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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12화)
chapter 6 발칸, 헬라인 수도 입성!(2)


“제 걱정은 마십시오. 포섭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사제라고는 하나, 내가 볼 때는 한 명의 손님과도 같은 자들일세. 저들을 포섭하지 못하면 내 화교술이 그 정도 수준에 불과한 것일 테지.”
하렌은 자신만 믿으라는 식으로 무턱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는 거예요?”
세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왔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그대로 수도로 들어가 버리면 마지막 기회까지 영영 놓치는 셈입니다.”
“잘해 보세요.”
하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태양의 신 로한의 신자들에게 선뜻 다가갔다. 그러고서는 어디론가 같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그 모습에 반색했다.
“성공한 모양이네요.”
“부유한 자들은 같은 로한의 신자들만큼이나 반가운 존재일 것이니…… 하렌이 상인임을 진작 알아채고 많은 헌금을 내라고 유도할 것이오.”
세실리아는 놀랍다는 듯이 감탄했다.
“잘 아시네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발칸은 후드를 벗어 내리며 전신의 마기를 한 바퀴 휘감았다.
이로써 이제 그 누구도 발칸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을 터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이 하렌을 위아래로 훑었다.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하렌의 직종이 상인임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고급의 복장이었다.
“허허! 별일 있겠습니까? 저같이 상단 일을 하는 사람들도 태양의 신 로한 님을 믿는 사제님들을 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평소 태양의 신 로한 님을 흠모하던 터라, 이렇게 헌금이나 하러 나왔습니다.”
“오오!”
노인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애써 이렇게 찾아와서 헌금을 하겠다는데 좋지 않을 사람 없었고, 한눈에 보아도 이 상인은 어중간한 중소 상단은 아닌 듯해 보였다.
“상단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냥 대륙에 떠도는 작은 상단일 뿐이지요. 프리 머천트 상단이라 하여…….”
“프리 머천트라 하면 십대상단으로 알고 있는데…….”
“허허! 어디 그것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그저 십대상단이라 자칭하고 있을 뿐, 아직 십대상단에 들 정도는 아닙니다.”
“역시! 프리 머천트의 상인분이라 마음 씀씀이와 생각부터가 너무 겸손하시구려.”
“과찬이십니다! 허허!”
하렌은 주머니에 많은 금화들을 꺼내어 한눈에 보아도 떡 벌어질 만큼의 돈을 헌금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면서 하렌이 살짝 노인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태양의 신 로한 님께서는 헌금을 하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신다고 들었는데…….”
“로한 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시지요. 전지전능한 신도 그분 한 분뿐이시니. 소원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렌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한 세 명쯤 급히 수도로 들어가야 하겠는데, 이렇듯 문이 막혀 있으니 원 답답해서! 이 시원한 마음을 풀고 싶을 뿐입니다.”
노인은 하렌의 눈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오! 참으로 다행이시구려. 저희도 이번에 3명쯤 사제들 간에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채워야 하는데. 잠시나마 로한 님의 사제로 들어와 로한 님의 뜻을 펼치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하렌이 그렇듯 조심히 물었다.
“이렇듯 우리가 만난 것도, 당신이 헌금을 하신 것도 이 모든 것이 바로 태양의 신 로한 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이게 다 로한 님 덕분입니다. 추기경님과 같은 이런 관대한 분과 친분을 두게 되다니.”
“과찬이실 뿐입니다. 아직 성녀님에 비하면 부족할 뿐이니.”
하렌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아니, 성녀님을 알고 계십니까?”
“이를 말씀이십니까? 이번 행렬에 성녀님께서 계십니다. 저도 직접 뵈는 것은 이제 두 번째밖에 되지 못했습니다만, 역시 성녀님께서는 미의 신보다도 아름다우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노인,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하렌은 당장 성녀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성녀의 개입, 확실히 황제의 서거가 맞을 수도 있겠군.’
국가 원수의 서거이니 성녀가 개입할 수도 있다.
‘결국…… 너무 늦었다는 것이군.’
하렌은 품속의 물건을 움켜쥐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마냥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그러시오?”
노인이 걱정하는 투로 입을 열자 하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철저한 상인 기질을 띤 하렌이었다.
“허허!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까지 가면 되겠습니까?”
“1시간 뒤 성문 앞에서 보도록 하지요.”
“곧 준비하겠습니다.”

* * *

노엘 후작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소드 마스터를 배출하며 검의 명가로 명실 공히 인정받고 있는 귀족 가문.
아일란 왕국에 존재하는 8명의 소드 마스터 중에서 최상위 클래스에 속하고 있는 강자가 바로 노엘 후작이었다.
그는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42살이라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60살에 접어든 그는, 놀랍게도 마스터 중급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증거로 60살이 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작 40대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노엘 후작은 명상을 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검으로 과격하게 싸움을 하는 것보다는 이런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욱 경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터라 시간이 나는 대로 이렇듯 명상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그런 그는 기척이 느껴지자 명상 수련을 관두고 몸을 일으켰다.
“후작 각하. 일왕자 저하와 로열 크로이츠 상단의 지부장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였다.
20년 넘게 노엘 후작가의 집사로 일하는 그로서는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만 이렇게 직접 움직였다.
노엘 후작은 집사가 건네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지부장이라면 몰라도 일왕자 저하께서는 의심의 눈 때문에 궁을 벗어날 수 없으시지 않았나?”
현재는 쓸데없는 내분을 막기 위해 일왕자와 이왕자 모두 자신의 궁에 칩거해 있는 상황.
각 왕자를 따르는 귀족들의 간청에 의한 것이니 그 상황을 섣불리 깰 이유는 없었을 터다.
하지만 노엘 후작은 이것저것 고민해 보기보다는 그냥 직접 확인하는 쪽을 택했다.
“……가 보면 알겠지.”

“이리 왕림해 주시다니, 친히 영광입니다, 저하.”
노엘 후작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일왕자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턱과 인중에 둥그런 수염을 한 30대의 남자와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는 중년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왕자와 로열 크로이츠 상단 아일란 왕국 지부장이었다.
“또 수련을 하고 있었는가?”
일왕자는 지긋한 눈빛으로 노엘 후작을 바라보았다. 노엘 후작은 이미 여러 번 겪어 본 눈빛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저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검술이지 않습니까?”
“후후, 그렇지.”
일왕자가 가볍게 능청을 떨었다.
“곧…… 공작가가 될 테니.”
노엘 후작은 일왕자에 줄을 대고 있는 대귀족이다. 그런 그가 일왕자의 줄에 가담한 것은 공작 자리와 숙청당한 귀족들의 땅 일부를 약속받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 왕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이번엔 왕자가 대답하기 전에 로열 상단의 지부장이 턱을 부르르 떨었다.
“흘흘. 곧 지배자가 되실 일왕자님께 누를 끼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왕궁에서는 이왕자만이 벌벌 떨며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왕위 계승권을 일왕자가 가지게 되면 이왕자는 피의 숙청을 당할 것이다.
노엘 후작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지부장을 쳐다보았다.
나이 60이 넘어 소드 마스터인 그로서도 상인들의 생각은 도통 알 수 없을 만큼 음흉하다.
“흠! 이왕자에 가담하고 있는 귀족들의 힘도 약하지 않소. 그곳에도 소드 마스터가 무려 3명이나 존재하니 말이오. 그들이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데 가만히 있겠소이까?”
“우린 5명이나 존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노엘 후작님께서는 아일란 왕국 최고의 검객입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 3명이라 해도 노엘 후작님의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하지만 힘이 강한 대신들은 모두 이왕자 파로 돌아섰소. 그들의 입이왕자님을 옭아맬 것이 분명하오.”
듣던 일왕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어차피 내가 왕이 되면 그들을 물갈이해 버리겠소. 소드 마스터는 키워 낼 수 없지만 대신이란 자리는 동네 꼬마에게 줘도 끼워 넣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나?”
노엘 후작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일왕자가 선택할 일이다.
“내 노엘 후작에게는 부탁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 왔소.”
“하명하십시오.”
일왕자가 눈빛을 보내자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황제 폐하께서 급사하시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수도 헬라인으로 물건을 가지고 상행 중이었던 프리 머천트 상단에는 저희 쪽 간부인 세작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작이 이상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상한 정보?”
“흑마법을 사용하는 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백마법사들을 풀어 교전 위치를 파헤쳐 보니 다수의 저서클 마법의 흑마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흐, 흑마법 말이오?”
노엘 후작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황제의 서거로 이렇게 분위기가 흉흉한 때에 흑마법사의 출현이라니.
그것보다 프리 머천트 상단에서 흑마법사가 침투해 있었다는 것은 쉬이 믿기 힘든 것이었다.
아일란 왕국은 흑마법사를 배척하는 나라다. 노엘 후작도 흑마법사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흑마법사는 대체 몇 서클 정도 되는 거요?”
흑마법은 백마법보다 배우기가 까다롭다.
마나보다는 마기가 있는 곳에서 수련을 쌓아야 하는데, 대륙에서 마기가 쌓이는 곳이라면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살상마법 위주이다 보니 방어 마법이 발달돼 있지 않아 빠른 속도로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에겐 공격이 곧 방어인 셈이었다.
하지만 캐스팅을 빨리 하는 것은 그만큼 마법이 난해하고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대륙에 흑마법사들의 성장은 더뎠고 힘들었다.
“최소 4서클 마스터 이상의 흑마법사가 아닐까 합니다. 노엘 후작님께서는 그자를 사로잡아 2왕자와 연루되었다는 자백을 받아 내시면 됩니다.”
일왕자는 지부장의 말에 덧붙여서 입을 열었다.
“반항을 가할 경우 팔다리 하나 정도는 잘라도 무방하오. 일단 그자가 흑마법사라는 것과 이왕자와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백만 드러내면 될 것이니.”
노엘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그의 불쾌한 마음속이 그나마 편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동안 일왕자가 벌여 온 짓을 돌이켜 보면 노엘 후작으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황제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독살을 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황제의 유일한 약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프리 머천트 상단을 울프 레인저들에게 의뢰해 공격을 가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암수들을 펼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했다.
‘권력에는 피도 정도 없다더니…….’
노엘 후작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또한 이 왕국의 명실상부 최고의 귀족인 공작이 되고 싶은 마음에 이 지독한 일왕자와 손을 잡았으니.
노엘 후작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변화를 일왕자와 지부장은 알지 못했다.
노엘 후작은 초인의 경지인 소드 마스터.
범인들의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초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