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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18화)
chapter 8 재회(2)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차가 식을 때쯤 되자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노엘 후작이 들어왔다.
들어오는 노엘 후작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본래 감정을 내색하는 성격이 아니거니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이골이 난 초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투에는 조금 가시가 박혀 있었다.
“도둑 길드는 잠도 없소? 대체 이 야밤중에 무슨 일인가?”
반자크는 신중을 가했다.
“일단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약조를 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후작 각하.”
“무엇이오?”
“반드시 제 일을 하나 도와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노엘 후작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이거나 내 능력 밖이라면 딴 데 가서 알아보시는 편이 좋을 것이네만.”
“제가 어찌 후작 각하의 애국심을 시험하며 능력 밖 일을 도우시라 청하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 둘 중 어느 것도 속하지 않습니다.”
“흠, 그렇다면 알겠소. 어차피 낮에 있었던 일에 의뢰금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그래, 어떤 일이오? 경청할 테니 어서 말해 보시게나.”
반자크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발칸만 생각하면 전신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마냥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후작 각하께서 찾으시던 흑마법사가 저희 도둑 길드를 찾아왔었습니다. 그것도, 제가 후작 각하와 있었던 그 낮 시간을 타서 말입니다.”
노엘 후작이 흥분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소? 도둑 길드에서 잡아 두었소? 그자를?”
4서클이나 5서클 정도라면 충분히 도둑 길드에서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든 것이다. 만약 그자를 잡았다면 어떤 의뢰금이든 지불할 의양이 있는 노엘 후작이었다.
“놓쳤습니다. 아니, 놓아주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노엘 후작은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자크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놓아주다니?”
“그자는 생각 이상의 대마도사였습니다. 6서클 이상의 흑마법은 물론이거니와, 사령마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경지에 오른 네크로맨서인 듯합니다. 오늘 그자에 의해 저희 도둑 길드가…….”
도둑 길드가 사라지든 말든 그것은 관심 있는 얘기가 아니다.
단순히 돈 주고 고용할 수 있는 놈들이 하나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6서클 이상의 흑마법에 사령마법까지 사용한다면 그건 또 다르다. 초인이라 불리는 노엘 후작으로서도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는 상대인 것이다.
“그 흑마법사는 저희 길드에 이상한 의뢰를 요청했습니다.”
“아니, 그 의뢰를 받아들였단 말인가? 도둑 길드가 무너진 이 마당에?”
“의뢰라기보다는 정보를 구하는 듯싶었습니다. 정확히는 이번 새벽에 열릴 노예 시장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었습니다.”
“노예?”
반자크는 방금 전 일을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말하는 걸로 보아 어떤 단체의 수장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수장……? 이왕자가 마도국의 마탑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노엘 후작은 침음을 삼켰다.
‘사람은 겉만 보고서는 파악할 수 없다더니.’
그동안 보아 온 이왕자가 악랄하다고 소문난 마도국의 마탑과 손을 잡았다니……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노예 시장에 대한 정보는 왜 요구했을까?”
6서클 이상의 흑마법사라면 탑을 세울 자격은 충분하다.
따라서 이왕자가 마탑과 손을 잡았고, 일의 경중을 판단하여 그 탑주가 직접 나섰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노예라니…….
그 부분만큼은 쉬이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쨌든 노예 시장에 나타날 것으로 확인되니, 노예를 구입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분명히 이동에 흔적이 남을 것입니다.”
“놈은 자기 운신조차 힘들 거라 여길 텐데 무엇 하러 짐 덩어리인 노예를 구입한다는 말인가. 써먹을 데도 없…… 아니, 잠깐. 혹시?”
노엘 후작은 이마를 짚었다.
만약 노예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린 뒤,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사령마법으로 병력을 충원하려는 속셈이었다면?
근위대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 몬스터들은 체력이 없고 재생력이 강해 익스퍼트 급이 아니면 쉽게 상대할 수 없었다.
또한 이미 죽어 있는 시체였기에 상처 입히는 정도로는 무력화시킬 수가 없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상대인 것이다.
“……아냐, 시기가 부적절해. 성공할 확률은 낮다.”
하지만 그 계획은 지금 시점에서는 써먹기가 어려운 방법이었다.
지금 수도 헬라인에는 태양의 신 로한의 성녀가 와 있다.
아무리 죽음을 불사르고 달려드는 언데드들이라고 해도 낮에는 움직일 수 없거니와, 성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달려들 수 없을 것이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하지만 그 흑마법사가 바보가 아닌 인상 실행에 옮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목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반자크 역시 도둑 길드장답게 노엘 후작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역시 후작과 마찬가지로 실행될 확률은 낮은 방법이라고 판단한 후였다.
반자크는 노예들의 사용처를 고민하기보다는 좀 더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모조리 죽이지 않는 이상 분명히 어딘가로 데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호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용병 길드나 레인저 길드에 사람들을 보낸다면 익명의 남자에게 노예들을 호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그럴듯하군.”
하지만 노엘 후작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용병 길드는 익명으로 의뢰한 자들의 정보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런 걸 강압적으로 알아내려 하다가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그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무리 아일란 왕국의 제일가는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용병들의 압박에 발 쭉 뻗고 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개개인이 약하지도 않을뿐더러 목숨을 넘나드는 전투로 전술이 뛰어났다.
또한 용병 길드는 전 대륙에 퍼져 있다.
만약 헬라인 지부의 용병 길드를 건드렸다가 일이 잘못 풀리면 노엘 후작, 아니, 아일란 왕국과 용병 길드가 냉전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일.
하지만 반자크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크큭. 그런 것은 괜찮습니다. 헬라인 지부의 지부장 녀석이 저와 친분이 두텁습니다. 제 사정을 듣는다면 분명 모른 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요.”
그 말에야 노엘 후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럼 그런 자를 찾아보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 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줄 것이요.”
반자크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
길드의 재건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발칸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 놓는 것.
반자크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새벽에 다시 오겠습니다.”
노엘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 있는가?”
목소리는 작았으나 집사는 귀신같이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일왕자님께 일이 어려울 것 같으니 ‘그것’의 사용 허가증을 받아오게.”
‘그것’이란 말을 듣는 순간 집사의 얼굴이 변했다.
아일란 왕국 최고의 소드 마스터가 ‘그것’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적의 강세를 생각보다 높게 쳐 준다는 뜻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집사는 곧바로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노엘 후작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상대는 대마도사라고 불릴 만큼의 강자다.
뿐만 아니라 사령마법까지 익히고 있다.
그것도 상당 수준의 경지에 올라 있다니 순수히 강자와의 싸움을 추구하고 싶은 노엘 후작으로서는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그를 데려가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노엘 후작가가 공작가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입이 필요하다.’
노엘 후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에게 이번 싸움에서 패배할 확률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 * *

작은 기도실.
그 안에서 한 여인의 낭랑한 기도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신기한 일은 그녀의 기도 소리가 지속되자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태양이 점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역시 성녀님이로군!”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야.”
기도실을 호위하고 있던 성기사들은 성녀의 능력에 감탄했다.
신의 힘을 빌려 날씨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기경 다섯은 모여야 고작 반나절 정도의 날씨를 바꿀 뿐이었으니, 비를 완전히 몰아 버린 성녀의 능력은 대단했다.
태양이 빛을 발해 가자 성녀는 초췌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라도 날씨를 움직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지금이 몇 시죠?”
“여섯 시입니다.”
성녀가 창가로 고개를 돌리자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 태양을 보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 오랜만에 뵙는군요.’
태양은 성녀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 비로 감춰졌던 태양의 모습을 보는 성녀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초췌했던 얼굴에도 갑자기 생기가 돋아났다.
“저기요…… 로한의 기사님.”
로한의 기사는 성기사를 뜻하는 말.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는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성녀님.”
“어머니께서 반드시 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를 만난다고 하시는데요? 그래서 말인데…… 어떻게 바깥에 나갈 수 없을까요?”
성기사는 그녀의 말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세 시간 후면 아일란 왕국 황제의 장례식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성녀님이 빠지면 큰 낭패가 아닙니까?”
낭패로 끝날 일이 아니다.
성녀는 이 장례식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도문을 올리는 것이 바로 그녀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부재를 하게 되면 태양의 신 로한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도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담, 두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성녀가 발랄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웃었다.
“추기경님께 말씀을 전하고 허락을 구해 보겠습니다.”
성기사의 무뚝뚝한 말투에 성녀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에엑! 말도 안 돼요. 그 어르신께 말하면 또 허락을 안 해 주신다고요. 어차피 장례식이 시작하기 전에 한 시간 전에만 돌아오면 되니까 기사님만 모른 척해 주시면 돼요.”
성기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끄응…… 그렇다면 카알 님과 함께 가시는 편이 어떠십니까?”
그렇게 나온 대안이 바로 카알이었다.
카알은 교내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성기사. 그가 호위하고 있다면 어떤 난처한 상황에서도 몸을 충분히 빼낼 수 있다.
성녀는 표정을 굳혔다.
카알은 다른 성기사들보다도 더욱 목석같은 자. 심심함을 달랠 말벗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녀가 바깥으로 나가는 이유는 정말 로한의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을 더욱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 신분에 혼자 나돌아 다닐 수도 없으니…….
결국 성녀는 그것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좋아요! 카알 님을 데려가기로 하겠어요. 이제 됐죠?”
“어휴. 카알 님이 계시니 안심할 수 있지만, 그분을 도와주시고 난 뒤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시간 안에 말입니다.”
성녀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