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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14화)
chapter 6 발칸, 헬라인 수도 입성!(4)
수도인 헬라인에 가까워지자 발칸은 성녀에 대한 관심을 일단락에 끊어 버렸다. 더 큰 관심은 괜한 사제들의 의심을 살 수 있는 일이었다.
일행들이 성문에 가까워지자 아까와는 다르게 한 무리가 성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맨 앞에 서 있던 중년의 남성이 악수를 청해 오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왕궁 근위대장인 아르토 남작입니다.”
왕궁 근위대장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 정도의 경지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위치.
마스터라면 드물지 몰라도, 익스퍼트들은 흔한 아일란 왕국에서 상급의 수준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마중을 나온 상대의 계급이 그다지 탐탁지 않았던 것인지 성기사들의 얼굴도 그다지 밝지 못했다.
“성녀님의 호위대장인 카알이오.”
호위대장 카알은 아르토 남작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카알 또한 명색이 소드 마스터로 평가받는 홀리 나이트 중 하나였다.
초인의 경지에 든 그는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그가 아일란 왕국의 8대 소드 마스터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종교라는 단체의 성기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소드 마스터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신앙심에서 비롯된 디바인 포스(Divine force)가 소드 마스터와 견줄 수 있는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검을 들고 다니는 자들치고 홀리 나이트 카알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아르토 남작은 카알을 보며 동경의 눈빛을 보냈지만,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그 눈빛이 오래가진 않았다.
“성녀님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저기 계시오.”
카알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성녀의 바로 옆에 섰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성녀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끔 말이다.
하나 그가 딱히 말해 주지 않아도 성녀의 주변에는 그녀가 성녀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아르토 남작이라고 합니다, 성녀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가워요, 아르토 남작님.”
꿀꺽!
아르토 남작은 성녀의 얼굴을 본 순간 침이 자동적으로 넘어갔다.
그만큼 성녀는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왕궁은 이쪽입니다. 저희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고마워요, 남작님.”
“호위하라!”
아르토 남작이 입을 열자 그와 같이 나왔던 무리들이 사제들 주위를 둘러싸듯 있었다.
아르토 남작만이 그들을 안내하려는 듯 선두에 섰다.
카알은 하늘을 쓰윽 쳐다보더니 아르토 남작에게 말했다.
“비가 거세질 것 같으니 빨리 가 주시오. 성녀님께서도 그걸 원하시고 계시니만큼.”
아르토 남작도 동의했다.
구름이 잔뜩 껴서 쉬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렌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수도 안으로 들어서자 발칸과 세실리아를 데리고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사제들도 그들이 곧 빠져나갈 것임을 알았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오히려 사제들로서는 빨리 그들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리를 내주었을 것이다.
발칸이 성녀의 옆을 지나쳐 갔을 때쯤이었다. 성녀는 소곤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시는 건가요?”
발칸은 놀리던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성녀와 같은 보폭과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난 태양의 신의 면죄를 받긴 어려울 듯싶으니. 이만 빠져야겠습니다.”
“태양의 신 로한 님은 설사 살인자라고 해도 속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용서해 주신답니다.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앞으로 개과천선해서 산다면 말이지요.”
“…….”
발칸은 성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마치 농이라도 걸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흑마법사는 그 길을 걸을 때부터 이미 마신과의 끊어지지 않는 계약을 한다.
태양의 신 로한이라 해도 그 끈을 끊을 수는 없다.
마나 홀이 파괴되지 않는 한은 발칸은 평생을 흑마법사로 살 것이며, 속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의 신을 욕보이는 것은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겠습니다.”
발칸이 걷는 속도를 늦췄다. 성녀는 방긋 웃었다.
“…….”
발칸은 하렌과 세실리아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로한 님께서 그렇게 답을 내려 주시는군요.]
발칸은 성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성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마법이 분명했다.
발칸도 2서클의 매직마우스로 성녀를 향해 말했다.
그때는 이미 자연적으로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어디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니 말이오.]
[과연 그럴까요.]
[당신과 나는 흑마법사와 성녀. 어둠과 빛 같은 관계요. 난 성녀인 당신이 껄끄럽소. 그러니 다신 만나지 않길 바랄 뿐이오.]
발칸은 그것으로 매직마우스를 캔슬하고 하렌과 같이 일행에서 빠져나왔다.
사제들은 어차피 그들이 견습 사제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길을 터 주었다.
오히려 제법 거슬리고 있었기에 한시라도 내쫓고 싶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제 헤어져야겠네. 자네는 어디로 갈 겐가?”
하렌이 질문에 발칸이 한쪽 여관을 가리켰다.
“일단 저쪽에서 며칠 묵을 생각입니다. 생각이 있어서 수도에 오게 되었으니.”
세실리아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세공 반지를 발칸에게 쥐어 주었다. 거기다 하렌은 알지 못하게 윙크까지 하면서 말이다.
“머지않아 프리 머천트 상단의 상단주가 될 거예요.”
그녀의 신분은 외부에는 비밀이었다. 프리 머천트 상단이라면 대륙 십대상단으로 분류되는 곳.
그런 상단주의 딸이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렌의 입이 딱 벌어졌지만, 발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부라 생각하면 되겠소?”
세실리아는 상큼한 표정으로 웃었다.
“예, 아저씨. 그렇게 생각하시면 더 좋고요.”
“미래의 상단주와 알게 되었으니 영광이었소.”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해요. 아일란 왕국 지부에 있을 생각이니.”
발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가시죠, 아가씨.”
하렌도 그다지 비를 맞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지 세실리아를 재촉했다.
세실리아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그렇다고 길게 표현하진 않았다.
발칸은 그들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는 사제복을 벗어 던지고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chapter 7 발칸의 위용(1)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도의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소문은 삽시간에 회자거리가 되었다.
수도 봉쇄령의 이유.
황제의 서거.
흑마법사와 연루된 이왕자.
그리고 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달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
이왕자, 흑마법사, 황제, 그리고 프리 머천트 상단에 대한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내일 황제 폐하의 장례식이 끝나면 수도 봉쇄령이 끝난다고 하는군!”
“아이고, 드디어 봉쇄령이 끝나는가? 참 오래도 걸렸군.”
이건 어디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해졌다.
발칸은 그들의 대화를 그다지 집중하지 않았다. 여관 식당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어도 거의 그 얘기뿐이었다.
“왕궁 근위대가 그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 나섰다더군! 만약 그 흑마법사가 정말 수도에 있다면 꼼짝없이 잡힐 걸세.”
“아이고! 정말 흑마법사가 있는 건가? 그게 정말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이왕자 저하는 스스로 물러나서야 하지 않겠나?”
“이런, 쯧쯧! 그것 참 안타깝군.”
발칸은 그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침에도 여관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흑마법사 색출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간단한 짐을 뒤져 보거나 할 뿐이었다.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보여 줘야 했긴 했지만, 발칸은 프라시스 영지의 평민의 신분이었다.
영주인 그에게 평민 신분 하나 만드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발칸이 자존심 상하는 일은 수도 헬라인에 도둑 길드의 위치가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이었다.
막연히 오면 알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강화된 경계로 발칸이 수도에 입성한 지 3일째인 오늘도 그들의 발자취조차 구경하지 못한 것이다.
발칸은 그동안 폭력배들을 회유하거나 협박식으로 도둑 길드를 알아내려 했으나 그들은 입이 굳은 것마냥 도둑 길드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쏙 다물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으음?”
발칸은 창가의 문에 비치는 짙은 화장의 여성을 보았다.
남자를 홀리는 페로몬 향수와 몸의 중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려 입은 옷.
그리고 날씬한 다리를 가진 그녀를 보며 남자들의 눈이 가는 것은 당연했지만, 발칸은 다른 의미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매춘부…….’
그녀는 별로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돌아다니며 자신의 매력을 발산시켰다.
“어머, 오빠. 호호! 오늘 즐기다 가는 건 어때?”
하지만 벌써부터 매춘부와 뒹굴고 싶은 마음들은 없었는지, 눈으로 슬그머니 훔쳐보기는 해도 막상 그녀의 유혹에 걸려드는 남자들이 없었다.
발칸은 여관을 나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호호! 오빠. 볼일 있어?”
짙은 화장 속에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발칸은 후드를 벗어젖히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알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 * *
수도 헬라인에 으슥한 골목길.
20대 중반의 사내가 젊은 여성이 끄는 힘에 이끌려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여기 손님이요!”
“어머, 루엔?”
루엔이라는 젊은 매춘부의 목소리에 미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웃음을 쳤다.
“호호! 하여간, 얘가 손님 하나는 잘 물어 온단 말이야. 어디…….”
미부인은 사내의 얼굴을 보며 뺨을 붉혔다.
사내의 얼굴이 꽤 준수한 것도 있지만, 검은 로브가 매우 잘 어울려 흑안을 보는 순간 빨려드는 것 같은 매력이 느껴진 것이다.
15년이 넘게 매춘부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이런 남자가 처음이었다.
매춘 일을 3년 넘게 그만두고 있지만 몸이 절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젊은 루엔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속내를 감추고 가격을 설명했다.
“호호! 여자를 불러 술을 마시는 것은 10골드, 술값에 따라 값이 달라지긴 해요. 만약 하루 동안 즐기시려면 30골드를 내셔야 해요. 그 아이는 손님들 중에서도 인기가 많기 때문에 지명이 많이 있어서 좀 비싸답니다.”
“그렇소?”
발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부인은 발칸의 목소리마저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찰랑.
발칸은 품속에서 동전을 꺼내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어머?”
그 동전이 눈으로 세어도 50개는 넘어 보였다.
50골드는 넘는다는 말.
“난 밤을 즐기기 위해서 찾아온 건 아니오. 단순히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가 있길 바랄 뿐이오. 내 이야기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는 아이에게는 이 돈 전부를 주겠소.”
매춘부와 즐기기 위해 찾아왔을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사실 발칸은 청렴한 자였다.
그러나 미부인은 눈초리를 가늘게 뜬 채 발칸을 쳐다보았다.
‘혹시 부끄러워서 그런가?’
매춘부 일을 하면서 이런 일은 자주 겪어 왔다. 막상 찾아와도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사내의 얼굴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불러 줄 수 있는 여자는 모두 불러 주시오.”
“알겠어요.”
미부인은 그러마라고 대답했어도,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두고 있었다.
정말이지 맘에 드는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그녀의 농염함은 세월이 비껴갔을 정도로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이런 기회는 좀처럼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야.’
요즘 들어서 그래도 욕구 불만이 찾아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루엔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를 보며 한 매춘부에게 카운터를 맡겼다.
난입하려는 속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