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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게니아 1권(17화)
5장 아이템 원정단(4)


터벅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통로를 울리고 있었다.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은데.”
주위를 둘러보던 준환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횃불로 밝힌 통로는 간간이 보이는 해골과 조금씩 묻어 있는 핏자국을 제외하면 아주 깨끗했다. 앞의 두 개 통로와는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서 진우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뭔가 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수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놈이다.’
그는 주위의 흔적을 차근차근 살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그와는 악연인 듯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다 온 듯하다.”
준환이 앞에 있는 거대한 석문을 보며 말했다.
일행은 각자 무기를 꺼내 꽉 쥐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준환은 앞에 있는 석문에 손을 가져갔다.
쿠르르릉.
석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와 함께 내부의 강렬한 빛이 그들의 각막을 자극했다. 눈이 빛에 익숙해질 때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갔다.
“헉.”
내부를 본 준서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곳엔 몬스터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들의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꽈과앙!
그 중심에는 유저인 듯한 자가 어떤 몬스터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본 일행은 몬스터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크아아악!
몬스터가 이 던전의 보스인 듯, 그것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가히 놀라웠다. 멀리 떨어진 그들에게도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몬스터는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양손에 엄청난 불을 생성하더니 자신과 싸우고 있는 유저에게 날렸다.
화르르륵.
“흥! 공격이라는 것은…….”
유저는 몸을 살짝 젖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 냈다. 그의 몸을 스쳐 지나온 불덩이가 주변의 암석에 부딪히더니 이내 암석을 말 그대로 증발시켜 버렸다.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화염계 최강의 마법 헬파이어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마법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 둘의 격전은 대단했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한 유저가 재빨리 몬스터에게 접근했다.
―크윽!
몬스터는 애초에 근접 전투형이 아닌 듯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쐐애액.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섬광과 같은 유저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몬스터는 그에게 공격을 허용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카오스(Chaos)!”
그의 말이 공터를 울리고 그의 팔이 대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지 검과 그것을 움직이는 두 손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검이 휘둘러진다고 추측되는 곳에 검은색 선이 죽죽 그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흥. 좀 강하다고 나대지 말…….
쩌억.
유저의 공격이 지나가고 다시 공격하려던 몬스터의 얼굴에 검은 사선이 그어지더니 그 선을 중심으로 잘린 얼굴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몸에 검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선을 중심으로 몸이 갈라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진우 일행은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수는 무엇이 그리도 화가 나는지 움켜쥔 손을 부들거리다 못해 몸 전체를 떨고 있다.
유저는 몬스터에게서 떨어진 아이템을 줍는 듯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것을 가방에 소중히 챙겨 넣었다.
그가 진우들이 있는 통로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밖으로 나가려는 듯했다.
“응? 너흰 누구지?”
그가 진우 일행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황한 준환이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희는 이 던전을 탐험하러 온 파티인데…….”
그 말을 들은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흥. 너희같이 약한 놈들이 올 만만한 곳이 아니다. 뭐, 상관없지.”
그는 나직이 내뱉으며 일행에게 걸어갔다. 그런 그를, 일행은 경계하기 시작했다.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 웃겼던 모양인지 그가 비웃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걱정하지 마라. 난 조용히 밖으로 나가고 싶을 뿐이야.”
그러면서 그는 일행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응?”
무엇을 발견한 모양인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오. 이거, 이거…… 전에 나에게 덤볐던 애송이가 아닌가.”
그가 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수는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큭큭큭, 왜? 여기서 한판 하려고? 안 됐지만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만 갈 테니 길 좀 비켜 주지 않겠나. 갈 길이 바쁜 사람이야, 난.”
그런 말을 했지만 그는 멈춤 없이 계속 걸어왔다.
“개자식…….”
두수가 그런 그를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큭큭큭. 약한 놈들은 당연히 그래야지. 보스를 잡았으니 분명 카오스 게이트가 생겼을 터.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 보지 그래?”
그가 비웃음 섞인 웃음을 날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거대한 공터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이 자식이.”
준환은 그런 그를 공격을 하려 했지만 이내 두수의 손에 저지되었다.
“뭐하는 짓이야?”
준환이 그런 두수를 의문을 담아 바라보았다.
“지금 덤비면 죽어.”
두수가 이를 갈며 말했다.
“큭큭! 상황 파악이 좀 되는 놈이군. 전보단 발전했는걸?”
그는 광포하게 웃었다. 진우 일행은 그런 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큭큭…….”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웃으며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돌아……가자…….”
두수는 이를 갈며 카오스 게이트로 걸어갔다.
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자 도저히 아무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일행 역시 두수를 따라 카오스 게이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6장 난 마법사야(1)


대평원 한복판. 뇰로 추정되는 몬스터 떼와 유저 한 명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유저는 커다란 백색의 구체를 뇰에게 던졌는데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새까맣게 타는 것이 위력을 알 만했다.
회색의 로브에, 특이하게 검과 지팡이를 동시에 차고 있는 그는 진우였다.
“라이트닝 볼트!”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아 번개의 구를 만든 진우가 눈앞에 있는 뇰에게 그것을 던졌다.
파지지직.
번개의 구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것은 지름이 1미터는 될 만한 엄청난 크기였다.
―끼에엑!
라이트닝 볼트에 격중된 뇰의 몸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마치 통구이가 된 듯, 뇰은 머리부터 꼬꾸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후우.”
그의 주위엔 열 마리 남짓한 뇰들이 하나같이 털을 검게 그을린 채 죽어 있었다. 그는 뇰의 시체들을 스윽 둘러보고는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뇰에게서 얻은 아이템 중 장비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진우의 손엔 상점에 팔 만한 잡다한 아이템들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나게이지가 한계에 도달하자 그는 앉아서 명상을 시전했다.
주위의 마나가 짙은 푸른색을 띄며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마나게이지의 회복을 확인한 그는 상태 창을 열었다.

【아이디 : 토르
레벨 : 28
명성 : 12
직업 : 마법사(4클래스 유저)
체력 : 1210/1210
마력 : 2050/2050
힘 : 5
민첩성 : 5
지능 : 86
행운 : 5
지구력 : 5
보너스 스탯 : 3】

어느덧 4클래스에 오른 진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로부터는 도저히 만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는 명상을 하면서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카오스 게이트를 통해 마을로 돌아온 진우 일행은 벌레 씹은 표정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좀 전의 일로 무척 화가 난 것이다.
“야, 도대체 그 자식 누구야?”
준환이 시뻘겋게 붉어진 얼굴로 두수를 노려봤다.
하지만 두수는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그런 두수의 태도에 열이 뻗쳤는지 준환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두수는 그저 착잡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수를 쳐다보는 준환의 눈에 살기가 가득한 것이, 잘못하면 싸움이 날 판이었다.
한동안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이윽고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두수의 입이 열렸다.
“넌 죽었다 깨어나도 그놈을 이길 수 없어.”
두수의 말을 들은 준환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그는 두수의 멱살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라고?”
준환의 살기 가득한 눈빛에 진우 일행은 몸을 떨었다.
“나도 이기지 못한 놈이다. 레벨 다운을 감수하면서 사용하는 그 기술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고!”
두수가 절규하듯 외쳤다.
“도대체 네 레벨이 몇인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가 케테르가 아닌 이상 난 맹세코 이길 자신이 있어.”
두수의 절규에 마음이 착잡해졌는지 준환의 말투는 다소 너그러워졌다. 하지만 두수는 준환의 말에 비웃음을 날렸다.
“큭큭. 케테르가 아닌 이상 이길 수 있다고? 웃기지 마셔. 케테르보다 더욱 강한 내가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하고 당했단 말이다.”
그의 말에 준환과 일행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뭐, 뭐?”
“그것은 단지 표면에 드러난 사람들의 레벨이다. 너희들이 멋대로 정한 미친 폐인 오인방도 마찬가지지. 그들 말고도 강한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했나 보지? 우습군.”
준환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 사실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자만하지 마라. 너희보다 훨씬 강한 사람도 많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말을 끝낸 그는 상태창을 공유해 일행에게 보여 주었다.
“마, 맙소사 레벨이 63?”
일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준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단지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을 뿐.
“이 게임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들어오기 전, 영국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먼저 할 수 있었지. 잘 찾아보면 한국에 그런 사람이 몇 있을 거다. 내가 제대로 된 공격도 못 하고 완패를 당했는데, 겨우 레벨 37인 네가 덤비겠다고? 케테르가 아닌 이상 이길 자신이 있다고? 그럼 어디 한번 덤벼 보시지.”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레벨 다운을 감소하고 사용한 최강의 기술도 그에게는 소용없었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보기 좋게 파훼당했지. 덕분에 난 내가 가지고 있던 슈퍼 급 아이템도 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슈퍼 급이란 말에 일행의 눈이 또다시 급격하게 커졌다. 그만큼 그 아이템이 주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는 멱살을 잡고 있던 준환의 손을 쳐 냈다.
“자만하지 마라.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이기지 못해.”
두수의 입가가 비틀린 것이, 비웃음을 날리는 듯했다.
그의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일행은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젠장.”
적막감 속에 준환의 욕설이 울렸다.

그 후로 두수는 동아리에 나오지 않았다. 준환도 마찬가지였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던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활기찬 동아리 활동을 위해서 그들이 안 나오는 것은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괜히 나왔다가 싸우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상념을 마친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잡아 볼까.”
그는 저 멀리 보이는 뇰 떼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뇰에게 접근한 진우는 주위의 마나를 끌어 모았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무수히 많은 밝은 구체가 생겨났다.
“그럼 가 볼까.”
진우는 입에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뇰에게 던졌다.
파지지직.
전보다 더욱더 거센 소리가 라이트닝 볼트의 레벨이 훨씬 올랐음을 증명해 주었다.
―끼륵?
뇰들은 다가오는 밝은 구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의문을 품을 때 드디어 첫 번째 라이트닝 볼트가 뇰에게 명중했다.
치지지직.
―끼에엑!
라이트닝 볼트에 격중된 한 마리의 뇰이 통구이가 되자 그들은 라이트닝 볼트가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곳엔 무시무시한 속도로 언덕을 내려오는 진우가 있었다. 그는 뇰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지체 없이 점프했다.
그가 착지한 곳은 놀랍게도 뇰 떼의 한가운데. 마법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의 의도를 보여 주듯 그는 외쳤다.
“라이트닝 익스플로전(Lightning Explosion)!”
그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오자 반구(半球) 형태의 번개의 막이 그의 몸을 중심으로 주변에 퍼져 나갔다.
지지지지직.
이른바 4클래스 마법이 발현된 것이다.
뇰들은 자신의 무리에 들어온 진우를 보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동료의 죽음에 대한 분노보다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끼에에익.
기세 좋게 달려오던 뇰들은 진우의 몸에서 퍼져 나온 번개를 맞고는 하나 둘씩 통구이가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놈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번개의 막이 몸에 닿자 몸을 부르르 떨기만 할 뿐이었다.
“스파크(Spark)!”
진우는 부르르 몸을 떠는 뇰에게 손을 뻗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손으로 가리킨 곳에 파직파직 스파크가 튀더니 이내 번쩍, 하며 빛이 났다. 빛이 사그라지자 거기엔 새까맣게 타 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물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뇰들은 그 모습에 몸을 떨었다.
진우는 그런 뇰들에게 라이트닝 볼트를 한 발씩 선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