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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9화)
chapter 5 도주와 추격(2)
“헉…… 헉…… 헉……!”
하렌은 거친 숨소리를 토해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30분 동안 도주한 보람이 있었는지 파란 망토를 입은 레인저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 이제 좀 쉬어 가면 안 되겠소?”
상인 출신인 하렌이 호위무사들 틈에 끼어서 도주하기에는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울프 레인저와 조우했을 당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잃어버려 계속해서 뛰어와야 했던 것이다.
에반은 호들갑을 떨었다.
“우, 울프 레인저가 뒤를 쫓아오는 이상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전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
에반이 슬쩍 발을 떼려 하자 하렌의 얼굴이 변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비싼 값에 고용했으니 가이드에게 위험이 따르는 건 당연하지 않소?”
“위험도 위험 나름 아닙니까? 울프 레인저가 개입되었다면 천금을 주었다고 해도 거절했을 것입니다.”
“이, 이런…….”
하렌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돈이라면 더 드리겠소. 그러니 수도까지 제발 부탁하오. 아니면 울프 레인저들과 조우하게 되면 그때 도망가도 되니 길을 안내해 주시오.”
“도, 돈이라면 이젠 사양입니다. 받았던 선금은 돌려 드리겠으니 제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호위무사 대장도 한몫 거들어서 하렌의 의견에 동조했다.
“나도 부탁하는 바요. 어떻게 안 되겠소? 아니면 근처 도시까지라도 데려다 주시오. 거기서부터는 알아서 할 테니.”
“끄응!”
에반 또한 곤란한 처지였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오, 그게 대체 뭐요?”
하렌이 귀를 열고 들었다.
“인원을 정확히 5무리로 나누어 도주하는 방식입니다. 운이 좋으면 다음 도시까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변장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있으면 필시 들킬 터이니.”
하렌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저 또한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 봅니다, 지부장님.”
수도까지 이 물건을 배달하지 못하면 아일란 왕국 프리 머천트 상단의 지부장인 자신에게 어떠한 철퇴가 떨어질지 모른다.
운이 없으면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니만큼 에반의 의견에 적극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아가씨를 이곳으로 데려오게. 아가씨는 우리가 모셔야겠소.”
“알겠습니다.”
프리 머천트 상단주의 무남독녀.
세실리아.
고운 금발에 커다란 눈망울, 백옥 같은 피부에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빛이 나는 듯 눈이 부실 만한 외모였다.
“무슨 일이에요?”
“잠시 이야기를 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만큼 빨리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해 보세요.”
“저희는 이제 병력을 나누어 놈들의 공격에 대비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세실리아 아가씨의 복장은 적들의 눈에 띄니 도주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세실리아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요, 지부장님. 그럼 지금 호위무사들을 버리고 도주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도주가 아닙니다. 최소한 뭉쳐 있다가 모두 죽는 것을 막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익스퍼트 급의 고수들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200명의 숫자가 있다고 해도 익스퍼트 급 50명이면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아니,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기지 못할 이유라면 몇 가지 더 댈 수도 있다. 이곳이 바로 숲이라는 점으로 그들에게 몇 배는 유리한 고지이며, 자신들은 이미 제법 많이 지쳐 있는 상황이라는 것.
무엇 하나 프리 머천트 상단에 유리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하렌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꼬리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가 있었다.
“그럼 각개격파당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우리가 살자고 무사들을 전부 버리실 생각을 하는 거죠? 예? 지부장님, 말씀 좀 해 보시라고요.”
하렌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는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리광 부린다고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쪼록 지금 저의 판단에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죄라면 살아남은 뒤에 받겠습니다. 여봐라! 어서 세실리아 아가씨를 변장시켜라! 시간이 없다!”
하렌의 말에 시녀들이 세실리아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하렌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성을 냈다.
“어서!”
“예, 예!”
시녀들이 득달같이 세실리아에게 달려들고 하렌이 호위무사의 옷을 하나 가져와 그녀들에게 주었다.
“자, 잠깐만요, 지부장님! 이놈들, 어서 놓지 못하겠느냐?”
시녀들은 묵묵부답으로 그녀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호위무사의 옷을 입혔다.
하렌은 호위무사 대장에게 말했다.
“어서 5무리로 나누도록 하시오. 시간이 없소이다.”
“알겠습니다.”
발칸은 정신없이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자신이 도주해 온 뒤쪽을 바라보았다.
마나나 마기는 작은 움직임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기에 발칸 같은 실력자라면 수백 수천 미터 바깥에 있는 마나의 움직임도 마음만 먹으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스스.
딸랑딸랑!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방울 소리를 냈다.
불침번이나 적들의 침입에 자주 쓰이는 1서클 알람 마법.
누군가가 10분 거리에서 알람 마법을 건드린 것인지 발칸의 귀에 방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발칸은 하렌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목적은 수도에 도착하는 것. 이쯤에서 충분히 발을 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거인 바론과 콧수염 남자 데이브의 대화를 듣고 나자 이 일에 왕자가 개입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칸 자신 역시 한 사람의 귀족.
왕위 쟁탈전은 눈여겨볼 만했다.
또한 목숨이 위협당할 정도라면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있었다.
흑마법사이자 네크로맨서.
그리고 순수한 실력으로 흑암의 탑주에 오른 발칸.
그 발칸이 웃음을 띤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
“이곳에서 수를 나누어 5갈래로 도주했습니다. 흔적을 보니 출발한 시간은 고작 15분을 넘었습니다. 하나하나 찾을까요?”
“제법 머리를 썼군.”
벡터 단장이 흔적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너무 대놓고 흔적을 남겨 두어 편하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여러 갈래로 퍼지면 그만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제일 간편하지만 가장 곤혹스런 작전.
“스카이 아이(Sky eye)들을 풀어라.”
“예? 스카이 아이 말씀이십니까?”
마도국 자하드에서 은밀하게 들여온 스카이 아이.
상대방의 채취를 맡으면 6시간 내내 줄곧 쫓아다니는 귀신같은 추적술의 명수였다.
흑마법사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는 스카이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눈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지만, 실상 날아다니는 높이는 고작 2m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속도만큼은 레인저인 그들도 전력을 다해야만 쫓을 수 있을 정도였다.
푸릉푸릉!
레인저 한 명이 바닥에 거칠게 투레질하는 말 한 마리를 끌고 오자 벡터는 그 말에 매여진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를 열자 줄곧 감겨 있던 작은 눈이 번쩍 떠졌다.
“맡아라.”
벡터는 곧바로 말안장에 스카이 아이의 눈을 가져다 댔다.
그 후로 1분이 지나자 냄새를 기억했다는 듯이 스카이 아이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파닥파닥!
스카이 아이가 작은 날개를 서서히 움직이더니 빠른 속도로 한 방향으로 사라졌다.
벡터는 힐끔 하늘을 바라보았다.
숲 근처의 하늘만 먹구름이 끼며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순간 벡터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흠…… 따라가자!”
그들의 발이 곧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한 호위무사가 이렇게 물었다.
“저놈은 어째서 저희와 같이 움직이는 겁니까?”
하렌도 설마 발칸이 자신들과 같이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렇게 팀을 구성한 호위무사 대장을 원망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짐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처럼 빠르게 움직일 것이네. 따라올 수 있겠나?”
하렌이 묻자 발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따라가겠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빠져도 좋네. 레인저들도 설마 무리에서 떨어진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네.”
“스스로 힘이 부친다 생각하면 나가겠습니다.”
“음…….”
이 기회에 발칸을 떼어 놓으려 했던 하렌은 발칸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았네. 꼭 그리해 주시게.”
하렌은 완강한 발칸의 태도에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호위무사 대장이 발칸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걸었다.
“동행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물어보게 되는 거니 이해하시길 바라오.”
“물론입니다.”
발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곳 호위무사의 대장이오. 이름은 터크. 사람들이 터크 대장이라 부르고 있소이다. 터크라 부르시오.”
“난 발칸입니다. 발칸이라 불러 주십시오.”
“발칸?”
결코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름만으로도 상대방에게 공포를 줄 만한 그런 섬뜩한 이름이었다.
그때 깊게 눌러쓴 후드 사이에서 강렬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무슨 놈의 눈이…….’
이름보다도 더욱 섬뜩하게 느낄 정도의 그런 안광이었다.
살기도 없고 공격적인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거늘, 등 뒤에서 땀이 흘렀다.
어느새 손이 검의 그립을 만지고 있다.
“괜찮으십니까?”
발칸이 묻자 터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음! 그, 그렇소. 아무것도 아니니 심려 마시오. 그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말이오, 혹시 검술을 할 줄 아시오?”
발칸이 고개를 내저으며 이 상황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후후! 할 줄 알 리가 없잖습니까? 내 꼴을 보십시오.”
검 한 자루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창술이나 궁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혹시 추적술이나 사냥술 등등 그런 기술들은?”
이번에도 발칸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책에서 본 적은 있지만, 지금 당장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책은 죽은 지식이다. 경험하기 전까지는 참고는 하되,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약초를 사용하거나 구별하는 법은 어떠하오?”
“그런 것은 조금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식용법 정도나 가벼운 외상에 쓸 만한 약초를 구별할 줄 아는 정도이니…….”
“흠……!”
역시 생각대로 전혀 쓸모가 없었다. 혹시 몰라 터크는 세실리아에게 다가가 귀띔을 했다.
“아가씨, 아가씨가 보시기에는 저자의 능력이 어떻습니까?”
세실리아는 3서클에 이른 백마법사였다.
어린 나이에 올랐기에 천재 출연이네 신동 출신이네 하는 칭찬을 듣고 자랐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강압적인 하렌의 태도에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저에게 물으신 거예요?”
“아, 예. 아가씨.”
세실리아는 꿍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답은 해 드리겠어요. 저 아저씨는 마법은 물론 정령까지 하나도 모른다고 봐야 돼요.”
“그런 기운이 들지 않는 것입니까?”
“예. 백마법을 익힌 흔적은 전혀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흥! 아니, 됐어요.”
세실리아가 보기에는 터크 대장이나 하렌 지부장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똑같은 놈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느끼기엔 지금 검은 후드를 쓰고 있는 젊은 아저씨를 짐짝 취급하려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