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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20화)
chapter 8 재회(4)


“발칸이라고 했었죠?”
발칸은 성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성녀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발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여긴 무슨 일이오?”
성녀는 발칸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철없어 보이는 여자였다.
“다시 만날 거라고 했었죠? 자, 봐요! 어머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니까요.”
발칸은 문뜩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했던 말들을 머리에서 곱씹어 보았다.
“……우연일 뿐이오. 난 로한을 믿지 않소.”
성녀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한데요?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어려움을 알고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다고요. 자! 말해 보세요. 당신의 고충이 무엇인지……!”
시시각각 변하는 성녀의 표정과 움직임이 정말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무엇을 말해도 도와줄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 그때, 그녀의 옆에서 한 남자가 움직였다.
바로 성녀의 호위기사로 나온 카알이었다.
“성녀님의 말씀은 잊으시오. 미안하지만 성녀께서는 그들에게 축복을 내릴 시간이 없구려.”
황제의 장례식이 9시에 시작되는데 벌써 시간이 8시가 다 돼 간다.
만약 그들을 돕다가 시간이라도 지체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교의 위상이며 신뢰도며 모든 것이 좋지 않은 쪽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발칸은 성녀의 애완견 따위의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귀족만’ 수도에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성녀는 ‘귀족’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신분인 셈이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성녀의 도움이 있다면 바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자들과 함께 수도에서 벗어나야 하오. 헌데, 귀족이나 타국 사람들이 아니면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을 듯싶소.”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칸이 성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자 카알은 얼굴이 붉어졌다.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초인답게 그의 인내심은 범인들과 달랐다. 검집에 올라갔던 손을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었다.
그러고서는 다시 한 번 경고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성녀님께서는 바쁘시다 하지 않소. 성녀님은 바쁜 분이니 다음에 부탁하도록 하시오. 그런 시시콜콜한 부탁 따위에 성녀님께서 어찌 친히 움직이신단 말이오?”
발칸을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의 전신에서는 잘 갈무리한 디바인 포스가 자신을 압박하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말에 따르지 않으면 제압하겠다는 뜻이다.
‘따끔따끔하군…….’
발칸은 얼굴을 찡그렸다.
수도 한복판에서 마기를 끌어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디바인 포스의 기운이 전신을 파고드는 걸 온전히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시콜콜한 부탁이라 했소이까?”
발칸은 태연한 표정으로 맞대응했다.
그러자 카알은 뜨끔 놀랐다.
분명히 자신의 기운은 일반인이 견디기 힘들어 자칫 심하면 심장 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 아무리 못해도 기절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이 앞의 사내는 단순히 얼굴만 찡그렸을 뿐,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것 아닌가?
발칸은 그런 와중에 말을 이었다. 그의 눈은 카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두 어깨에는 수만의 영지민들의 목숨이 걸려 있소. 매년 수확물이 땅바닥을 기어가는 이때에 그런 영지민들의 피를 빨아 거둬들인 세금으로 신전에 막대한 기부를 했을 테지. 놀고먹으며 단순히 그들의 기부금으로 사는 당신네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오?”
발칸의 말에 카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것은 태양 신 로한을 욕보이는 것과도 같은 발언이었다.
“당신들이 발로 뛰쳐나가 병에 걸린 자들을 향해 따뜻한 손길이라도 내밀어 봤소? 당신들이 먹는 그 음식은 다 누가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당신들이 살고 있는 그 신전은? 그 옷은? 귀족들이 땅이라도 파서 준비해 준 것이라 생각되는 거요?”
카알의 얼굴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변했다. 그의 손은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닥쳐라! 더 이상 태양 신 로한 님을 욕보인다면 내 친히 너의 목을 거두어 가리라!”
발칸은 코웃음을 쳤다.
“흥. 치부가 드러났으니 부끄러운 모양이구려. 만약 당신이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부모를 잃어 거리에 내팽개친 아이들에게 빵이라도 한 쪽 주었으면 나의 말에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요.”
이제는 성녀 발렌티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 눈앞의 사내는 정녕 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소드 마스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최고의 성기사인 카알에게 그런 발언이라니!
놀란 성녀가 카알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는 이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분명 죽지는 않아도 평범한 자라면 사지 중 하나는 잘려야 할 것이었다.
성녀는 발칸이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슈악―!
발칸의 어깻죽지를 향해 날아가는 섬광 같은 검.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분명 피를 쏟아 내며 거리에 등져 누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을 해소하듯 롱소드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며 카알의 공격을 막아 냈다.
챙!
카알의 검은 발칸의 앞에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결국 발칸의 어깨를 잘라 내는 데 실패한 카알은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의뢰주에게 이 무슨 일이오?”
바로, 미토스였다.
미토스는 발칸이 걱정되다가 갑자기 소드 마스터와 같은 기세가 흘러나오자 발칸을 보호하고자 달려온 것이었다.
카알도 미토스의 실력이 자신과 겨뤄 결코 밑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긴장감을 드러냈다.
“휴우!”
성녀는 발칸이 무사한 것을 깨닫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검을 거둬요, 카알 님!”
“하, 하지만 저자는!”
“어서요!”
그녀의 말에 카알이 망설이더니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이빨은 거두지 않았다.
빠득!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발칸의 귀까지 들려왔다.
“오늘은 그만두겠소. 하지만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친히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
미토스는 무슨 일인지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돈에 움직이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단이 일어나도 의뢰주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너무 무모했군.’
미토스는 발칸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카알은 자신과 겨루어도 결코 밑인 자가 아니다. 동급의 소드 마스터라는 뜻이었다.
그의 눈에 발칸은 마치 상대의 실력을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날뛰는 동네 건달 같았다.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성녀시오.”
발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미토스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가 되었다.
“세, 세상에……!”
꼴깍!
미토스는 저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소드 마스터 급인 성기사가 호위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래도 교내에서 인지도가 제법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성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미토스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 정말 성녀가 맞으십니까?”
발렌티나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한 어머님의 딸을 찾는다면 제가 맞아요.”
“그, 그렇군요.”
분명 성녀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한다면 성문을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미토스는 성녀에게 선뜻 도와 달라고 요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 요구 때문에 발칸과 성기사 간의 싸움이 일어났던 모양이었으니까.
“얘기를 들어 보시면 알겠지만 저희는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 이야기를 어서 진행시켜야겠군요.”
성녀가 팔목 부분을 걷어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성녀의 이런 태도는 카알에게 있어 그리 좋지 못했다.
“서, 성녀님, 아시잖습니까? 이제 곧 황제의 장례식이 시작될 겁니다.”
그 순간이었다.
성녀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요?”
“장례식에 늦거나 불참석 시에는 교의 이미지가 떨어집니다. 그걸 위해서라도 바로 돌아가셔서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럼 카알이 가서 대신 전달해 주시면 되겠군요. 어머니께서 이들을 도우라고 하셨으니 성녀로서 온당히 따르겠다고. 당신은 로한 님의 종이면서 로한 님의 뜻을 거부하겠다는 건가요? 당신에겐 로한 님의 뜻보다는 이미지가 먼저였군요.”
카알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어떠한 변명거리를 댄다고 해도 성녀의 결정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면 제가 강제적으로라도 성녀님을 데려갈 것입니다.”
그 말에 성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요! 역시 카알밖에 없다니까요.”
성녀가 미의 여신과도 견줄 만한 외모를 지녔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카알은 물론이거니와 초인의 경지에 오른 미토스조차도 가슴이 두근거렸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성녀는 스콜피온 용병단과 500명이나 되는 노예들을 보며 질색했다.
“에엑! 저들을 모두 바깥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겠는데요?”
성녀에게는 지금 당장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강구할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못했다.
발칸이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스콜피온 용병단은 무장 상태이니 당신의 호위라고 하면 저들도 큰 의심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500의 노예는 선교 활동으로 뜻을 함께한 로한의 자식들이라고 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 보오.”
카알은 발칸이 성녀에게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성이 났지만, 성녀가 눈치를 보내는 터라 가만히 있었다.
성녀는 갑자기 그 고운 인상을 찌푸렸다.
“노예들이라구요?”
“그렇소.”
“어째서…… 어째서 노예들을 데리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녀는 살짝, 아니, 상당히 실망했다는 눈치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발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수백 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으니 불법으로 구매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저들을 거두지 않았으면 저들은 한낱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평생을 살았을 것이오. 어쩌면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거리를 나돌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것이 가족 단위 노예들의 운명이었다. 매우 싼값에 팔려 나와 주인을 구하지 못하면, 식량만 축낸다는 이유로 노역소로 팔려 나갈 수도 있었다.
“당신은 저들을 어떻게 할 거죠?”
발칸은 이 순간 자신의 대답을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는 성녀를 보며 말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내가…… 대답을 해 준다면 성녀께서는 책임지고 저들이 수도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하오.”
“당신의 대답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면, 전 이대로 발길을 돌려 사라지겠어요.”
“내가 거짓을 말해도?”
“이 순간 당신은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아요.”
발칸은 성녀의 말에 그만 실소를 머금었다.
사람을 믿어도 너무 쉽게 믿어 버리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그만 웃음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발칸은 속내를 곧바로 숨겼다.
웃음소리를 성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었다.
그녀는 마치 맹수처럼 집요하게 파고들려는 성격이었다. 알면 피곤해지는 그런 사람.
발칸은 노예들을 가리켰다.
“처음 난 노예 500명을 노예상에게 돈을 주고 구입했소. 그리고 저들에게 감시자 한 명 붙이지 않고, 짝을 이뤄 남쪽 성문으로 오라고 전했소. 그런데, 500명 중 온전히 돌아온 자가 488명이나 되더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발칸의 말을 듣는 순간, 모두들 믿기 힘들다는 눈치를 내보였다.
특히 카알이 그랬다.
노예들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었는데도 도주하지 않았다고?
쉬이 믿을 일이 아니었다.
“어째서예요?”
“난 저들을 영지민으로 데려갈 생각이오. 노예 신분 따위는 잊어버리고 모두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는 말이오. 그래서 난 가족 단위의 사람들만을 구입했소.”
“귀족이세요?”
영지민 운운하는 것을 보면, 귀족이 분명했다. 하지만 발칸의 그 어느 곳을 봐도 귀족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