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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11화)
chapter 5 도주와 추격(4)
마탑임을 인정해 주는 최소한의 척도는 6서클의 경지였다.
탑주가 6서클 이상의 마법사일 것.
따라서 스스로를 탑주라 칭하면 그게 바로 6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는 말과 같았다.
5서클 마법사는 소드 마스터와 견주고, 6서클 마법사는 그때부터 대마도사라는 칭호와 함께 탑을 세울 자격, 그리고 어느 나라에 가도 백작의 작위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라 해도 중급이 아닌 이상은 6서클 마법사와는 견줄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
벡터는 발칸의 손에서 발현되는 마법들을 보며 말했다.
“흑마법사로군.”
“그렇소.”
벡터가 살짝 웃었다.
“훗. 어째서 아일란 왕국에 흑마법사가 있는 거요? 엄연히 아일란 왕국은 흑마법사 배척하는 국가일진대. 흑마법사라면 마도국 자하드로 가도 되지 않소?”
“마도국에 나와 같은 마법사들은 깔렸소. 6서클 마법사가 세운 학파가 수백 개요. 우리 유파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소.”
“큼!”
벡터는 신음을 흘렸다.
어느 나라에 가도 백마법 6서클이라면 수석 마법사 자리에 앉히고 7서클은 왕실 마법사라 칭한다.
그런데 백마법보다도 익히기 까다로운 흑마법을 6서클까지 익혀도 대우를 받을 수 없다니?
“역시 마도국이라 이건가.”
“참고로 말하자면 마도국에는 7서클 마도사만 수십이고, 8서클 마도사 또한 존재한다 들었소.”
“직접 본 적은 없는 거요?”
“워낙 그 양반이 바깥 구경을 싫어해서 말이오.”
발칸도 들어 보기만 했을 뿐이다.
물론 마도국 역사상 8서클에 오른 이가 10명도 되지 않았으니 쉬이 믿을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발칸은 손에 마법을 중첩시켰다.
“당신도 원하는 바가 있는 것 같지만, 나를 죽이기 전에는 지나가지 못하오.”
“음!”
익스퍼트 급만 40명이 넘고 소드 마스터인 자신이 있다. 벡터는 분명 원한다면 눈앞의 이자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다음의 소리다.
그리고 상대는 자신이 탑주라고만 했지 6서클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지를 쉬이 말했다는 것은, 숨기고 있는 것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
“참고로 아일란 왕국에서 흑마법사를 잡으면 현상금이 지급된다고 들었소.”
“그렇소.”
“6서클 마도사의 몫은 한 10만 골드 이상은 나갈 것 같군.”
발칸은 어서 자신을 잡아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만 골드를 벌자고 동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지.”
벡터는 대신 한 발자국 물러났다.
10만 골드라면 시간을 둔다면 얼마든지 벌 수 있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 확률에 도박을 걸고 싶어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번 일은 포기해야겠군.”
벡터의 말에 다른 울프 레인저들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울프 레인저에게 포기하는 일이 있었다니!
하지만 발칸은 입술에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만나면 술이라도 한잔 사겠소.”
“좋지.”
“그럼.”
벡터가 등을 돌리자 레인저들도 등을 돌렸다.
발칸은 떠나가는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 외쳤다.
“이름이 뭐요!”
벡터는 고개를 돌리며 발칸을 쳐다보며 말했다.
“벡터!”
“좋은 이름이군! 나는 발칸이오!”
“나중에 만나지!”
벡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울프 레인저들을 이끌고 멀리 사라졌다.
발칸은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아주 작게 혼잣말을 했다.
“건드리지 않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소, 울프 레인저 벡터.”
* * *
프라시스 영주성에 한 가지 서신이 전달되었다.
롬펠은 그것이 황실에서 보낸 것임을 알고 발칸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에게 그것을 넘겼다.
롬펠도 이미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영주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를 영주라 부르고 있었다.
“황실에서 온 것입니다, 영주님.”
“허허! 고맙소이다.”
그는 발칸에게 부탁받았던 흑암의 탑의 원로였다. 원로는 서신을 손으로 뜯어냈다.
그리고 그 서신을 읽은 원로의 얼굴이 변했다.
“무슨 일입니까?”
“꽤 황실에서 흥미로운 일이 있었군. 이것 보시오.”
롬펠은 무슨 일이기에 임시 영주의 얼굴이 변하는 것인지 궁금증 참아 내지 못하고 서신을 받아 읽었다.
이것은 아일란 왕국의 모든 귀족, 영주들에게 주어지는 서신이다.
본 내용은 황실이 다시 언급하기 전에는 바깥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실들을 담고 있다.
내용 : 대륙력 2128년 9월 13일 아일란 왕국의 13대 황제 가드리온 레나이드 아브리즈 아일란 폐하께서 모종의 이유로 서거하셨다. 각 영주와 귀족들은 이 사태가 진정되기 전까지 군사를 움직일 권리를 박탈당하며, 영지 외에서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이 사실을 바깥으로 꺼내어 혼란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귀족의 작위를 박탈시키고, 재산을 몰수하며 3대를 몰살시킬 것임을 약조한다.
쿠쿵!
롬펠이 경악했다.
“이, 이건!”
흑암의 탑의 원로이며 영주 대리를 하고 있는 카이트리 원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수도로 향한 발칸 영주가 지극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만약 영주라는 것이 발각되면 어떠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니 말일세.”
“그럼, 예정대로 진행시켰던 노예들은…….”
“아마 지금쯤 수도는 봉쇄당했을 것이네.”
chapter 6 발칸, 헬라인 수도 입성!(1)
쏴아아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 사내가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성문 가까이 다가갔다.
“문 좀 열어 주시오!”
탕탕!
성문을 두들기자 그제야 옆에 달린 조그마한 문틈에서 누군가가 눈을 드러냈다.
“누구십니까?”
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일이 생겼소. 어서 문을 열어 주시오.”
“미안하게도 3일 전부터 수도에는 출입이 불가능해졌습니다만.”
사내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아니, 어째서? 나는 20일을 넘게 걸어 이곳에 왔소이다.”
“열어 주고 싶어도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라 거절할 권리가 없습니다.”
“수도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거요?”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소. 하지만 떠도는 소문으로는 황실에서 변고가 생긴 모양이오.”
“아니, 황실에 변고라니?”
사내가 집요하게 캐물으려 했지만 더 이상 그 병사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수도에는 출입이 불가능해졌으니, 출입 거부가 풀릴 때까지 근처 마을로 돌아가 계시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열릴 거요.”
끼익!
사실 매일 이렇게 사람들에게 축객령을 내렸을 테니 이 정도 얘기해 준 것도 다행이리라.
사내, 발칸은 비를 맞으면서 수도 근처에 있는 마을로 돌아와 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한구석에는 하렌과 세실리아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하렌이 발칸을 쳐다보는 눈이 조금 각별해져 있었다.
울프 레인저들을 따돌리고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어떻게 따돌렸냐고 묻는 말에 발칸이 대충 얼버무렸었다. 그냥 따돌렸으니 못 쫓아올 거라고.
일행은 당연히 믿지 않았고, 발칸은 크게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태도가 당당하다 못해 심드렁하니 일행들은 황당해하면서도 덩달아 긴박감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울프 레인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발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칸 일행은 그렇게 떨떠름한 상태로 수도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힘든 고생 끝에 도착했는데 하필이면 출입 거부라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없었다.
“성내 상황은 알아보았는가?”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황실에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하렌의 얼굴이 변했다.
“그, 그게 사실인가?”
“예.”
“이, 이런!”
하렌은 탄식을 내뱉었다. 황실에 변고가 생겼다면 무엇이 있겠는가? 목숨이 위태위태한 황제일 확률이 제일 높았다.
황제의 서거가 상단이 늦음으로써 발생했다면,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성내 상황을 알아볼 방법이 없겠는가?”
발칸이 고개를 내저었다.
“경비가 엄중합니다. 아마 황실에서 일이 생겼으니 경비가 생각보다 강해진 듯하니, 그 누구라도 성내 안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네는 성안에 무슨 볼일이 있는가?”
발칸은 적당히 둘러댔다.
“단순한 여행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군요. 이런 기회에 여행에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날씨 상황이 좋지 못했다. 무언가 황실의 뜻을 대변이라도 해 주는 것마냥 몇 날 며칠을 끊이지 않고 내렸다.
발칸도 아직 황실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슬쩍 운을 뗐다.
“그럼, 당신과 아가씨가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이유는 뭡니까? 물건과 짐꾼들을 버려 가면서, 무사들까지 죽여 가면서 급히 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하렌은 선뜻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것은 발칸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발칸도, 흑마법만 이용한다면 이 남자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서투른 흑마법의 남용은 멀쩡한 사람을 백치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마도사라 칭할 수 있는 6서클에 올라선 발칸도 정신마법은 쉬이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자네한테는 이야기할 수 없네.”
하렌의 단호한 태도에 발칸은 세실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해 줄 수 있냐는 무언의 표현.
하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아는 게 없는 건지 세실리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렌은 그런 세실리아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헬라인의 문이 열리면 본 상단으로 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이번 여행은 너무 위험하셨으니 천천히 여독을 푸시지요.”
세실리아의 고운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 저보고 상단으로 돌아가라구요? 제가 이번 상행을 얼마나 기대했는데요.”
“너무 위험했습니다.”
“그래도……!”
둘의 말싸움이 번지려는 찰나, 무언가를 발견한 발칸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성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발칸의 말 한마디에 세실리아와 하렌이 동시에 말을 멈췄다.
“아니, 어떻게 말인가?”
발칸은 턱짓으로 여관 밖을 가리켰다.
“저들은……?”
여관 밖에 작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 하얀 옷을 입고 가슴에는 십자가를 수놓은 자들.
“태양의 신 로한의 자식들이로군.”
“그러고 보니, 황실에 변고가 생겨도 사제들에게는 의심의 눈이 없을 테니 쉽게 들어갈 수 있겠군요!”
“그런데 왜 저들이 이곳을 돌아다니는 겐가?”
“정말 황실에 변고가 생겼다면 이 날씨에 장례식을 치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
발칸의 말은 그럴듯했다.
정답이라고 할 순 없어도 이것 말고는 설명할 것이 없는 그런 명답.
하지만 세실리아는 그런 발칸을 향해 염려하는 투로 얘기했다.
“그런데 아저씨, 정말 괜찮겠어요?”
“무엇이 말이오?”
발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저씨는 흑…….”
흑마법사이며 네크로맨서.
태양의 신 로한을 믿는 자들은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들을 배척하는 세력 가운데서 제일 선두에 서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태양의 신 로한이 이 세상의 조물주라고 알고 있다.
그 조물주의 뜻을 거역하고 시체를 일으켜 세우며 저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절대로 선처를 내리지 않는 게 로한의 신도들이었다.
“후후!”
하지만 발칸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추기경, 아니, 그 추기경의 할아비가 와도 발칸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들은 수십 수백 년을 대륙에서 배척받아 온 존재.
자신들의 기운을 숨기는 일에 있어서는 그 어떤 자들보다도 능숙한 입장이었으니까.
그리고 발칸은 그중에서도 대마도사라 불리는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