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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게니아 1권(6화)
2장 에브게니아(3)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중천에 걸려 있던 해가 어느덧 서쪽 끄트머리에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을 시간에 진우는 눈을 떴다.
“흠.”
간신히 보일 듯 말 듯했던 마나는 이제 뚜렷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안정감이 들게 했다.
그는 마나에게 둔 시선을 거두고 정보를 열어 보았다.
【마나 느끼기 : Lv5. 대기에 들어 있는 마나를 느끼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함. 숙련도 100/100】
“100에서 안 오르네? 이게 마스터 레벨인가?”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숙련도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정보창을 닫은 그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마스터 레벨에 오른 이상 더 이상 이 스킬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가 볼까.”
“아니? 벌써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된 겐가?”
진우가 찾아오자 노마법사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진정된 듯 횡설수설하던 그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허허, 내 평생 자네같이 빨리 성장한 마법사는 처음 보았네. 7클래스 유저인 나도 몇 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마나를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일세.”
진우는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심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허, 대단허이…….”
마법사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진우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잠시 동안 주춤하던 그가 이내 카운터 뒤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왔다.
“이것이 그 다음 편인 ‘의지로써 마나를 다스리자’라는 책이네. 받아 두게.”
“이번에도 공짜죠?”
“…….”
선의의 마음에서 선뜻 책을 건네 줬건만 이게 무슨 말인가? 노마법사의 표정이 변해 가는 것을 본 진우가 잽싸게 그의 손에서 책을 낚아채 밖으로 달려갔다.
노마법사가 준 책을 펴자 책장이 자동으로 넘어가서 사라지는 것까진 예전과 같았다. 그러나 이번엔 어쩐 일인지 새로운 스킬이 생겨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그는 적잖이 당황하며 다시 노마법사를 찾아갔다. 오류 때문에 스킬이 안 생겼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노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 책 한 권 더 줄 수 없으세요?”
나이가 들면 꼬장이 심해진다 했던가? 노마법사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왜?”
“음…… 잃어버려서요…….”
거짓말을 한 진우는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노마법사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노마법사의 표정은 밝았다. 오히려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줄 수야 있지만…… 그러려면 돈을 내야 한다네. 이번 것은 좀 비싸. 50브론즈야.”
노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돈이 없는 진우는 최대한 동정을 얻을 수 있는 표정을 지으며 노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공짜로는…… 안 될까요?”
“안 돼.”
하지만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못한 듯 단호한 노마법사의 말에 진우는 그냥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결국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마탑을 빠져나왔다.
“쪼잔한 늙은이.”
그는 노마법사를 욕하면서 책이 사라진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스킬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다른 건 다 잘됐는데 왜 이것만 안 된단 말인가. 진우는 억울한 마음에 죄 없는 돌만 뻥뻥 찼다.
퍽.
“아얏! 누구야?”
운 나쁘게도 그에게 걷어찬 돌이 정면으로 날아가 한 사람의 등을 가격했다.
순식간에 표정을 일그러뜨린 진우는 재빨리 ‘난 아니오’라는 표정으로 바꿨다. 하지만 고개를 하늘로 돌려 휘파람을 부는 모습은 여지없이 ‘내가 했소’라고 말하고 있었다.
“돌을 맞혔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니야?”
키가 간신히 170센티미터 정도 될 법한 소년이 다가와 진우에게 말을 걸었다. 더 이상 딴청을 피울 수 없는 것을 직감한 그는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화가 나 있어…… 어? 너 준서 아냐?”
“엥? 뭐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자아내는 이 앞머리를 달고 있는 넌…… 진우냐?”
진우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서는 가죽갑옷과 방패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허리춤에 아담한 검까지 착용한 것으로 보아 기사로 직업을 가진 듯했다.
“응. 반갑네.”
진우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서도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보아하니 마법사로 전직한 듯싶다?”
준서가 진우의 차림새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회색 로브에 나무지팡이를 들고 있는 진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초보 마법사였다.
“응. 그러는 넌 기사 같다.”
“빙고.”
준서가 진우의 말에 씨익 웃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덧 북문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준서가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마법 써 봐.”
“응?”
“마법. 너 마법사잖아.”
“아…… 잠깐만.”
진우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준서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매직 에로우!”
“…….”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당연히 나갈 줄 알았던 마법이 나가질 않았다. 심지어 그의 앞에 캐스팅 시간을 표시하는 바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어라? 매직 에로우!”
재차 외워 봤지만 마법은 나가지 않았다. 준서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실소했다.
“뭐야, 너 아직 마법도 안 배웠냐?”
진우는 준서의 말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입을 열었다.
“아냐, 배웠는데…… 아깐 잘 나갔는데…….”
“지금은 안 나가잖아.”
준서가 자꾸 이죽거리자 진우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왜 이러지? 그것 때문은 아닐 테고…….”
“뭐가?”
진우는 준서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분명 마나 느끼기 스킬을 배운 후로 마법이 실행되지 않으니 아마 그 스킬 때문일 거라고 그는 단정지었다.
“에이 씨, 그러면 20브론즈나 더 있어야 해?”
“아까부터 뭔 소리냐…….”
준서는 자꾸 진우가 혼자서 헛소리를 지껄여 대자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주위를 둘러보던 진우의 눈이 빛났다. 마나 느끼기 스킬을 사용했을 때 보였던 푸른색의 마나가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떠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이거 보이냐?”
“뭐?”
“이거. 여기 푸른 마나 있잖아.”
준서는 진우가 가리키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심히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그를 다시 보았다.
“넌…… 병원부터 가야겠다.”
준서의 걱정스런 말투를 자연스레 무시한 진우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나만 보이나?”
“야, 야. 무슨 일이야. 나도 좀 같이 알자.”
준서가 곁으로 다가와 재촉하자 진우는 생각을 멈추고 지금까지의 일을 자초지종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준서는 그제야 진우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브론즈가 필요하다는 거네.”
“응.”
준서는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뭣하면 이 형님이 좀 빌려 줄까?”
“아니, 그건 사양.”
진우가 딱 잘라 거절하자 준서는 피식 실소했다. 원래 이런 놈이었다 생각하며.
애초에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였다. 더불어 지인에겐 한없이 착하지만 지인에게 해를 입히는 자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 결단 내는 무시무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스킬이 사라질 리는 없고……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나도 몰라.”
진우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스킬이 사라질 리는 없다. 만약 다시 책을 사서 사용한다 해도 스킬이 새로 생기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대마법사가 될 내가 마법조차 못 쓰게 될 줄이야. 의지로써 마나를 다스린다라…….’
진우는 책의 제목을 곱씹으며 자신의 주위에 있는 푸른 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게 매직 에로우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순간, 마나가 거세게 요동쳤다. 눈으로도 울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진우는 깜짝 놀랐다.
“저, 저거 봤어?”
“뭘?”
진우가 마나가 울렁거린 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준서의 고개도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 미안. 넌 안 보이지?”
“죽을래?”
진우는 정말 놀라서 한 말이었지만 준서는 그가 자신을 놀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우도 준서의 입장을 알기에 그냥 씁쓸한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진우는 다시 푸른색의 마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의지. 즉, 내가 원하는 것. 다시 말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실현되길 원하는 마음. 내가 지금 저 마나에게 원하고 있는 것은?’
“……매직 에로우.”
진우의 입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마나에게 매직 에로우가 될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의지가 되어 마나를 움직일 것이다.
그의 주변에 있던 푸른 마나가 곧 자신들끼리 뭉치면서 형을 이루어 갔다.
“야, 야. 아서라. 또 실패하면 낙담할 거면……서? 어라? 저게 매직 에로우야?”
준서는 진우의 주위에 나타난 하나의 초록색 화살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우가 자신의 위쪽에 자리한 매직 에로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 어,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