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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게니아 1권(4화)
1장 마법사가 되고 싶은 소년(3)
한편 이미 교무실 밖으로 피난해 있던 선생 일동은 교감의 모습에 눈시울을 적셨다. 안의 대화 내용은 밖에서 전혀 들리지 않았기에, 그들은 교감이 자신들을 대신해 희생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저기요…….”
그들이 교무실 안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때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머리가 코끝까지 내려오는 그 소년은 진우였다. 그는 눈물로 얼룩진 시선을 받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전 가도 되죠?”
그의 말에, 그를 데리고 나왔던 정 선생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몸조심해라.”
진우는 그 말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방금 전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생생했다.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야, 뭐 하다 왔어?”
교실 문을 열자마자 준서가 그에게 다가왔다. 진우는 그를 가볍게 옆으로 밀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장래희망이 이상하대.”
“뭐라고 썼는데?”
“마법사.”
“…….”
진우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준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뭐라고 고쳤는데?”
진우는 대답 대신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턱을 괴었다.
“대마법사.”
가상게임. 꿈으로만 치부되어 왔던 이 말은 2015년 미국에서 현실로 이루어졌다.
뇌에 가상의 정보를 주어 현실로써 인지하게 하는 이 기술은 현재 의학 분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었고, 이로 인해 현재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미국에서 처음 발매된 이후 점차 세계로 전파된 이것은 미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거쳐 동양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처음엔 문제가 많았지만 세계 여러 곳곳으로 퍼지면서 결국 완성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고, 한국에서 그 긴 여정을 마쳤다.
처음 미국에서 발매되었을 당시 5,000달러(약 500만 원)를 상회하던 이 기계의 값은 점차 물량이 늘어나면서 한국에 들어올 당시에는 약 100만 원에 달했다.
전 세계에 뻗어 있는 이 거대한 네트워크는, 미국에서 먼저 발매되었기에 상위 랭커 대부분을 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간혹 미국이 아닌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의 몇몇 나라 사람들과 일본, 중국 등 동양인 몇몇이 상위 랭커에 등록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에 물량이 풀리자 사람들은 그것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 거기 좀 비켜 봐요. 내가 먼저 왔다니까.”
“먼저 오긴 개뿔. 그럴 소리 하려면 뚫는 데나 집중이나 하시지?”
개장 시간이 8시인 대형마트의 문 앞에서 사람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들어온 물량은 턱없이 부족한 스무 개였다.
“와, 사람 진짜 많네.”
먼저 들어가려고 싸우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는 소년이 눈을 빛내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키가 큰 한 소년이 있었는데, 앞머리가 코끝까지 내려와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그 둘은 진우와 준서였다. 여유로운 준서의 모습과 달리 진우는 발까지 동동 구르며 ‘나 불안하다’라는 말을 얼굴에 써 놓은 듯했다.
“야, 못 사면 어떡하지? 우리도 저기 가서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진우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몸을 비비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준서도 그의 눈을 따라 그곳을 보더니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하, 하지만, 저거 못 사면 앞으로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다른 매장도 다 이럴 텐데…….”
“괜찮다니까. 믿음을 갖고 기다려 봐.”
준서의 침착한 말을 들으면서도 진우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 갔다.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그가 달려갈 준비를 했다.
“에이 씨, 그럼 나 혼자 가서 뚫는다.”
“어어, 잠깐만 기다려 보라니까.”
“못 기다려! 내 꿈이 날아가게 생겼단 말이야.”
“어……? 야!”
진우가 말을 마치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딘 그때 그들의 옆으로 다가온, 검은색 양복을 빼입은 인상 좋은 청년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준서 님이십니까?”
그 말에 금방이라도 앞으로 튕겨 나갈 듯한 진우의 몸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돌아갔다.
“네, 제가 준서예요.”
준서가 오른손을 번쩍 들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 마치 이런 일을 자주 겪어 본 듯 그는 자신만만했다.
“아, 제가 잘 찾아왔군요. 가시죠, 부탁하신 것 두 개를 준비해 놨습니다.”
“네. 뭐해? 어서 안 오고.”
준서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진우를 보며 손짓했다. 진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어떻게 된 거야?”
“권력이란 좋은 거란다.”
준서의 알 수 없는 말에 진우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그들은 물건을 손에 가득 안고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매장을 나왔다.
“이제 아이디 등록하러 가자.”
“응? 그런 것도 해야 해?”
“응. 실명제 확인을 위해서란다. 택시!”
그냥 지나칠 뻔한 택시를 간신히 붙잡으며 그들은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Evgeneia Scan Center
“에브게니아?”
택시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거대한 간판이었다. 영어로 쓰인 그것을 읽은 진우가 준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이번에 오픈할 게임이 에브게니아(Evgeneia)인가 봐.”
“아하.”
“들어가자.”
준서가 먼저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스캔 센터는 내부가 무척 컸다. 카운터까지 거리가 눈으로 봐도 50미터는 넘을 것 같았고, 그 넓은 길 양옆에는 문이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게다가 카운터 옆 쪽으로 계단이 있는 것을 보니 위에 층이 더 있어 보였다.
‘이런 곳이 세계에 몇 백 개나 있다는 거지…….’
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운터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 듯 50미터나 되는 넓은 공간에 구불구불 줄을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차례가 오자 카운터 직원이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접수하러 오셨나요?”
진우와 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그녀가 서랍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더니 그들의 앞에 놓았다.
“그럼 여기 있는 신청서에 빠짐없이 모두 적어 주세요. 다 적으시면 4층의 24번 방, 25번 방으로 들어가셔서 스캔을 하면 됩니다. 안에 하는 방법이 써 있으니 어려움은 없으실 겁니다.”
직원이 카운터 오른쪽에 위치한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4층이요? 엘리베이터 없어요?”
진우와 준서가 입을 떡 벌리자 안내원이 피식 웃었다.
“저희뿐 아니라 모든 지부에 엘리베이터가 없습니다. 회장님이 엘리베이터를 싫어하시기 때문이죠. 죄송하지만 계단을 이용해 주세요.”
진우와 준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계단을 올라가 4층에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약 5평 남짓한 방 안 공간은 캡슐이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방 오른쪽 벽면에 사용법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진우는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완료되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주세요.」
잠시 후 스캔이 끝났다는 기계음에 진우는 캡슐 오른쪽에 삐죽 튀어나온 디스크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준서도 끝난 모양인지 진우가 문을 열자마자 그가 들어갔던 방의 문도 열렸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디스크 하나당 아이디는 하나밖에 만들지 못하니 아이디를 생성할 때 신중을 기해 주세요. 그리고 스캔은 6개월에 한 번씩 해야 합니다.”
디스크를 카운터에 갖다 주자 카운터 직원이 디스크를 컴퓨터에 등록시킨 뒤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들은 디스크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산 끄트머리에 걸리자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에 들어간 진우는 기기를 연결하고 헤드기어를 머리에 쓴 뒤 아이디카드를 꽂고 접속을 시도했다.
헤드기어를 쓰자 주위가 모두 어둠에 휩싸인 듯 깜깜했다.
눈이 차차 어둠에 적응될 때 어둠 속에서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눈앞이 점점 환해지기 시작했다.
「에브게니아(Evgeneia)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하시는 분이라면 아이디를 새로 생성해 주세요.」
배경은 절로 드러눕고 싶어지는 초원이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아이디 생성.”
진우는 이미 매뉴얼을 보았기 때문에 간단한 명령어는 머리에 꿰고 있었다.
「아이디 생성 모드입니다. 사용할 아이디를 말해 주세요.」
잠시 골똘히 생각한 그가 입을 열었다.
“토르.”
사용할 아이디를 말하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접속하시겠습니까?」
“응.”
「접속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진우는 두근대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2장 에브게니아(1)
잠시 후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시원한 바람, 계절 특유의 냄새,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 하물며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까지…….
신기한 마음에 연신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접속이 완료되었습니다. 즐거운 게임 하세요.」
진우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처음 접속하는 유저들이 시작하는 곳인 듯, 이곳은 똑같은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각자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두 동양인인 듯 서양인은 보이지 않았다. 서양인을 볼 수 있으리라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와, 진짜 신기한데?”
“그러게 말이야.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이 안 돼.”
진우는 저와 마찬가지로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에게서 신경을 거두었다.
“메뉴.”
팟.
그의 가슴과 얼굴 중간 정도의 공간에 네모난 창이 생겨났다. 메뉴창의 왼쪽에는 그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가 떠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지금 걸치고 있는 옷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나구나…….’
평소 거울을 잘 보지 않는 진우는 메뉴창에 뜬 자신의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눈을 가릴 정도의 긴 앞머리와 덥수룩한 머리. 185센티미터가 넘을 듯한 훤칠한 키. 긴 다리와 넓은 어깨. 균형적으로 발달된 몸이었다.
오른쪽에는 상태창과 스탯창, 마법창, 아이템창 등 게임에 필요한 목록들이 있었다.
그는 상태창에 손을 갖다 댔다.
【아이디 : 토르
레벨 : 1
명성 : 0
직업 : 초보자
체력 : 500/500
마력 : 500/500
힘 : 5
민첩성 : 5
지능 : 5
행운 : 5
지구력 : 5
보너스 스탯 : 0】
손을 갖다 대자 메뉴창 외에도 새로운 창이 하나 더 생기며 현재 자신의 상태에 관련된 내용들이 스르륵 떴다.
그는 그것을 쭉 훑어본 뒤 세계지도라고 써 있는 버튼에 손을 갖다 댔다. ‘로한’이라고 써 있는 지도를 점점 축소하자 점차 대륙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륙은 놀라울 정도로 유라시아 대륙과 흡사했다. 미개척 지역이 많아 대부분이 흰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주요 도시만큼은 표시되어 있었다.
한국에 로한! 중국에 카프리! 일본에 스시!
그 외에 유럽 대륙과 중동아시아 쪽에도 여러 빨간 점들이 찍혀 있었다. 접속한 서버가 한국이면 로한, 중국이면 카프리, 일본이면 스시로, 서버를 구별하는 데 쓰이는 것 같았다.
진우가 지금 서 있는 로한이란 도시는 초보자들이 시작하는 곳이어서 인파가 제일 넘쳐났다.
진우는 축소했던 지도를 다시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한의 지리를 천천히 훑어보다가 마법사의 탑이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대마법사가 되려면 먼저 마법사가 되어야겠지.”
그는 마법사의 탑을 향해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