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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19화)
chapter 8 재회(3)
노예 시장은 매춘부들로 시작해서 귀족들까지 상당한 사람들이 많은 왕래를 하고 있다.
이 나라 아일란에서는 노예매매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작을 거라 생각되었지만, 발칸의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한심하기도 하군.’
발칸은 수많은 노예상들 곁을 지나다니면서 노예들의 몸 상태를 일일이 체크했다.
어떤 노예상들은 병약한 자들을 데려다가 깔끔하게 차려 입히고 비싸게 파는 자들도 있었다.
범인들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어도 발칸의 눈으로는 사령마법 덕분에 하나하나 파악할 수 있었다.
발칸은 이곳에 오기 전 롬펠과 얘기한 대로 가족 단위의 구성원들을 싼값에 구입하기 시작했다. 노예들을 500명이나 구입해야 했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을 호위할 용병들도 150명이나 고용했다.
7시 30분까지 노예들을 데리고 남쪽 성문으로 모여서 이동하기로 잡아 둔 상태였다.
시간을 지키려면 서둘러서 노예들을 구입해야 하는데, 노예들을 하나하나 살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칸이 시간에 시달리고 있을 때 발칸의 뒤를 따라다니던 구입한 노예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바로 이 무리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자였다.
“주인님,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발칸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오.”
“앞으로 몇 명이나 되는 노예들을 구입하실 예정인지요?”
아닌 게 아니라, 지금껏 발칸이 구한 노예들도 전부 다 가족 단위였고 그 수가 무려 백 명이 넘었다.
발칸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당연했다.
“총 500명쯤 구하게 될 거요. 용병들을 고용했으니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니 사람들에게 그렇게 일러두시오. 우리는 헬라인을 떠나 다른 영지로 갈 것이오. 그 영지의 영주가 당신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으려 하는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붙여 두시오.”
그러자 그 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신분이 회복된다는 것은 평민까지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영지민 수가 부족하면 노예들을 싼값에 가족 단위로 구입해 간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그런 귀족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노예들 가격이 한두 푼이 아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영지민 수가 아무리 부족해도 그런 거금을 사용할 정도의 귀족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합당한 대가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발칸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별것 아니오. 아낙네나 나이가 있는 남자들은 농사를 짓고, 장정들은 병사로 일하거나 광산에서 일할 것이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될 것이오. 물론, 신분을 회복하려면 몇 년 정도 군말 없이 일해야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겠지만.”
농사를 짓고, 학교에 보내고, 일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건 여타 다른 평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 가지로 그 영지의 영지민으로 귀속된다는 말과 같았다.
발칸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기에 그 노인뿐만 아니라 모든 노예들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믿지 않는 노예들도 있었다.
안심시켜 놓고 어떤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발칸이 미리 이렇게 말해 둔 것은 그들에게 한낱 희망이라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 그렇다면 소인들이 아는 노예들을 데려와도 되겠습니까? 건장한 장정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습니다.”
발칸은 흔쾌히 승낙했다.
노예들을 고르는 데 애를 먹고 있었으니 그들이 몸이 성한 노예들을 데려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노예상까지 데려오도록 하시오. 곧바로 구입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몇몇 노예들이 아는 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흩어지자 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떤 귀족이 가족 단위의 노예들을 구입하고 있다!’
‘그 노예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는 약속을 했다!’
가족 단위의 노예들은 잘 팔리질 않기 때문에 소문을 들은 노예상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예들이 흩어진 지 약 5분 후.
사방에서 노예상들이 몰려들어 발칸에게 거래를 트자고 신청해 왔다.
그런데 그 수가 어찌나 많던지 발칸은 오히려 원하는 노예를 지목해서 선별해 달라는 조건까지 내세울 수 있었다.
“우선 힘 좋은 노예들부터 보여 주시오.”
발칸의 앞은 결국 노예상들의 치열한 다툼 장소가 되었다.
“아니, 이 작자들이! 저분에게는 내가 먼저 팔려고 왔소이다! 순서를 지키시오!”
“그건 뭔 개소리요! 내가 먼저 왔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오! 누가 먼저 왔는지!”
“아니, 이 작자들이 진짜!”
발칸은 그렇게 제일 싸고 가치가 높은 노예들을 위주로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황이 일단 그렇게 되고 나니 노예 500명을 채우는 일이 쉬워져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다 채울 수가 있게 되었다.
“원하는 노예들의 수를 모두 구했으니 돌아가 주시길 바라오.”
발칸이 그렇게 말하자 노예상들은 아쉬움을 토해 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발칸의 뒤로 500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집결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발칸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자가 없었다.
대부분 발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었다. 눈에 번쩍 띄는 신분상승 기회를 놓칠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가지 않는다고 해도 발칸에겐 그것 말고도 다른 골칫거리가 있었다.
“…….”
이 수많은 노예들을 뒤에 매달고 성문까지 한가로이 걸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발칸은 그들을 한데 모아 입을 열었다.
“500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같이 움직이면 분명히 주목을 받을 것이오. 아는 자들끼리 짝을 지어서 남쪽 성문까지 모이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주인님.”
노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노예 신분으로 주목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발칸은 노예들을 이끌고 노예 시장을 벗어났다.
일단 노예 시장을 빠져나가는 일 자체는 주인의 인도 아래서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500명의 노예가 시장을 다 빠져 나오자 발칸은 걸음을 멈추고 노예들을 정렬시켰다.
자신과 500명의 노예들은 노예 시장에서도 주목을 받았으니 대로를 걷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그럼, 이쯤에서 흩어지는 것이 좋을 듯싶군. 그대가 이들의 대표 역할을 해 주시오.”
맨 처음 발칸에게 말을 걸었던 그 노인이었다. 아무래도 이 노인이 노예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
발칸은 대표를 정하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노예들도 자신들이 익히 아는 자들을 찾아 짝을 이뤄 흩어지기 시작했다.
7시 30분에 집결하면 됐지만, 미토스는 의뢰 시간보다도 30분은 일찍 나와 용병들을 다독이며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스콜피온 용병단장 미토스.
그는 발칸이 고용한 스콜피온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용병은 돈이나 혹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고 일을 하는 자들을 말하는데, 스콜피온 용병단은 3년 만에 파이브 스타(Five star) 급으로 급성장한 신출내기 용병단이었다.
아일란 왕국에서 5개밖에 없는 파이브 스타 급 용병단으로 성장한 데에는 미토스의 소드 마스터 각성이 큰 계기가 되었지만, 맡은 임무를 늘 성실하고 완벽하게 이행하는 것도 주된 이유였다.
“후…….”
미토스는 헬라인 남쪽 성문에서 홀로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처음 15명으로 시작했던 작은 스콜피온 용병단이 지금은 500명이 넘었다.
덩치가 커지고 명성이 높아진 만큼 몸값이 적잖이 뛰었는데, 누군가가 익명으로 용병단원들을 150명이나 고용했다.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그만큼의 책임감도.
그래서 미토스는 이번 의뢰에 직접 참가했다.
엄청난 금액을 감수하고 파이브 스타 급 용병단원을 150명이나 고용했다는 것은, 말하기 어려운 위험물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단장! 단장!”
무식하게 큰 거대한 창을 등에 매달아 놓은 채로 미토스를 향해 달려오는 거구.
마나를 사용하는 익스퍼트 급들은 무식하게 몸을 불려 민첩성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하지 않지만 용병들 중에는 간혹 이렇게 몸을 불려서 겁을 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미토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거구의 이름은 오거.
몬스터 오우거를 닮았다고 해서 오거라는 별명이 생긴 이후로는 계속해서 오거라고 불리고 있는 용병이었다.
또한 스콜피온 용병단을 창설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따라온 얼마 안 되는 초기멤버로, 명실상부한 스콜피온 용병단의 2인자였다.
지금은 용병계에서도 광도끼 오거라고 하면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아무래도 제시간에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수.”
“어째서?”
“그 노엘 후작인가 머시긴가 하는 놈이 귀족이나 타국 사람들이 아닌 이상은 나갈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 이놈들 대부분이 아일란 왕국 놈들 아니요?”
“뭐야?!”
미토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수도 봉쇄령이 끝나지 않았다면 이것은 강하게 반박해야 할 일이었다.
대체 며칠 동안이나 이 답답한 수도에 가둬 둘 셈인가!
“그리고…….”
오거가 할 말이 남았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비켰다. 그의 남산만 한 등치에 한 남자가 가려져 있던 것이다.
“의뢰주요.”
오거의 설명에 미토스는 인상을 굳혔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20대 중반에 접어든 새파란 애송이가 아닌가?
급속도로 어디 귀족가의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받은 의뢰는 분명히 500여 명의 호위였으니까.
그런데 애송이 뒤에는 500명은커녕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애송이가 미토스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걱정할 건 없소이다. 곧 사람들이 올 것이오. 아직 모이질 않았을 뿐이니.”
“알겠습니다.”
미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의뢰주다. 절대 불쾌해하거나, 이상한 내색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애송이 의뢰주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자 가족 단위로 사람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결 시간인 7시 30분이 지났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자들이 있었기에 스콜피온 용병단은 8시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온전히 수도 봉쇄령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끝에 모인 사람들은, 총 488명이었다.
12명이 발칸의 말을 믿지 않고 도망간 것이었다.
“수도 봉쇄령은 아무래도 오늘 황제의 장례식이 끝나고서야 풀릴 듯싶습니다.”
수도에 발이 묶인 미토스가 최대한 노력을 해 보았으나, 파이브 스타 급인 그들도 성벽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발칸은 인상을 찡그렸다.
의뢰 기간이 늘어나는 만큼 추가 비용이 발생하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성격이 아닌 발칸은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할 생각으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발칸을 유심히 쳐다보는 두 쌍의 눈빛이 있었다.
하나는 미토스의 것이었는데, 그는 발칸을 귀족의 자제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신분을 이용하여 수도에서 벗어나자 말하고 싶어도 익명으로 의뢰를 한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
묻고 싶어도 삼키는 것이 바로 용병이다.
알려 해선 안 되고, 물어서도 안 된다. 그 불문율 때문에 미토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른 한 쌍의 눈은 바로 성녀.
발렌티나 루시아의 것이었다.
성녀인 발렌티나가 발칸을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저 남쪽 성문으로 향했을 뿐이었다.
‘저분은…….’
그녀는 발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을 똑같이 따라 옮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웃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머니의 뜻은 저자를 도우라는 얘기셨나요?’
왜인지는 모른다.
저자는 분명 태양의 신 로한이 금기한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흑마법.
그리고 사령마법.
마도국 자하드가 아니면 어느 곳에 가도 배척받아야 할 그런 자이건만, 어머니는 저자를 도우라고 말하신다.
하지만 발렌티나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도우라고 말하지 않아도 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천성이 그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