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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게니아 1권(3화)
1장 마법사가 되고 싶은 소년(2)


다음 날.
떠들썩한 교실 창가에서 가까운 자리에 앞머리가 인상적인 소년이 설명서를 따라 열심히 마술 소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도 어김없이 마술 소품으로 연습하는 그는 진우였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전혀 어설픔이 없는 그의 손놀림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들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대단한데?”
자신의 책상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진우는 고개를 위로 올렸다.
“뭐야?”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엔 준서가 미소를 띠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진우가 손에 쥐고 있던 마술소품을 낚아챈 준서가 설명서를 보며 따라 해 보았다. 하지만 잘 안 되는지 이내 실망한 얼굴로 조용히 진우에게 돌려주었다.
“담임이 너 오래.”
“담임이? 왜?”
진우는 의문의 눈초리를 준서에게 보냈다. 하지만 준서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몰라, 아무튼 가 봐. 가 보면 알겠지.”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무실 안은 시끌시끌했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선생들 사이에서, 학생과 선생이 진지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진우야,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써. 장래희망 조사에 그런 것을 쓰면 어떡하니?”
“장난 아니라니까요?”
서른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젊은 여자 선생과 훤칠한 키의 학생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진우와 그의 반 담임이었다.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네.”
“후우…….”
담임은 끓는 속을 진정시키려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대화가 진척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검은색 뿔테안경을 위로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 타이르려는 듯 그녀의 음성은 나긋나긋했다.
“아니, 세상모르는 어린이도 아니고 이제 알 만큼 알 텐데……. 내가 교직생활 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너처럼 장래희망 란에 마법사를 쓴 애는 처음 봤다. 아마 수십 년 동안 근무한 선생님에게 물어봐도 이렇게 쓴 사람은 너뿐이라 할걸?”
진우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 아니에요. 마술도 수준급이라고요.”
“마술? 혹시 마술사를 쓰려다 마법사로 잘못 쓴 거니?”
“아뇨, 마법사 맞아요.”
빠직.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그녀의 뇌리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대화의 종점을 찾을 수 없자, 원래부터 다혈질이던 그녀는 가슴을 움켜잡았고 결국엔 성질이 폭발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 둘은 교무실 안 모든 선생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네 나이가 몇인데 장래희망을 이렇게 쓴 거야? 당장 제대로 안 써?!”
그녀의 높은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교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진우와 교무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하던 짓을 멈추고 움찔했다.
바로 앞에서 담임이 씩씩거리자 진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동안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이제 그 꿈은 필요 없어요. 곧 있으면 이루어지거든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아까의 잘못은 용서해 주마. 그럼 이제 어떤 장래희망을…….”
담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젠 대마법사로 꿈을 바꿨어요. 왜, 멀린 같은 마법사 있잖아요. 저도 그거 할 거예요.”
그가 마치 대마법사가 되었을 때의 일을 상상하는 표정을 짓자 그의 앞에 앉은 담임도, 교무실에 있던 선생들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니야?’
교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진우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담임은 차차 이성이 돌아오자, 속에서 근원을 모르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 그녀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네가 나랑 지금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냐?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드디어 이성의 끈을 놓고 본능의 끈을 잡은 그녀가 광기에 가득 찬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공격할 무기를 찾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고개가 멎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악마의 미소가 번져 갔다.
“잘 쓰겠습니다, 학생주임님.”
그녀는 학생주임의 책상에 놓여 있던, 당구 채 절반 정도 되는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바로 앞에 있던 진우가 아니라 교무실 곳곳에 자리 잡은 선생들이었다.
“어, 엇! 이, 이 선생!”
이런 일은 진저리 나게 겪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다만 진우의 말 때문에 잠시 정신을 놓았을 뿐이다.
보통은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그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제어하곤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평화로운 교무실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고, 지금도 교무실의 평화를 위해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것은 교감이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다른 선생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 선생, 윤 선생! 얼른 이 선생 팔을 붙잡게. 박 선생은 빨리 체육부실로 가서 체육선생 모조리 다 데리고 와! 잠자던 마녀가 깨어났다고 하게!”
“알겠습니다, 교감선생님!”
“그리고 자네들은 저 소년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게.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라저!”
“크아악!”
지시를 내리던 교감은 비명 소리가 들리자 뺨이라도 맞은 듯 고개를 획 돌렸다.
“이, 이럴 수가…….”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엔 팔을 붙잡으러 갔던 두 선생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몸을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살아 있는 듯했지만 의식은 이미 꺼져 버린 뒤였다.
“그동안 잠재되었던 분노가 이번 일로 깨어났구나……. 도대체 교육부는 저런 폭력교사를 어찌 그대로 방치해 둔 것인가…….”
교감은 입을 굳게 다문 뒤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뒤에는 두려움에 몸을 떠는 어린양들이 몸을 사리고 있었다.
“지금 저 마녀는 두 배 이상 강해진 상태다. 더구나 노처녀 히스테리까지 깨어나 약 50퍼센트는 더 강해진 듯하군. 이 상태라면 체육부 전사들이 와서 마녀를 상대한다 해도 승산이 없다.”
“꺄하하하하! 죽어, 죽어, 죽어!”
교무실에 이 선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에 모두들 움찔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잘못하다 마주치면 다음 타깃은 자신이 될 것을 알기에.
교감이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후우…… 응? 교장선생님은 어디 가셨나?”
“벌써 피하셨습니다.”
“역시 빠르시군.”
교감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부처의 미소였다.
교감의 뒤에서 몸을 사리던 어린양들은 그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을 찬찬히 한번 둘러본 교감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마녀는 내가 막겠네.”
“교, 교감선생님!”
교감이 표정을 풀고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은 이 학교를 이끌어 가야 할 인재들이야. 이런 곳에서 변을 당할 수는 없지 않나?”
“교, 교감선생님…….”
어린양들은 감동 어린 눈빛으로 교감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교감은 신이 내린 천사였다.
“꺄하하하하하! 죽엇!”
“음…… 시간이 없네. 각 학년 부장들은 선생들을 이끌고 신속히 이곳에서 탈출하게.”
“교, 교감선생님!”
“어서!”
교감의 질책에 그들은 하나 둘씩 몸을 일으켰다.
“교감선생님…… 꼭, 살아남으세요.”
“당신은 저희의 등불입니다.”
“살아서 봬요.”
교감을 지나치는 순간 그에게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교감도 자신의 옆을 스쳐 가는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오히려 격려했다.
“살아서 보세.”
교감은 그 한마디를 건네곤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마녀를 향해 나아갔다. 마녀를 향해 다가가는 그의 뒷모습에서는 비장함의 오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봐, 학생! 너도 얼른 이리 와.”
몸을 피하던 국어과 담당 정 선생이, 마녀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진우를 보며 소리쳤다.
진우는 그 소리를 듣고 쭈뼛쭈뼛 정 선생을 향해 걸어갔다. 그 역시 마녀의 광기 넘치는 눈에 압도되어 꼼짝 못하고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 교감선생님, 문 닫겠습니다.”
타앙!
진우가 안전지역으로 대피한 것을 확인한 정 선생이 교무실의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넓은 교무실 안에는 교감과 마녀로 변한 이 선생만이 남았다.
“꺄하하하하하―!”
이 선생은 여전히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교감이 당당히 한 발을 내디뎠다.
‘크흐흐, 교장 그놈이 웬일로 이 황금 같은 자리를 피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이야말로 내가 고대하던 순간이 왔구나.’
마녀를 바라보는 교감의 눈이 욕망으로 번뜩였다. 이 선생은 마녀로 변신하면 자신이 마녀가 되어 행했던 모든 일을 잊어버린다. 즉, 마녀 상태일 때 무슨 짓을 하든 제정신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 선생…… 많은 걸 바라진 않소. 하, 한 번만 안아 볼 수 있게 해 주시오.”
교감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그 말에 마녀의 움직임이 잠깐 멈칫했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펴, 평소에 이 선생을 사모해 왔소. 비록 나이 차는 스무 살 가까이 난다지만 사,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해 낸다고 들었소.”
교감의 몸짓 하나하나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향해 나아가는 거미와 같았고, 붉게 충혈된 눈은 끈적였다. 그는 교장과 더불어 이 학교의 호색남 2인조 중 한 명이었다.
감정의 감정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게 된 교감이 이 선생에게 날아갔다.
“사, 사랑하오!”
퍼억!
예상대로, 마녀의 공격은 강력했다. 사각을 노려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무기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다.
“크윽……. 여, 역시 쉽진 않군.”
교감은 책상 사이에 처박힌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다시 뛰어들 준비를 했다. 결의를 다진 눈빛은 지옥의 악마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쉽지 않을 것이오. 단단히 각오하시오, 이 선…….”
“뭐 하시는 거죠, 교감선생님?”
자신의 말을 끊으며 들려오는 말소리에 화들짝 놀란 교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선생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오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눈동자도 본래의 맑은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소 이 선생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어, 어떻게?”
교감은 현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말까지 더듬었다. 이 선생이 마녀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그녀의 폭발적인 성질 때문이라면, 그녀가 정상으로 되돌아온 이유는 여자로서의 본능이랄까. 짐승같이 변한 남자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자로서의 본능이 그녀를 일깨워 준 것이다.
“휴, 저번에 교장선생님도 그러시더니 이번엔 교감선생님까지……. 실망했어요.”
교감은 이 선생의 말에 머리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 말인즉, 교장이 자신보다 먼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뜻이었고, 그가 갑작스럽게 전치 4개월의 부상을 입어 입원했던 베일에 싸인 사건의 원인과 그가 평소에 호시탐탐 노리던 이 선생을 버리고 급하게 도망간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이런 능구렁이 같은 교장 놈.’
교감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만약 이 선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 또한 전치 4개월의 부상으로 입원해야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그는 이 선생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하하…… 이 선생, 무언가 오해가 있었는 듯하네만, 난 변신한 자네를 막기 위해 모두를 대피시키고 나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네, 그 부분에서 무언가 오해가…….”
“아, 그래서 한 번만 안아 보시겠다고 한 건가요?”
“아, 그, 그건…….”
“사랑한다면서요?”
“…….”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덮치려 하다니…… 최악이네요, 교감선생님.”
이 선생의 말에 교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을 알아 버렸기에 더 이상 반박하면 본전도 건지지 못하리란 것을 알기에 그는 조심스레 이 선생의 표정을 살폈다.
온화한 미소. 마치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듯한 저 미소를 보니 자신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줄 것 같다. 교감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렸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어깨를 향해 찍어 오는 막대기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퍼억!
“크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교감의 무릎이 꿇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화가 났다. 그래도 자신은 명색이 이 고등학교의 교감이 아닌가. 서열로 따지자면 위에서 두 번째다. 그 생각을 하니 교감은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난 이 학교의 교감이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가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이 선생!”
“왜 그러시죠?”
“……미안하네!”
이 선생의 매서운 눈빛을 받자, 교감의 불타오르던 투지는 폭풍 앞에 촛불처럼 꺼져 버렸다. 다만 감정의 변화가 너무 빨랐기에 표정관리까지는 못했지만.
“어머, 그런 표정으로 할 말이 아닌데요?”
이 선생의 말대로 지금 교감의 표정은 전혀 미안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부릅뜬 눈에는 독기가 충만했고 악다문 입에서는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는 감정은 일말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 미안하네. 지금 바로 고치겠네.”
순식간에 최대한 비굴한 표정으로 바꾼 교감.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선생의 화를 재촉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막대를 위로 치켜들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죽어 주세요.”
후웅.
“으악!”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그녀의 무기가 교감을 압박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