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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군주 1권(21화)
chapter 8 재회(5)


발칸은 후드를 벗어 내리며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성녀. 본인은 프라시스 백작이라 하오. 프라시스 영지를 맡고 있소이다.”
“백작이시라구요?”
백작이 어떤 귀족인가.
귀족 중에서도 높은 클래스로 인정받는 작위다.
만약 정말로 백작이라면, 검을 휘두른 카알은 큰 실수를 범한 것이었다.
카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작? 흥! 웃기지 마시오. 백작이라면 어디 증거를 대 보시오. 아니, 백작이라면 차라리 성녀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오?”
“안타깝게도 폐하의 친서를 가져올 수 없었소. 잠행 중이었으니 귀족이라는 신분을 감춰야 했소이다. 좋은 뜻으로 노예들을 구입해도, 백작의 신분으로 노예들을 구입할 순 없지 않겠소?”
황제 폐하의 친서나, 혹은 그에 준하는 영지를 대표하는 영주의 엠블럼을 가지고 다녀야 귀족으로 인정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신분을 드러내는 패였다.
하지만 노예 구입을 위한 잠행 중이니 가능할 리가 없었던 것.
“엠블럼이 없으니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소.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카알은 성녀를 설득했다.
“성녀님,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노예나 구입하는 작자에게 무슨 할 말이 남으셨습니까? 저자는 성녀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궁색한 변명 따위나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괜히 이곳에 있다가는 성녀님의 눈과 귀가 더럽혀질까 걱정이 됩니다.”
“…….”
성녀는 카알과 발칸의 얼굴을 서로 번갈아 보았다.
한 명은 자신에게 신뢰를 보이는 성기사였고, 한 명은 흑마법사인 영주였다.
“성녀님!”
카알의 재촉에 성녀는 결단을 내렸다.
“발칸 백작, 당신은 참회할 생각이 정녕 없으신가요? 제가 도와주지 않겠다고 해도?”
그것은 흑마법사이자 네크로맨서임을 알고서 묻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발칸 역시 한순간의 도움을 위해 자신의 긍지를 포기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태양의 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소이다.”
“저, 저자가……!”
태양의 신을 따위라고 부르는 발칸의 발언에 얼굴 끝까지 화가 난 카알이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쉽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이곳은 아일란 왕국의 수도인 헬라인.
상대가 귀족이 아닐 수도 있지만, 설마 하는 생각 때문에 자신 있게 공격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카알에게 발칸이 웃음을 흘렸다.
“후후. 공격하지도 못할 검은 대체 왜 뽑았소? 당신의 역할은 겁을 주기 위함이오? 당신이 만약 명예로운 성기사라면 태양의 신을 욕보였으니 나를 죽여도 마땅할 것이오만.”
“네놈이 지금 그걸 알고도 로한 님을 모욕하려 드는 것이냐. 이젠 참을 수가 없구나. 당장 네놈의 목을 끊어 놓아야겠다!”
카알이 공격 자세를 취하자 성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발 그만해요, 카알 님!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당신이 그러고도 남들의 추앙을 받는 성기사가 맞나요? 로한 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세요. 자신을 욕보인 자를 죽인다면 분명히 슬퍼하실 거라고요.”
하지만 카알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성녀가 뭐라 하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저자는 로한 님의 가르침을 보여 줘야 죽은 후에 따를 것입니다.”
미토스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카알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뢰주는 지켜야겠소. 그러니 당신도 그만두시오. 내가 전력으로 싸운다면 최소한 당신의 팔다리 정도는 저승길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오.”
소드 마스터끼리의 격돌이다.
승패의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멀쩡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자명한 사실.
그러나 발칸은 카알의 말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태양의 신 로한은 당신들에게 선교 활동을 죽임으로써 전파하라고 했던가? 태양신의 검이라는 성기사가 사신보다 더한 꼴이군.”
카알이 다시 한 번 검을 뽑았을 때부터 봐줄 생각이 없었던 발칸은 마나 홀에서 마기를 끌어올렸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거대한 양의 마기가 발칸의 몸을 한 바퀴 휘감았다.
동시에 주위의 공기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변했다.
하지만 마기를 끌어 올렸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칸의 은밀함은 흑마법사 중에서도 독보적인 것.
작정하고 마기를 숨겼을 때 감지해 낸 사람은 자하드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격중당하는 순간까지도!
‘마법의 형태를 빚지 않고 순수한 마기로서 분출한다면 위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발칸은 급수가 다른 흑마법사.
6서클에 오른 대마도사가 그였다.
있는 대로 끌어모은다면 최소한 4서클 급의 파괴력은 낼 수 있다.
하지만 발칸이 손을 들어 올려 마기를 분출하려는 순간, 한 미지의 기운이 마기의 분출을 가로막았다.
“멈춰요!”
“크윽…… 쿨럭!”
발칸은 오만상을 썼다.
성녀의 알 수 없는 힘이 마기의 분출을 강제로 막아 버린 것이다.
추기경에게조차 없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
30년 가까이 익힌 흑마법과 사령마법의 정수가 이제 20살도 안 된 성녀한테 가로막혔다는 것에 발칸은 어이가 없었다.
‘감지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성녀는 카알이고 발칸이고 미토스고 모두 얄밉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우리가 이렇게 싸울 시간이면 저들을 충분히 바깥으로 데려갈 수도 있는 시간이었어요.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이러쿵저러쿵할 시간 따위 없다는 거 잘 아는 사람들끼리 왜 그러는 거예요?”
성녀의 말에 카알은 자신이 분노에 휩싸였단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성녀님. 교내로 돌아가면 달게 벌을 받을 것입니다.”
“흥! 용서는 바라지도 마요!”
성녀는 완전히 삐친 것인지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홱 옆으로 돌렸다.
발칸은 그사이에도 몸 안에서 날뛰는 마기를 제어하기 위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카알은 발칸의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 등을 돌렸다.
“운 좋은 줄 아시오.”
성녀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미토스에게 말했다.
“이름이 무엇이죠?”
미토스는 성녀의 갑작스런 물음에 머리가 멍해졌다.
“미, 미토스입니다.”
성녀가 밝게 웃었다.
“미미토스요?”
“미토스입니다!”
“좋아요. 지금 당장 용병들을 모두 모아요. 그리고…… 노예분들까지 모두 모으도록 하세요.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해야겠죠?”
성녀의 말에 미토스는 자신의 신분조차 잊고 주저 없이 뛰어가서는 노예들과 용병단원들을 일렬로 모았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는 때, 발칸은 후드를 눌러쓰고 카알의 등을 힐끗 쳐다보았다.
“너야말로.”



chapter 9 마도 병기의 등장(1)


“서, 성녀십니까?”
“예, 맞아요.”
경비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데려오는 모습에 질겁했지만, 설마 성녀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 이분들은 그럼……?”
“제 호위무사들과 선교 활동으로 모은 태양의 신 로한 님의 자식이 되실 분들이에요.”
“그, 그럼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명하고 통과시키겠습니다.”
“고마워요. 태양의 신 로한 님의 축복이 깃들길.”
성녀인 발렌티나가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하는 자세로 눈을 감자 병사의 머리 위로 하얀 빛이 떨어져 내렸다. 병사는 얼떨결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후훗! 뭘요. 자, 가요!”
성녀가 명하자 뒤에 있던 노예들과 스콜피온 용병단들이 무리 없이 수도를 벗어났다.
축복을 받은 경비병은 멍하니 성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미의 여신이 따로 없었군. 이거 누구네 마누라하고는 천지차이 아니야?”
그녀는 지금껏 경비병이 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비교 대상이 조금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고맙소.”
난데없는 발칸의 말에 발렌티나 성녀는 발칸을 올려다보았다.
“프라시스 영지의 영주라 하셨죠?”
“그렇소.”
성녀는 방금 전까지의 감정은 모두 사라졌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언제 한번 놀러 가도 될까요?”
참으로 피곤한 성격이었지만, 발칸은 종교적인 측면을 제외하고서는 큰 유감은 없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난 빚을 절대로 잊지 않소이다. 언제든 찾아와도 환영할 것이오.”
“다음에 또 뵐 수 있기를 바랄게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한 것은 발칸과의 이별이 아쉽다는 생각에서였다.
9시에 황제의 장례식이 시작되니 그녀는 발칸과 그리 오래 있지 못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그럼.”
성녀의 발에는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꼭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천천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알은 그녀를 먼저 보내고 나서 발칸을 힘껏 째려보았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이렇게 보내 주지만 다음에 볼 때는 죽을 것을 각오하거라. 다시는 제발 본인과 마주치지 않기를 평생을 벌벌 떨며 살아야 할 것이다.”
어느덧 하대조로 바뀌어 발칸을 깔보고 있었다.
성녀가 들을 리가 없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발칸은 어깨를 떨며 고개만 끄덕였다.
발칸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며 카알이 비웃었다. 자신의 경고에 지레 겁을 먹은 상대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흥! 겁쟁이가 따로 없군. 대체 뭘 믿고 날뛰는 건지 나 원 참…….”
카알이 검을 뽑을 가치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발칸은, 사라지는 카알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핏.
그러자 한 줄기 빛이 쏘아지더니 카알의 몸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카알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아주 적은 양의 마기인데다가 그 은밀함이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기는 시전자와 반경 10㎞ 내에 있으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으로 흑마법사들이 자신의 실험 재료에 자구 거는 수법이었다.
“성녀의 애완견 주제에.”
발칸의 몸에서 또 한 번 마기가 뛰쳐나왔다.
성녀도 없는 이상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전신에서 뛰쳐나온 마기는 방금 카알이 머무르고 있던 자리로 쏟아져 그 자리의 디바인 포스를 한순간에 잠재워 버렸다.
발칸은 자신에게 검을 드러낸 자에게 관대한 자가 전혀 아니었다.
“다음에 재회하게 된다면 뭉개 주지.”
마기는 디바인 포스에 약하지만 디바인 포스 또한 강한 마기에는 잡아먹힌다.
발칸은 마수였고 카알은 늑대였다.
늑대의 울음소리는 마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돌아가야겠군.”
발칸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