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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7화)
2장 노예들을 장악하다(4)
짜아아악!
쇠테를 두른 채찍이 카라스의 등을 두드렸다. 살갗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이미 그의 등은 얼기설기 생긴 핏자국으로 인해 바둑판을 방불케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허억, 후욱. 뭐 이런 독종이 다 있나. 퉤에!”
카라스를 매질하던 가드가 넌더리를 내며 이마를 훔쳤다. 소매에 땀이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이미 한 시간 가까이 매질을 했는데도 그는 카라스로부터 비명 한 마디 듣지 못했다.
그때 출입구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은 잘 되어 가나?”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다름 아닌 가드들의 지휘관 슈너드 남작이었다. 그는 부관 레이하트를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몸소 독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가드를 돌아봤다.
“자네도 잠시 나가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곧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남작과 카라스 두 사람만 남았다.
남작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카라스라고 했나. 이로써 두 번째 만남이로군.”
“…….”
“정신을 잃지 않은 것, 알고 있다.”
그 말에 카라스가 피식 웃었다.
“……오래 기다리도록 하는군요.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카라스는 내심 긴장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아마 남작은 이번에 나올 제안을 하기 위해 자신을 가두고, 미리 기를 죽여 놓기 위해 매질을 했을 것이다.
과연 남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놈, 리퍼가 하던 일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은 어떤가?”
“…….”
카라스는 섣부른 대답을 아꼈다. 아직 남작의 말에 또 다른 속뜻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작의 말이 이어졌다.
“기왕지사 스스로의 힘으로 빼앗은 것이니, 작업조장이 되어 보란 말이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혹시 글을 읽을 줄 아나?”
“조금은 가능합니다.”
“노예 주제에 글을 어디서 익혔지? 그래도 다행이군. 이야기가 빨라져서.”
남작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싶은 순간, 카라스의 손목을 죄고 있던 쇠심줄이 단박에 끊어졌다.
카라스는 내심 감탄했다.
남작은 자신의 손목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않고 질긴 심줄만 잘라냈다. 내력을 조절하는 수법에 도가 텄다는 뜻이다.
그는 내심 자신이 천마신공을 되찾았을 때의 수준과 비교해 남작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아마도 천마신공 3성 정도의 공력이면 남작과 평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라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슈너드 남작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는 잠시 남작의 안색을 살피다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종이 위에 박힌 활자를 읽어 나갔다.
“……!”
활자를 훑어가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남작의 느긋한 목소리가 그런 카라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매달 리퍼가 헌납하던 금액이다. 뭐, 당장이야 그만큼은 힘들겠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리퍼의 자리를 빼앗은 놈이니 그 정도 수완이 없을까. 나름 자네에 대해서는 기대가 많으니 노력해 보도록.”
“…….”
카라스는 할 말을 잃었다.
서류에 빼곡하게 적힌 것은 그간 리퍼가 슈너드 남작에게 매달 상납했던 뇌물의 물품 목록과 금액 환산 가치였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작업조장이라 해도 리퍼는 일개 노예이다. 하지만 서류에 적힌 금액은 그런 노예가 마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카라스는 남작을 보며 반문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리퍼가 그걸 어떻게 마련했느냐고?”
“…….”
“간단하지. 이곳은 메탈슈트 공장이다. 각종 귀금속과 희귀 광물들을 다루는 곳이란 말이다. 그러니 네놈도 작업조장이 되면 노예들을 쥐어짜. 알았나? 작업을 하는 틈틈이 그걸 빼돌려. 그리고 그걸 모아서 가지고 오란 말이다.”
“금액을 못 채우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노예들에 대한 배식이 줄어들겠지. 작업량은 더 많아질지도 모르고. 몇 놈이 굶어 죽으면 네놈의 생각이 바뀔 테니 썩 괜찮은 방법이지. 안 그런가?”
“…….”
이제야 남작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남작에게는 리퍼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말 잘 듣고 노예 관리 잘 하면서도 정기적으로 착복을 거들어 주는 애완용 개가 작업조장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노예를 상대로 착복을 하다니.
리퍼가 주변에 해악을 끼치는 소악당이었다면, 이 눈앞의 슈너드 남작은 그 소악당을 등쳐 먹는 악당 중의 악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와드득.
카라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남작의 얼굴을 직시했다.
슈너드 남작의 눈초리도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노예?”
“…….”
둘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부딪혔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카라스는 숨을 쉬기 힘든 압박을 느꼈다. 남작의 몸에서 감당키 힘든 살기가 솟아났기 때문이었다.
“훗.”
하지만 그 살기는 슈너드 남작이 웃음을 터뜨리며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는 이내 연초 파이프를 입에 물고서 한참을 웃었다.
“허허, 이놈 참 물건이로군. 내 살기를 정면으로 받는 것도 모자라 대들기까지? 만약 금제의 낙인이 없었다면 정말로 덤벼들었을지도 모르겠군. 껄껄껄.”
남작이 돌아서면서 말했다.
“처음 이 제안을 받으면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지. 열흘 정도면 충분하려나?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잘 생각해 보도록. 그럼 이만.”
“…….”
카라스는 그대로 풀려났다. 그는 가드들의 감시를 받으며 수용소로 돌아왔다. 상처투성이인 채로 돌아온 그를 노예들이 걱정 반 두려움 반인 시선으로 맞이했다.
“구경났나?”
그의 한 마디에 노예들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카라스는 비틀거리며 쉴 곳을 찾아갔다. 그런 그가 걸어간 곳은 리퍼가 사용해 오던 자리였다.
3구역 노예 수용소에서 가장 편안한 자리다. 바로 우두머리의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주변 노예들 중에 카라스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차.”
뒤늦게 제노 영감을 떠올린 카라스는 다른 노예를 시켜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곧 그 노예가 돌아와 영감의 소식을 전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곤하게 잠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제야 안심한 카라스는 리퍼가 사용하던 자리에 누웠다. 푹신한 모포가 그의 몸을 받았다. 등에 난 상처가 쓰렸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자꾸 번잡한 상념이 떠올랐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열흘 후, 만약 남작의 제안을 다시 거절한다면?’
그땐 정말로 죽이거나, 또 다른 수단으로 압박을 가해 올 것이다.
그는 잠시 타협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건 싫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리퍼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남작의 제안을 거절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최악의 상황에 몰린 것이다.
카라스의 눈이 침잠했다.
지난밤부터 쌓여 왔던 피로가 몰려왔다. 순식간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는 그렇게 설핏 잠이 들었다.
“…….”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던 걸까.
카라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위가 온통 어두웠다. 수용소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주변에서는 간간이 다른 노예들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취침 시간. 깨어 있는 자는 근처에 없었다.
카라스는 누운 채로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을 붙였다. 그런데 뭔가가 불편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베개가 너무 높은 것 같았다. 그래서 목이 뻐근하여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는 손을 올려 베개를 매만졌다.
“…….”
그런데 베개 아래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돌멩이? 아니었다. 계란 모양의 단단한 ‘무엇’이 베개 아래에 있었다. 베개가 높게 느껴지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걸 끄집어 내었다.
“…….”
그것은 타원형의 구슬이었다. 주변을 점령하고 있는 밤의 어둠보다도 훨씬 어두운 칠흑의 빛을 내고 있는 구슬. 아마도 리퍼가 죽기 전에 몰래 숨겨 두고서 보관해 오던 물건인 듯했다.
“……뭐지?”
구슬을 살피며 중얼거리던 카라스가 멈칫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무언가 묵직한 음성이 울렸던 것이다.
그는 다시 주의를 집중했다.
― 카……밀……카……사…….
방금 놓쳤던 목소리가 다시금 뇌리에 울렸다. 그 서슬에 깜짝 놀란 카라스는 그만 구슬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하였다.
그는 이내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구슬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3장 메탈슈트 제작(1)
그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카라스는 스스로 슈너드 남작을 찾아갔다.
“그게 정말인가?”
남작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카라스는 그를 마주 보며 묵묵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남작이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졌다.
“어허, 의외로군. 너같이 자존심이 강한 타입은 조금 더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슈너드 남작의 입꼬리는 슬쩍 말려 올라가 있었다. 영원히 굴복하지 않을 것 같던 카라스가 의외로 하루 만에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남작에게 있어 카라스는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생각 같아서는 확 죽여 버리고픈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카라스 대신에 노예들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을 인물이 딱히 보이지 않으니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남작은 카라스가 계속 거부를 할 경우, 한 달은 더 설득을 하며 지켜볼 심산이었다. 그만큼 카라스의 노예들에 대한 장악력, 카리스마가 탐났던 것이다.
그런 차에 카라스가 예상보다 일찍 마음을 돌린 것은 이래저래 남작에게 있어 기분 좋은 호재일 수밖에 없었다.
남작이 말했다.
“어쨌건 네놈도 마음을 고쳐 먹었다니 다행이군. 오늘은 다친 몸을 추스르고, 내일부터 당장 일터로 돌아가 노예들을 장악하도록. 네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 스스로 그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란다. 알았나?”
카라스는 남작을 마주 봤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라?”
“예.”
“어디 말해 보아라.”
카라스가 말했다.
“실은 한 가지 허락을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공장의 폐기물 처리장을 전담하여 관리해도 될런지요.”
“폐기물 처리장을?”
“예. 기왕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출입을 했으면 합니다.”
“그곳이야 리퍼 놈도 가끔 출입하기는 했었다만……. 그곳은 재활용도 안 되는 고철 덩어리만 가득한 곳인데?”
그러자 카라스가 대답했다.
“폐기물이라도 잘 뒤져 보면 돈 될 물건이 아주 없지는 않는 법입니다. 여건만 마련해 주시면 아예 바닥까지 싸그리 긁어 드리겠습니다.”
“허허?”
남작이 이놈 좀 보게, 하는 눈빛으로 카라스를 보았다. 착복에 도가 튼 자신도 그 방법은 생각 못했었다. 남작의 뇌리에 황금빛 망상이 펼쳐졌다.
기분이 좋아진 남작은 두 번 생각지도 않고 카라스의 요청을 허했다.
“좋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남작은 카라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뒤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카라스의 눈매가 차갑게 빛났다.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