이 그 오크 부락을 퇴치하러 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